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말하고, 말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기
1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참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날이 적지 않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덜해질 거라는 생각은 그저 단견이거나 편견이었고, 우리는 하루에 하루만큼씩 더 무모해지고 있다.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가 가진 무모함의 형태는 사뭇 공격적이었다. 마음이 한 번 사랑할 때 말이 두 번 사랑하는 식의 무모함. 아직 사랑을 잘 모르면서 당당히 사랑을 말하는 무모함. 말이 앞장서서 거대한 윤곽을 그리고, 뒤따라온 마음이 그 안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사랑을 건축하는 무모함.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가진 무모함은 망설이는 형태에 가깝다. 세상에 뿌려진 모든 예쁜 단어들을 다 모아 빚은 말로도 이길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사는 일 자체의 무모함. 분주한 말들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도, 눈빛이나 체온 같은 것들을 통해 마음의 수심을 잴 수 있을 거라 믿는 일과 그럼에도 그 일에 종종 실패하는 무모함. 그렇지만 여전히 말에 기대고 싶은 충동에 가끔씩 지고 마는 무모함. 자꾸 먼지를 일으키려는 말의 날개가 뽑히고, 자꾸 변두리만 기웃거리려는 말의 다리가 잘리고, 자꾸 아름다운 곳만을 가리키려는 말의 두 팔이 끊어지고, 비로소 몸통만으로 육박해 들어갈 일만 남은 짧은 말이 전부임에도, 그 말이 두 사람 사이에 ‘사이’를 만들거나 지우거나 하는 그 거대한 기적을 일으켜줄 거라 희망하는 일의 무모함.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불가능성을 알고도, 기꺼이 짊어지고 천천히, 침묵을 응시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일의 무모함.



나는 거기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린 채 그 푸르스름한 어둠을 바라봤다. 내비게이션에 따르면 그 어둠 저편이 순천만이었다. 나는 마치 자세히 바라보면 순천만이 보이기라도 한 듯이 그 어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말했다시피 어둠은 푸르스름했다. 어둠 속에는 어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둠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 뭔가가 있었다. 그게 뭔지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어둠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자 그 어둠은 근사해졌다.
_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꽃이 꽃을 사랑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다가가는 동안
꽃은 그 자리에서 서로 눈빛으로 사랑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어떤 순간에도 그렇게
자기들 사랑의 방법이 있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만질 수 있어서 쓰다듬을 수 있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어서
사람은 그냥 갈 수 있어서
남몰래 혼자 떠나려고 하는 세상에
네가 있지 않아서
사람이 꽃이 아니길
참 다행이다
꽃이 스쳐가는 바람과 함께 너에게 갈 때
_ 이사라, 「사람」전문
사랑을 할 줄도, 사랑을 받을 줄도,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언니에게 말했었지요? 하지만 스톡홀름의 불빛들이 점점 작아지는 걸 내려다보며 이제는 언니를 사랑한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쓸쓸함에 마음이 쓰인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하게 든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 아닐까요?
_ 김민아, 윤지영,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2
지난여름 어떤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로 학비를 벌었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올 무렵 그의 아들에게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를 보살피는 일을 그만두고 난 뒤에도 우리는 가끔 만나 산책도 하고 커피와 빵도 같이 먹었다. 그때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죽을 때 그냥 잠자듯이 했으면 좋겠어. 아들 녀석이랑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지 의논하고 장을 볼 계획을 세우고, 아들이 장 보러 간 사이 그렇게 잠자듯이." 나는 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들에게 물었다. "점심때 브로콜리 수프랑 닭가슴살 구이를 먹자고 하셔서 장 보러 갔다 왔더니, 소파에 앉아 계시더군요. 어머니, 불러도 대답을 안 하셔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할머니, 힘센 할머니, 정말 말씀하신 대로 하셨군요. 사는 힘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힘도 힘인 것을.
_ 허수경,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죽음에 대한 글들이 더욱 눈에 밟힌다. 그 글들을 짓고 있던 때 시인의 몸이 죽음에 얼마나 바투 다가앉아 있었는가는 읽으며 알 길이 없으나, 그녀의 눈이 항상 죽음을 더듬고 마음이 언제나 죽음의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었음은 알겠다. 부디 그 눈과 마음과 글들이 세상 너머에서 온 온갖 궂은 것들의 침윤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시인을 지켜주었기를. 죽음을 거꾸러뜨리지는 못하였으나, 죽음을 따라나서는 길에 혀와 손발이 다 자유로웠기를. 외람되지만, 얼마쯤은 기꺼우셨기를.
3
각박한 현실에서 사회의 기준에 나를 맞춰서 살아간다면 자존감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틀림없이 불행한 평생을 보낼 것이다. 나만의 자존감측정도구를 찾아내야 한다. 세상이 정한 사회계측기를 나의 자존감측정도구로 그냥 받아들이는 경우 나의 자존감은 항상 바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본이 만든 사회계측기를 나의 자존감 측정도구로 사용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이 만든 사회계측기를 나의 자존감측정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자존감측정기가 필요한 것이다.
_ 최명기, 『결심만 하는 당신에게』 94쪽
이런 글이 묶인 책이 버젓이 나온다는 사실은 눈 밝은 독자들을 열 받게 한다.
독후감 숙제를 생전 처음 받아 든 초등학생이 쓸 만한 문단이다. 첫 번째 문장과 네 번째 문장, 두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과 여섯 번째(그리고 일곱 번째) 문장은 의미하는 바가 완전히 같다. 마치 일부러 계산해서 못쓴 것처럼 못 썼다. “사회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이는 자존감이 바닥을 칠 수밖에 없으니 그런 불행을 피하려면 자신만의 자존감 측정기가 필요하다.” 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내용이) 또 평범한(형식조차) 한 줄을 저렇게 써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의학전문가는 의학에 대해 쓴다. 과학전문가는 과학에 대해 쓴다. 세상에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것을 쓴다.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것을 쓸 자격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편이다. 그들이 전문가니까. 그런 관점은 어쩌면 ‘쓰는 일’을 업신여기는 태도일 수 있다. ‘자신의 것’과 ‘쓴다’ 사이에서 앞의 것만 방점을 찍는 일, 그러니까 책의 본질을 콘텐츠에서 찾는 일은 옳지만 그르다.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건 쓰는 이는, 심지어 자신의 글을 책으로 펴내는 이는, 거짓말이나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바로 어떤 자격을 획득할 수는 없다. 그건 독자를 위해서도, 작가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작가가 자신의 분야에 매진하다 보니 글 솜씨까지 갖출 여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초고는 반드시 우리가 대개 편집자라고 부르는, 글을 다루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다. 편집자가 저 문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직무 태만이고, 발견하고도 넘어갔다면 직무 유기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렇다. 더 무서운 일은 이 작가의 이름으로 스무 권이 넘는 책이 검색된다는 사실이다. syo는 이 작가를 처음 접한다. 부디 이 책이 이 작가에게 예외적인 부끄러움이었으면 좋겠다.
-- 읽은 책들 --



허수경,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이아림,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최명기, 『결심만 하는 당신에게』
-- 읽는 책들 --






손아람, 『세계를 만드는 방법』
김사과, 『N. E. W.』
조중걸,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조성준, 『닥치고 데스런』
김서영 외, 『어린 왕자, 진짜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신경림, 『사진관집 이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