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하샘...

저.. 사실..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 못했어요. 한번도 '사설모의고사 후 협의회'라는 것을 가져본 일이 없어서인가봐요. 성적이 나온 후 그에 대한 대처방법은 역시 뻔한 걸 왜 몰랐을까요?

 

샘 말씀대로 과연 그런 식이라면 장이나, 감 입맛에 맛는 성적을 낼 수 있는 학교가 부산시내에 몇 학교나 있을까요? 아니, 전국에 몇 학교나 있을까요? 솔직히 1등인 학교나 1등인 학생이라도 마음 편할 수 있을까요? 결국은 '우리 학교 성적 형편없으니 보충 늘리자 ('정규 수업 열심히 하자'가 아니라)로 결론 나고 자기 학교보다 더 독하게 시키는 다른 학교랑 비교 당하면서 교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충시수 늘리고 교사들의 권리, 아이들의 권리는 소외되고..

 

사설 학원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하나의'기업'이니 만큼 적정 수준으로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므로 아이들이 늘 어려워할 수 밖에 없고 불만족스러운 성적과 등수에 따라서 부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도록 만든다는 이유. (이런 이유로 학교 시험에서조차 과목별로, 계열별로 등수를 산출할뿐 전체 등수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오래되었고 이것이 '법'이며 '정의'이지요.)

 

'현실적으로 불법'인 상황에서 정규 일과를 빼서 시험을 치르게 되므로 아이들의 학습권과 교사의 수업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이유. (특히, 사설 모의고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아이들에게 선택의 여지마저 주지 않고 돈까지 내고 억지로 치게 하거나, 원하는 아이들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종일 '자습'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는 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치려는 아이와 안치겠다는 아이 중, 누구의 권리를 먼저 배려해주어야 합니까?)

 

교사 고유의 '평가권'을 스스로 무시하도록 하여 교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는 이미 다른 유명 교사 (강사)의 수업에 들러리 서서 아이들을 감독하는 것까지 허용하고 있으니... 자존심... 학교를 이미 다른 강사의 강의실로 만들어주고 나아가 그 강의 잘~ 들으라고 참여를 독려하고 자는 아이 깨워주고, 야단치고... 우리의 자존심은 '벌써' 상했어야하지 않나요?), 또 아이들로 하여금 교사의 수업과 평가보다는 사설학원의 그것을 더 신뢰하게 만든다는 이유.

 

학원과 학교의 거래(학년 회식비를 지급.. 정말 이것이 '다'일까 의심스러운 건 내가 부정적인 인간이라서인가요?), 학원과 대학의 거래(특정 대학, 특정 학과 컷트라인 상향 조정 등)를 알게 모르게 조장한다는 이유.

 

사설학원의 모의고사를 치르는 그 자체가 '수능' 점수를 올리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 전혀 검증된 자료가 없다는 이유. (사실 선행학습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는 행위 자체가 학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의 결과를 들이대며 아이들을 긴장시켜 좀 더 공부시킬 수 있다는 명목을 들이대지만 이건 우리가 오랫동안 스스로를 구속해온 하나의 '신화' 아닐까요? 아울러 시험 치르는 그 하루, 수업결손과 시험 스트레스에 따른 부작용을 생각한다면 아이들 정서면에서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이 제가 사설 모의고사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샘 덕분에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덧붙일 수 있게 되었네요.

시험 결과가 학교 수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 보충을 늘리는 허술한 명분을 하나 더 늘려주고 (덕분에 정규수업의 질이 소외되는 부작용까지 동반하는) 그 효과없음으로 인해서 다시 사설모의고사를 쳐야한다는 필요성을 더 부각시키게 되는... 그렇게 돌고돌아 여전히 사설 모의고사, 학교에서의 효과없는 보충수업은 끊이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샘..

