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가 되지 못한 나머지,
1
개는 자기가 개라는 것을, 자기와 너무도 다르게 생긴 다른 개가 저와 같은 개라는 것을, 아는 걸까? 알아서 저렇게 다정한 걸까? 아니면, 몰라서 저렇게 다정한 걸까?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다정하기 위해,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나와 너무도 다른 저들도 역시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걸까, 몰라야 하는 걸까?
골든 리트리버 같은 큰 아이와 장모 치와와 같은 조그만 아이가 어울려 뒹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여움폭탄으로 내 심장을 조진다는 점을 빼면 공통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저 아이들이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이 신비롭기가 그지없다. 하지만 그 신비함은 딱히 인간이라고 빗겨 나가진 않는 듯하다. 세상에는 100kg짜리 역기를 수월하게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달에 100권을 수월하게 읽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그 두 가지를 다 할 줄 아는 이도 놀랍지만 인간이고,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놓고는 가끔 아령 대신 들었다 놨다 하며 아이구 무겁구나야 하는 이도 역시 같은 인간이다. 리트리버와 치와와 중에 누가 더 나은 개냐는 물음이 개물음이듯이, 어떤 유형의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라는 선언 역시 개소리겠으나, 어쨌든 인간이라는 종족의 스펙트럼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자주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이제 와 내가 철인 3종 경기에 매년 참가하는 유형의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악기를 다루거나 그림을 그려도 평범한 수준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진 못할 것이고, 남에게 한없이 베푸는 인간만큼이나, 남을 등쳐먹는 인간이 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세상은 무엇이 될 수 없는지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추측케 한다. 그 과정은 아프거나 슬프거나 최소한 웃프다. 젖먹이 때 무한한 방향으로 뻗어있던 선택지는 시간에 침식되어 맹렬한 속도로 허물어진다. 죽어버린 가능성들의 폐허를 쓰린 마음으로 배회하다가 몇 안 남은 차선들, 차악들을 저울에 올려놓으며 종점 쪽으로 한 걸음씩 흘러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평범한 인간의 정의定義가 아닐까?
내가 되지 못한 무엇인가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내가 된 무엇인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을까? 그들에게나, 혹은 나에게나.
2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그레이슨 페리의 『남자는 불편해』,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1』,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 정춘수의 『한번은 한문 공부』, 나쓰메 소세키의 『우미인초』,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었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은 기본소득에 관해서 공부할 때 베이스캠프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 책의 각 챕터를 통해 기본소득을 알려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단 두꺼운 책을 한 권 옆에 가져다 놓았다.


이 두 권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교차해 읽는 맛이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런 복잡한 현실을 풀어나가는 동시에, 정책과 문화를 통해 보통 사람들을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장하는 거대한 거미줄로 사로잡으려는 정부의 시도들을 회의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나는 체제의 화물칸에 빽빽하게 갇힌 희생자들이 서로에게 가한 잔인한 행위를 간과하지 않으려 애쓸 것이다. 희생자들을 낭만적으로 그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정확한 구절은 아니지만) 전에 읽은 한 문구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민중운동을 위해 승리의 기록을 날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서술의 목적이 과거를 지배하는 실패만을 요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가들은 끝없는 패배의 순환에서 공모자가 되어 버린다. 역사가 창조적이라면, 또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덧없이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힘을 모으며, 때로는 승리한 잠재력을 보여준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어쩌면 순전히 희망사항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미래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의 견고함에서가 아니라 덧없이 지나간 공감의 순간들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_ 하워드 진, 『미국 민중사 1』
이러면 이제 막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이 읽은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가끔 하루키 전작 읽기를 시도하다가 중간에 지루해서 관두는데, 첫 작품이라 어쨌든 읽게 된다. 지금 이게 하루키 전작 읽기의 구덩이로 나를 또 한번 몰고 가는 음모의 시작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