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골집에는 포도나무가 있다. 그 사이로 고추, 상추 호박, 마늘, 옥수수(내가 제일 좋아하는 찰옥수수)도 자라고 있다. 집 한편엔 잔디가 있고 그 옆으론 조그마한 화단도 있다. 이 곳은 어머니의 보금자리이며 삶의 터전인 동시에 어머니의 일부분이다.

해 뜨기 전, 호미를 들고 포도밭으로 들어가신 어머니는 아침 식사도 잊고 풀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 신다. 어머니께 잡초는 마치 당신의 보금자리를 위협하는 적들과 다름없다. 제거된 잡초도 아무렇게 흩뿌리시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빠삭 마를 수 있게 햇빛이 잘 드는 곳에 한 쪽 방향으로 해서 가지런히 일렬로 늘어놓으신다. 호미를 바쁘게 움직이시며 전진, 전진.  앞으로 나아가며 당신의 지나온 발자국까지 없애 가면, 어느새 포도밭은 밭이 아닌 화단처럼 변해간다.

한낮에는 따가운 볕을 피해 집안에서 머무르신다. 빨래도 하시고 , 혼자 계시지만 바닥을 항상 빤질빤질하게 묻지르신다. 그리고 나서 한숨 주무신다. 코까지 곯아가며 아주 편하게 주무신다.

기운을 잃은 해가 산머리에 걸터앉을라치면 다시 밭으로 나가신다. "아이고, 요런 못된 것 들" 하시며 다시 한 전쟁 치러시고 어둠이 짙어져야 방에 불이 켜진다.

300평이 될까말까한  그리 큰 밭은 아니지만 칠순 노모가 감당하시기에 녹녹한 규모는 분명 아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풀을 메고 나면, 다시 이쪽 끝에선 어머니께서 욕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풀은 기어코 올라온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치러지는 끝없는 전쟁이다. 이렇게 대여섯번은 해야 잡초가 기운을 잃는 가을이 오고 포도의 알맹이는 무사히 굵어져있다. 보다못한 내가 제초제 뿌릴 허락을 몇 번 구해 보았지만, 워낙 성품이 깔끔하고 깐깐해서 뿌리를 박고 누렇게 말라죽은 풀들을 보시는 것도 원치 않으시는 눈치여서 이제는 어머니께서 하시는 대로 지켜만 본다.

포도나무는 300여 그루에 조금 못 미치지만, 아무래도 늙으신 어머니께서 모든 일을 감당해 내시기엔 힘에 부치신다. 그래서 슈퍼맨, 막내아들이 주말에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신다.

주중에 공장에서 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엔 시골에서 농삿일하는 것을 아는 친구가 이런 나를 보고 타고난 일꾼이라며 악의 없이 놀리기도 한다. 외사촌 누이동생들은 고모가 오빠에게  일만 시키니 오빠가 데이트 할 시간도 없다며 나를 위해 변론을 해 주기도 한다. 친구의 말이 옳고 동생들이 고맙지만, 어찌하리!

어머니께서 힘에 버거운 농사를 지으시니 자식들은 분명히 도와야 한다. 가족이 있어 바쁘신 형님들보다 부지런히 도와야 하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한다. 행복이란 기어가 잡음 없이 잘 돌아가기 위해선 각각의 톱니바퀴가 튼튼히 제자리를 지켜야 하고 틈틈이 윤활유도 뿌려 주어야 한다. 어머니는 우리 자족의 행복을 지탱시키는 톱니바퀴의 축이며, 나는 윤활유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어머니의 심기가 불편해지시면 톱니바퀴엔 잡음이 생기고 톱니바퀴의 이가 대번에 부러지고 만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선 절대로 안된다.

다음 주엔 사정이 있어 시골집에도 가지 못할 것 같기에 어제(일요일)는 농사일을 많이 했었다. 웃자란 포도나무의 가지도 쳐주고 비료도 뿌리고 농약도 쳤다. 포도의 가지를 일일이 잡고 불필요한 새순을 치고, 가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고정 선에 묶은 다음 웃자라지 못하도록 잘라주는 일은, 번거러운 일이지만 포도농사에 빼먹어서는 않되는 중요한 단계이며, 하고 나면 포도밭은 잘 가꿔진 정원처럼 깔끔해진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과 기름 묻은 쇳덩이를 만지다가 물먹은 뽀송한 생물들을 만지는 것은 메말라 가는 내 정서에 큰 위안을 준다. 어머니와 같이 땀 흘려 일 하다 보면 어머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확인 할 수 있고 촘촘했었던 가지사이에 볕이 들게 되고 바람이 살랑살랑 일게 되면 나무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듯 하여 보람도 느낀다.

주말에 푹 쉬고 한 주를 능률적으로 일하는 것도 바라는 바이지만, 어머니의 불편한 안색을 떠올리면 공장에서 일 하다가도 시골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다.

바깥일을 할 수 없는 장마 때나,  태양이 곡물들을 돌보는 한여름때가 와야지, 편안하게 방에 누워 수박이나 잘라먹으며 쉴 수 있을 것 같다.



가지 정리 전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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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띠아 2005-06-0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향에 정겨움...

iamtoc 2005-06-1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효자다. 아저씨.

파란운동화 2005-06-1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ㅎㅎ
어머니께 하듯 색시한테도 잘 하겠지요. ㅋㅋ

효자이기 보단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별로 효자도 아니예요.

여명 2005-06-1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갔을땐 사과나무였는걸로 기억나는데...
포도나무로 탈바꿈했네...
가을에 포도좀 팔아라..거래처 물좀쳐야겠다...ㅋㅋ

파란운동화 2005-06-18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의 당도가 높아 거래처에서 주문이 쇄도할 것이다.
내 친구
부자 되겠네. 랄랄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