오늘 말씀드렸듯이 저는 결국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선에서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모의고사 치지 않겠다는 우리반 열두명의 아이들... 시험 치는 그 시간 교실에서 자습해야합니다. 장님께서 그 아이들을 따로 빼서 관리할 경우, 모의고사를 시행 자체를 백지화할까 겁이 나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모의고사가 백지화 되는 것, 저도 부담스럽습니다. 우리 반에는 지독하게 치고싶어하는 아이들도 있거든요. 백지화 될 경우에 받을 그 아이들의 원망, 그 부모들의 원망을 감당해 낼 자신이 도저히 없어서 장님께 '안 칠 권리', '자습이 아닌 다른 형태의 수업 배려를 받을 권리'를 끝내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안치겠다는 우리반 아이들은 아직 이 사실 - 아이들이 시험치는 동안 자신들은 교실에서 자습해야한다는-모르고 있는데 알고나면 오히려 모의고사를 치려고 하지 않을까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10월 끝까지 반대했던 내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그에 따른 자괴감 때문에 사실 편칠 않습니다. 지금으로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그날 감독을 하지 않는 것 정도? 반대하면서 모의고사 시험을 감독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 같습니다. 소심한 저는 저 대신 다른 샘이 감독을 들어가는 교무실에 앉아있을 자신도 없어서 그날 연가를 쓸까 생각하고 있는데 결재가 날까 걱정입니다. 오후엔 방학 중 보충수업 때문에 '학운위' 회의까지 잡혀 있습니다. (제가 반대해도 방학 중 보충수업 안건은 그대로 통과될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이 원해서 하는 보충수업이기 때문에 서류상의 하자는 전혀 없지요. 그리고 보충수업을 간절히 원하는 학부모 위원들... 교육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이어질 문제도 아니었을테니까요)

 

샘,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가를 내고 시험 감독과  학운위 회의에 둘 다 참여하지 말아야할까요?

출근은 하고 감독은 거부해야할까요?

병 지각하고 오후에 학운위 회의에만 참여해야할까요?

저로선 정말 결정하기 힘이 드네요.

 

보충수업문제.. 제가 너무 시니컬한가요?

 

하샘!!

저도 알고 있습니다. 권위적인 학교 분위기에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때론 왕따 비슷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스스로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기도 지독하게 힘이 들겁니다.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반 아이들에게 선택의 여지 없는 보충수업신청서를 나눠주며 항의를 받을 때의 난처함이나, 원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억지로 수업하며 느끼는 굴욕감이나, 시수 문제로 교사들 사이의 시비를 지켜보아야하는 짜증스러움이나, '돈'에 얽힌 오해를 아이들로부터 받을 때의 억울함이나..

 

두 가지 중에 어떤 괴로움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선택 기준.. 교사인 내가 보호하고 더 배려해야할 대상은 학교 사회에서 여전히 약자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이 아닐까요? 동료에 대한 나의 입장 때문에 아이들의 입장에 눈 감아버린다면 교사로서 나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정보여고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저는 '내 입장' 때문에 아이들에게 야단치고 강요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지각으로, 결석으로, 수업태도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칠 때, 장이나 감에 대한, 동료교사에 대한 나의 체면과 입장이 크게 개입하여 벌과 야단의 경중에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해야했습니다. 아이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조금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포장을 뜯어내니 그 안에 '나의 입장, 나의 체면'이 잔뜩 또아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최소한 나의 입장 때문에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강요하지 말자...

그것이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대한민국 학교 사회에서 아이들의 입장을 1순위로 배려하겠다.

그건 하나의 오만과 만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저를 교사이게 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제를 아이들 앞에 서게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저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바꾸어 내는 것도 너무 힘든 사회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되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우리는 하루하루 선배교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선배교사상.. 이젠 우리가 그렇게 되어가야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하샘에게 편지를 남긴다는 것이 저 자신에게 쓰는 다짐의 글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다져나가지 않으면 주저앉아버릴 것 같아서요. ^^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힘이 들지만 또 새로운 힘이 솟기도 하니까요.

하샘의 응원이 그런 힘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의지하는 것 알고 계시죠? 작년 생각 가끔해요. 사실... 자주.. ^^

 

언젠가 버스정류소에서 미현이를 만났어요.

샐쭉 웃는 모습이 '참 건강해졌구나' 생각하게 했지요.

