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바람을

                                - 최정례

 

나무가 바람을 당긴다
이 끈을 놓아
이 끈을 놓아
끌려가는 자세로 오히려
나무가 바람을 끌어당길 때
사실 나무는 즐겁다
그 팽팽함이

바람에 놓여난 듯
가벼운 흔들림
때론 고요한 정지
상처의 틈에 새 잎 함께 재우며
나무는 바람을 놓치지 않고
슬며시 당겨 재우고 있다

세상 저편의 바람에게까지
팽팽한 끈 놓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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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시 쓰는 일은 세계의 주인되는 일

주체의 전환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니 발상의 전환 또는 뒤집어 보기나 거꾸로 보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기왕의 관습이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니라 뒤집어서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창조적,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지요. 바람이 나무에 불어서 나무를 흔든다는 것이 보통 관습적인 인식이고 상식적인 표현법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나무가 바람을 당긴다/이 끈을 놓아/이 끈을 놓아/끌려가는 자세로 오히려/나무가 바람을 끌어당길 때/사실 나무는 즐겁다/그 팽팽함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바람이 아니라 나무가 주체가 되어 바람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오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김수영이 시 「풀」에서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라고 노래하여 바람(지배세력)의 관점이 아닌 풀(민중)의 세계관으로 주체전환을 의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체의 전환은 바로 부정정신의 발현이고 반역의 정신을 표상한다고 하겠지요. 뒤집어 보기, 거꾸로 보기란 바로 새롭게 보기이고 자유롭게 보기이자 창조적으로 보기이고 동시에 주인돼서 세상 살아가기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이 새롭게 보고 자유롭게 봄으로써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주체적인 노력, 창조적인 의지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군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
 

낙산사 가는 길

                 - 유경환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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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어

<물처럼 맑은 심경 티끌 하나 없는 밤/철창에 새로 돋는 달빛 고와라/근심 걱정 모두 허공 마음만 있나니/석가도 원래는 보통 사람인 것을〉이라는 만해의 한시 「옥중감회」가 있더군요. 제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여 제자리 못잡고 있을 때 눈감고 가만히 읊조리는 시입니다. 몇해 겨울씩이나 감옥에 갇혀 모진 추위와 고문,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끝내 지조와 신의를 지킨 만해의 그 마음을 생각하노라면, 어느새 제 근심걱정은 참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문득 마음이 맑고 밝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는 것(一切惟心造)입니다. 마음 하나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지구라도 깃털처럼 가벼울 수 있고, 지옥 또한 극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가 그것을 잘 말해주는군요. 우리가 어떻게 무슨 수로 천근만근 깊이의 고요를 저울로 잴 수가 있나요. 아니 산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이 세상 어디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뿐 〈하늘 저울/마음일 뿐〉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깨침이고 놀라운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 면벽수도한 고승의 오도송(悟道頌) 수준인 것이지요.

아, 저는 과연 제 마음 속 고요의 바다물을 됫박으로라도 되질해서 언제쯤 속모를 그 깊이를 한길이라도 재어볼 수 있게 될 것인가요? 그냥 제 마음 하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면서 등불삼고, 지팡이 삼아 살아가다보면 그 깊이를 조금이라도 어림짐작하게 되지 않을까 싶군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적빈을 위하여

                                                        - 김석규

 

방어진으로 와서 만호장안의 바다를 소유하기로 한다.
옆구리에 끼고 온 것이란 때 묻은 담요 한 장과
고단한 몸 눕혀 아름다운 꿈 청하기에 넉넉한 베개
이제 와서 보니 이것도 한갓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밤마다 뒤척이는 바다를 베고 잠들 수 있고
아무래도 시린 어깨는 한 자락 파도를 끌어다 덮을 수 있으니
가난은 나의 고향
가난만이 살림의 밑천이었던 어머니의 무덤
기둥에 머리를 처박고 마루 끝에 앉아 있던
번번이 남루의 헌 보따리를 들고 오는 가난이여
오늘은 내가 가진 바다를 죄다 돌려주려 한다
해 돋는 아침과 달 오르는 저녁의 바다 봉두난발이 되기 전에
언제라고 풍족하게 머물다 가도록 자리 비워 두었으니
어려워 말고 문을 두드려라. 밤새 불을 밝힐 기름도 있으니
그러나 어쩌랴 저 무변의 바다를 다 소유하고도 빈주먹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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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저승갈 때 무얼 갖고 가지요?

남쪽 바닷가 마을에 어떤 가난한 한 어부가 살았다지요. 그래서 가난을 이기지 못해 아들은 일찍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스님은 큰스님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어느날 늙어 돌아가시게 된 어부 아버지가 찾아왔더랍니다. 한 잔 곡차를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내가 네게 한 평생 아무 것도 물려주지 못해 가슴 아팠다. 다만 내겐 저 바다밖에 없으니 저 바다를 다 네 것으로 해라” 하시더란 얘기입니다.

어떤 큰스님께 이 말을 전해 듣고 저는 크게 깨친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 이 세상에 나올 적에 벌거벗고 나온 것 아닙니까? 이른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구나 다 자기 앞에 가로놓여진 생의 바다, 업(業)의 바다를 헤쳐갈 수밖에요.

그래서 김석규 시인도 이런 시를 썼는가 봅니다. 우리 모두 다 벌거벗은 적빈(赤貧)의 삶, 비인 생의 바다를 살다 가는 것이지요. 〈방어진으로 와서 만호장안의 바다를 소유하기로 한다//…중략…//그러나 어쩌랴 저 무변의 바다를 다 소유하고도 빈주먹뿐이다〉라는 이 시의 핵심은 바로 빈손으로 와서 뜬세상을 가득 안고 살아가다가 결국 빈손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허무한 생애, 슬픈 삶을 잘 말해주는 것이지요.

흔히 말하듯이 우리들은 저승갈 때 무얼 가지고 가겠습니까. 태어날 때 불끈 쥐고 나온 빈주먹뿐이지요? 우리 모두 헛된 소유를 탐하고 누리려 아둥바둥할 것이 아니라 텅빈 충만, 따뜻한 청빈을 아름답게 껴안고 살다가 떠나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작게, 온전하게.

그거면 되지요.

작은것, 아름답습니다.

작고 온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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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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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메일 중에서...

―비속어의 리얼리티를 아시나요?

쌍말 또는 욕설의 리얼리티를 아시는지요? 일상적이고 교양적인 말투보다 때로는 더욱 강렬하게 사실감을 표현하고 설득력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욕설의 시학입니다. 흔히 판소리계 서민소설에서 토박이말에 곁들인 쌍말과 욕설적인 표현들이 작품에 맛깔스런 사실감을 더해주고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한 비속어들에는 살아있는 감정들이 진하게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쌍말과 욕설, 즉 비속어들은 표준어처럼 다듬어져 있지는 않지만 그 속에 민중적인 생활감정이 적나라하게 굽이치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도 그렇지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이라는 노골적인 감정이 직설적으로 담겨있는 이 토막말 속에는 그리움의 감정과 자기 카타르시스의 욕구가 함께 절절하게 표출돼 있는 것입니다. 점잖은 표현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그리움의 감정, 그 리얼리티의 절실함이 애절하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절실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외마디소리를 하늘더러 읽어달라는 듯이 모래사장에 대문짝 만하게 써놓고 썰물지는 가을 바닷가에 쓸쓸히 서있는 게 혹 당신 모습은 아니신지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