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산업에는 분홍꽃잎이 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김해에 있는 'ㄱ 산업' 에 분홍꽃잎이 있기 때문에 분홍산업이라고 내가 지칭한 것이다. 내가 꽃잎을 처음 본 것은 작년 이맘때다.
납품할 물건을 'ㄱ 산업' 에 내려놓고 거래 명세서에 사인을 받기위해 2층 사무실로 올라갔었다. 문을 열자마자 출입문을 향해 앉아 있는 경리와 얼핏 눈이 마주쳤다. 경리 아가씨는 사무를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고, 나는 부장님께 가서 명세서에 확인 사인을 받아 나왔다. 김해에서 부산 공장까지 오며 코스모스 같은 경리의 모습을 몇 번인가 떠올리며, 많은 나이에 참 주책이다라고 생각했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분홍산업에 가게 되었는데 작업복에서 애써 출퇴근 복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김해로 향했으며, 1층 공장은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2층 사무실로 향했다. 행여 1층 공장에서 부장님이 나오시며 나를 맞이하시면 그날은 크게 낭패를 보는 날이었다. 어쨌든, 차를 세우는 동시에 누가 불러 세우기 전에 후다닥 2층으로 뛰어오르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사무실의 문을 연다. 내 눈과 마음은 구석진 부장님 자리로 쏠리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정면을 향한다. 사무실 문은 여닫을 때마다 삐익 하는 소음이 나는 샤시였다. 그러면 꽃잎이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러면 나도 천천히 발을 들여 놓으며, 기다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바보처럼 살짝 웃는다. 내가. 그리고 부장님께 가서 명세서를 내민다.
대금 결제 건으로 분홍산업에 갔었다. 처음으로 부장님이 아닌 꽃잎이에게 볼일이 있는 것이다. 책상사이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 항상 얼굴만 겨우 볼 수 있었는데 그날은 운 좋게도 그녀의 책상을 보게 되었다. 결제 금액의 동그라미도 확인하지 않고 나는 재빠르게 구석구석을 살폈다. 분홍 토시, 분홍 휴대폰 외피, 분홍 컴퓨터의 바탕화면, 분홍 시계..... 그곳은 분홍 세상이었다. 분홍 세상의 공주 같았다. 돌아오며 나는 그녀를 '분홍꽃잎' 이라 불렀다.
우리 공장에서 분홍산업에 매 달 들어가는 세트 품목을 포기하려 했을 때 혼자 주말마다 해 보려 했었다. 물론 나의 기술을 향상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꽃잎이를 볼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그래서 한 달동안 주말에 해 보았지만,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세트 품목은 우리공장에서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지금은 일부 소모품만 납품하고 있다. 꽃잎이를 본 지도 2달이 지났다. 꽃잎이에 대한 감정이 까마득한 옛 일, 전생처럼 느껴진다.
분홍산업에 전화를 걸어 꽃잎이와 공적이 아닌 사적인 통화를 시도해 볼까하고 가끔씩 생각한다. 그래서 데이트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계속 사귀는 것이다. ㅎㅎ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내게 현실은 연애에서도 예외일 순 없는 듯 하다.
남자 친구가 있으면 어쩌지?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면 어쩌지? 나같은 타입을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나중에 해도 될 고민을 미리하고 앉았다.
파랑은 분홍에 다가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