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부관찰
친구들은 왠지 다들 잘나가고, 술과 밥을 잘 사준다. syo는 그들과 만나면 최대한 찌질이로 보이지 않으려고 되레 큰 소리로, 나는 백수니까 니가 사는 거예요, 하며 무슨 맡겨 놓은 쌀가마니라도 찾아오듯 당차게 뜯어먹지만, 그리고 이 착한 놈들은 언제나 웃으며 흔쾌히 지갑을 열지만, 사실 syo의 마음 속 마이너스 통장에는 에누리 없는 찌질함이 찌질찌질 잘도 적립되고 있다. 그러니까 자존감을 담보로 우정을 확인하는 셈인데, 자존감이란 게 퍼고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은 또 아닌지라, 결국 사람 만나는 일이 썩 달갑지가 않게 되고 만 요즘이다.
syo는 살며 단 한 번도 잘나간 적이 없지만, 어쩐지 친구들은 언젠가 가장 잘나갈 것 같은 인간으로 항상 syo를 지목하곤 했다. 하도 그러기에 심지어 나조차 진짜 그런가보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막 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자꾸자꾸 아광속으로 흘러 스치고, 매장량이 한없을 것 같았던 가능성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발되었다. 그리고 뿅, syo는 쩍 갈라진 논바닥에 철퍼덕 퍼질러 앉아, 쏟아지는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 X선 감마선 왠갖 따가운 스펙트럼을 몽땅 정수리로 수신하면서, 깨진 바가지로 마른 땅이나 벅벅 긁는 중이다. 아놔, 목말라 죽겠는데 비는 대체 언제 내리는 거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별 볼 일 없었을 때, syo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한탄하면 친구들이 말했다. 그래도 넌 그 정도면 떳떳한 학벌이 있잖아.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넌 그 정도면 고개 뻣뻣이 세우고 다녀도 될 학점이 있잖아. 학점이 비슷한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넌 과외로 지갑 빵빵히 채우고 다니잖아. 만만치 않게 과외를 하던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넌 그 와중에 연애도 하고 있잖아. 대체 니들 나한테 왜 그랬니. 좀 절망하도록 냅두지.....
친구들이 별 볼 일을 획득하고, syo만 여전히 비루한 시점이 되니 그 말은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넌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게 많잖아. 책 많이 읽어봐야 돈도 쌀도 쏟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본주의월드에 발을 담그자마자 바로 알아챈 친구들은 다시 이렇게 고쳐 말했다. 그래도 넌 생각이 깊잖아.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 봐야 머리만 아프고, 머리는 아무리 아파봐야 주린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깨닫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결국 요즘 친구들이 입에 올리는 말은 딱 하나로 귀결된다. 그래도 너한텐 임선생(여친입니다)이 있잖아. 끄덕끄덕. 아예 이 한 마디로 시작하고 그대로 종결이다. 결국 오늘의 syo는 학교도 학점도 성적도 성격도 돈도 책도 말도 글도 생각도 사상도 뭣도 아닌, 오직 사랑하는 사람 하나로 특정되는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실 syo는 이 말이 퍽 기꺼운데, 이 사람은 앞에 열거된 모든 특성들을 묶어 갖다 줘도 안 바꿀 만큼 과분하기 때문이다.
둘 이상의 문자 또는 도형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결합상표는 그 구성 부분 전체의 외관, 호칭, 관념을 기준으로 상표의 유사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나, 상표 중에서 일반 수요자에게 그 상표에 관한 인상을 심어주거나 기억, 연상을 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만으로 독립하여 상품의 출처표시기능을 수행하는 부분, 즉 요부가 있는 경우 적절한 전체관찰의 결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요부를 가지고 상표의 유사 여부를 대비,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_ 2015후1690 판결 [등록무효(상)]
줄곧, 나라는 인간과 다른 인간을 식별하기 위한 표지는 내 내부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더 나은 나를 만드는 길은 오로지 자신을 경작하는 것 말고는 없다고 믿으며, 모든 시선을 내 안으로만 꽂아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 안에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자신을 아무런 색깔도 희망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마침내 고개를 떨굴 때, 뺨을 때려 나를 깨우고 옆에서 손 잡아준 눈 맑은 사람이 있었다. 비록 내 안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도, 그 손을 쥐고 있기만 하면 밖으로부터 충만하게 채워 들어오는 사람. 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나를 세상 다른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 내 밖에 있는 나의 식별표지. 나를 빈 도화지가 아니라 하얀 색으로 그린 그림으로 만들어주는 나의 바탕색.
어쨌거나 요즘은 기승전사랑이군요. 그거야 뭐, 사랑밖에 남은 게 없어서 그렇지요.
그래도 이만하면 살 만한 것 같습니다.



나 :
가장 쉬운 연산으로 헤아려지는 자.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연산으로 헤아려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자. 나를 가장 많이 속이는 장본인. 내가 가장 자주 속는 장본인. 가장 추악하지만 가장 빠르게 용서하는 사람. 빠른 용서로 가장 깊이 추악해지게 방치하게 되는 사람. 가장 만만한 분노의 대상. 가장 최후의 분노의 대상.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서 두려운 자. 어쩌면 '너'의 총합일 뿐인 자.
_ 김소연, 『한 글자 사전』
만약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던 인생'까지 동시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_ 가시라기 히로키, 『절망 독서』
같이 걸었다. 내가 아는 가장 재밌는 농담을 하고 싶었다. 아직 어색한 이와의 산책에서 그 농담을 처음 했을 때, 그 농담을 듣던 이는 배를 잡고 굴렀다. 그 농담 이후 우리의 간격은 50센티 정도 더 가까워졌다.
내가 가진 가장 파괴력 있는 농담을 다시 써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같이 걷는 이에게 그전에 같이 걸었던 이에게 했던 농담을 똑같이 해보았다. 같이 걷던 이는 그럭저럭 웃었다. 내가 아는 가장 재밌는 농담은 그럭저럭한 농담이 되었다. 그럼에도 더 수시로 농담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욱 더 그럭저럭한 농담이 되도록.
_ 김종관, 『골목 바이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