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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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메일 중에서...

―비속어의 리얼리티를 아시나요?

쌍말 또는 욕설의 리얼리티를 아시는지요? 일상적이고 교양적인 말투보다 때로는 더욱 강렬하게 사실감을 표현하고 설득력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욕설의 시학입니다. 흔히 판소리계 서민소설에서 토박이말에 곁들인 쌍말과 욕설적인 표현들이 작품에 맛깔스런 사실감을 더해주고 설득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한 비속어들에는 살아있는 감정들이 진하게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쌍말과 욕설, 즉 비속어들은 표준어처럼 다듬어져 있지는 않지만 그 속에 민중적인 생활감정이 적나라하게 굽이치고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금 이 시도 그렇지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이라는 노골적인 감정이 직설적으로 담겨있는 이 토막말 속에는 그리움의 감정과 자기 카타르시스의 욕구가 함께 절절하게 표출돼 있는 것입니다. 점잖은 표현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그리움의 감정, 그 리얼리티의 절실함이 애절하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절실한 그리움과 외로움의 외마디소리를 하늘더러 읽어달라는 듯이 모래사장에 대문짝 만하게 써놓고 썰물지는 가을 바닷가에 쓸쓸히 서있는 게 혹 당신 모습은 아니신지요?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