"하샘이 미현이 너 궁금해하시는데.. 전화라도 해드려라~"

녀석의 표정이 밝게 빛나는 걸 보고 헤어졌답니다.

아까.. 이야기해드린다는 것이 깜빡..

 

건강한 모습, 담에 또 뵈어요~

 

2004. 12. 10. 금요일 새벽 한 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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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실 사설 한 번 치는 것도 괜찮단 생각을 한 편이었다. 학습권 수업권 따위 사실 생각 안 하고 그날 하루 공치는 것 정도, 그리고 아이들은 지 성적도 비교해 보고 싶어하니 대충 꿩먹고 알먹고.

근데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된 건지 절실히 깨달았다. 학교덕분에

교장이 불법이라서 안 친다는 것을 부장들, 담임들이 치자고 하여 11월에 쳤는데 그 대가로 꼭 교과협의회를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시험 결과가 나오자 성적 분석 자료를 내 주면서 교과협의회하라고 1,2년 국영수사과 샘들 모아놓고 장,감이랑 와 있는것이었다.

사립과 비교해서 공립여고로 꼴등이다(공립여고는 중앙만 쳤다), 전국 대비 평균도 낮다. 등등. 그리고 왜 우린 사립과 안되는가, 더 시켜야 한다.  수학이 떨어지니까 수학보충을 더 해야겠다, 보충 수업을 더 하자. 열심히 보충수업 늘려 잘 해보자.....

결국 성적이 낮은 데 대한 처방도 똑 같고 결론은 보충이다. 누구하나 수업을 열심히 하잔 소리는 하지 않는다. 심지어 수학 시수는 창의적 재량까지 8시간 한다는데 그중 재량은 자습하면서 보충을 늘린단다. 왜 그러냐니까 재량은 딴 학교도 자습하는 거란다.

결국 사설은 말도 안되는 자료(그건 정말 허구적 숫자다. 총점이 곧 실력은 아니다)를 신격화시켜서 (그야말로 물신화) 거기에 우리가 비굴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근데 첫 마디로 감이 그랬다. '요즘 청에서 치는 시험도 등수가 안 나오니 이건 정말 소중한 자룝니다.' 무엇이 소중한지 전제가 그릇되어 있으니 모든 논의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내가 얼마나 그동안 안일했던가.. 결국 수치의 노예가 되는 것 말고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년에는 나도 꼭 학습권과 수업권을 생각해서 이런 사태를 막아보려고 발버둥쳐야겠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그래도 강샘처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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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엔 신문배달부가 너무 많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새벽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괴상한 일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둘 넘게 구독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서 수십 년째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다. 몹시 부지런한 학생이 먼저 와서 ○○일보를 넣고 돌아간다. 조금 있으면 제법 나이 든 남자가 똑같은 아파트 계단을 똑같이 밟고 올라와 똑같은 집에 △△신문을 집어넣는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남자나 여자가 이번에는 ××일보를 두고 간다. 한 사람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배달하면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굴지의 신문사들이 이런 ‘황당한 짓’을 수십 년 동안이나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닌가.

 

오후에는 집배원이 똑같은 길을 밟아서 온다. 그런데 그는 전국 각지에서 온 편지는 물론이요, 서로 다른 언론사가 내는 여러 종류의 주간지까지 한꺼번에 우편함에 넣고 간다. 보통 국가가 하는 일은 민간기업이 하는 경우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경우에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편물을 배달하는 체신사업은 왜 국가가 독점해서 운영하는 것일까? 그건 반복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일정한 이동경로를 필요로 하는 배달사업은 경제학에서 ‘자연적 독점’으로 인정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에서는 경쟁이 자원의 낭비를 부르며, 일시적으로 경쟁체제가 형성되어도 반드시 독점으로 귀결되고 만다. 왜 그럴까?

