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처럼 수많은 여름 가운데 당신이 있던 어느 여름

 

비가 많은 여름이었다. 소매를 걷고, 바짓단을 걷고, 당신과 나는 비를 긋고 있었다. 비를 듣고 있었다. 당신 몰래, 나는 비 냄새 맡는 척 킁킁 소리를 내며 당신의 냄새를 맡기도 했다. 빗소리처럼 당신이 말했다. 너무 덥지 않아 참 다행이죠, 올해는. 내가 더위를 끔찍해하는 사람임을 당신이 안 지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다. 비 냄새처럼 내가 대답했다. 잔잔하게만 내려주면 신발 젖을 일 없을 텐데. 신발에 물이 들어차면, 말은 하지 않아도 당신의 두 볼에, 이마에, 불쾌감이 아슴아슴하다는 사실을, 그런 표정을 만나면 어쩐지 나도 저 비가 싫어진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깜짝 놀란 것도 채 한 주가 지나지 않았다. 당신과 나의 그 여름은 그랬다. 어쩌자는 말도 없이 열심히 서로의 주변을 맴돌다 가끔 만나는 해처럼 달처럼, 우리가 그랬다. 비가 우리 두 사람 가운데 온전히 누구의 편은 아니었듯이, 우리는 서로에게 온전히 누구는 아니었다. 당신은 가끔 내게 누구였다가, 톺아보면 또 누구도 아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들같이, 당신이 내 쪽으로 깃발처럼 강하게 펄럭인다는 느낌에 돌아보면, 당신은 깃대처럼 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마, 당신에게 나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두 회상하는 마음이 빗소리를 맞아 태어난 젖은 아쉬움일 뿐이고, 어쨌든 그 여름에 당신과 나는, 혹은 최소한 나는,

 

비가 내리면 당신이 있어서 좋았다. 비가 그치면 당신이 있어서 좋았다. 바람이 불면 좋았고, 땀이 흐르면 좋았다. 여름을 사랑하는 방법을 처음 배웠다. 여름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오랫동안 비를 긋고 서 있으면서 조바심 내지 않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함께 비를 듣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많이 그립거나 무언가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 없이, 크게 요동치지 않는 마음으로 그저 아련하게 어떤 장면을 추억하는 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당신에게 배웠다. 당신이 모두 알려주었다.

 

이 비가 지금 거기에도 내릴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적당한 거리인지 모르겠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이 그가 만들어둔 그만의 공간인지를 모르겠다그 거리를 모르겠는 건내가 그 사람에게 가고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그래서 내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경독서공감사람을 읽다

 

  오후까지 어둡게 막아놓고 산중에 가는 비 내린다

  한세상 사는 것도 그저 어수룩한 속셈이 좋을까.

  짐작할 만하다가 고개 잠시 돌리면 방향도 안 보이고

  어느 때는 동행까지 축축하게 젖어서 지워지고 마는

  미끄러운 바위만만한 틈에서만 다치는 어리석음.

  옷 벗은 네 몸 보기는 처음이다.

  젖어서 편안해 보인다.

  산정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계곡을 길삼아 내려온다.

  떠나지 못한 바람 몇 개숲속에 숨어 낯을 가린다.

마종기山行 3

 

  "제가 탈 기차는 좀 나중에 떠납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걱정 마세요." 그가 말했다. "제 시간에 차장이 와서 깨울 겁니다오늘 우리가 만났던 이런 식으로우리의 이 가방들을 들고서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요여행 잘 하시길 바랍니다."

안토니오 타부키인도 야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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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4-2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로 인해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 아름다워요^^

syo 2018-04-24 13:51   좋아요 0 | URL
항상 든든한 syo의 무츨방지위원 독서괭님^-^

chaeg 2018-04-25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와 당신‘이라는 곡이 생각나네요 :)

syo 2018-04-25 13:1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러네요 정말.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AgalmA 2018-04-29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소리처럼 말하는 당신이라니! 여름의 사랑맛이란 게 있죠...아, 나 넘 늙은이 같은 말했어ㅜㅜ...어쩔 수 없지. 췟.

syo 2018-04-30 07:4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여름의 사랑맛이라니, 전 도저히 짐작도 못하겠어요 어려서 그런갘ㅋㅋㅋㅋㅋㅋㅋ

2022-03-01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02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