 

신문과 우편물 배달사업에서는 배달 물량(서비스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한 부를 배달하는 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러 업체가 경쟁할 경우 어느 시점에선가 시장점유율이 높은 업체가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업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시장에서 축출하려고 한다. 시장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배달 단가를 최저수준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지역 전체를 한 업체가 장악하게 되고, 배달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최저수준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독점업체는 사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만큼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소비자나 거래 상대를 ‘착취’할 우려가 있고,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경쟁의 무풍 지대

 

이러한 ‘자연적 독점’ 시장에 대한 가장 단순명쾌한 처방은 국가가 그 사업을 독점해버리는 것이다. 전화선, 전기선, 파이프, 레일 따위의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통신, 전기, 가스, 철도운송 사업이 모두 직접적 국가사업 또는 공기업의 독점사업이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체신사업은 물질적 연결망이 없지만 일정한 동선(動線)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사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성격이 똑같은 신문 배달사업만은 이상하게도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서로 패싸움을 벌이고 심지어는 경쟁지국의 직원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터질 만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이러한 경쟁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네마다 모든 신문사의 지국이 있는 것은 신문사들이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언론산업’과 신문을 배달하는 ‘운송사업’을 수직적으로 통합운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본사가 지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말이다. 경쟁을 좋아해서 그렇게 하는 건 물론 아니다. 신문사가 직접 ‘배달사업’을 운영하는 목적은 판매부수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소비자 주권’을 박탈하고 새로운 신문사의 출현(신규 공급자의 시장진입)을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신문사는 지국에 내려보내는 신문의 판매대금 가운데 20%만을 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최종 유통단계의 마진율이 80%나 되는 상품은 신문말고는 없을 것이다. 정가의 80%나 되는 유통마진은 배달사업 그 자체만으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는 지국을 인위적으로 존속시키는 데 필요한 ‘은폐된 보조금’이다. 이것 말고도 유력 신문사들은 지국에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하기도 한다. 지국은 이런 돈으로 ‘사은품’을 돌리고 사람을 사서 이삿짐을 날라주는 식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벌였다.

 

신문배달을 공동으로 하면 유통비용이 절약된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 신문사 경영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거리와 지하철의 가판대에서는 실제로 모든 신문과 잡지를 공동으로 판매한다. 그런데도 정기구독자를 위한 배달만은 공동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동배달을 하면 유가부수를 감출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인쇄한 신문의 상당 부분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폐지공장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판매부수를 부풀림으로써 광고료 수입을 올린 것이다. 유가부수를 속이기 위해 지국에 높은 마진율과 별도의 보조금을 주고 멀쩡한 신문을 폐지 공장으로 넘기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부수를 부풀려 얻는 광고비 수입보다 적게 드는 한, 개별 신문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속임수가 ‘남는 장사’ 일 수 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대대적인 환경 보호 캠페인을 벌이는 후안무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엄청난 양의 귀중한 자원이 낭비된다는 것만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렇게 부풀린 부수를 근거로 광고료를 책정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광고주들은 판매부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광고의 효과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신문사가 엉터리 ‘판매부수’를 근거로 요구하는 광고비를 물어야 한다. 광고시장에서까지도 불공정 거래행위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지국을 중심으로 한 배달시장의 인위적 경쟁체제는 새로운 신문의 출현을 저지하는 경쟁제한 수단이기도 하다. 주요 ‘중앙일간지’들은 오랫동안 가격 카르텔을 유지해왔다. 공식적, 비공식적 정보교환 또는 담합을 통해 가격경쟁과 진정한 의미의 ‘품질경쟁’을 억제했다. 그 대신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혹사시키는 증면 경쟁과 살인까지 부른 부수 확대 경쟁 등 정보전달 매체로서 신문 그 자체의 품질과는 무관한 소모적 경쟁만을 벌인 것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등 ‘전통 있는’ 신문들이 지배하던 시장에 새로 진입한 『문화일보』와 『국민일보』가 재벌과 종교기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지간한 자본력으로는 전국에 지국망을 개설할 수가 없다. 『한겨레신문』도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특수 지위’가 없었다면 신문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겨레신문』도 창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잦은 배달사고 때문에 독자들의 원성을 듣고 있다. 잠재적 경쟁자의 신규진입을 봉쇄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존의 과점적 공급자들 사이의 담합과 경쟁 제한이 매우 수월하다는 것은 경쟁정책 영역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신문 비판의 세 가지 쟁점

 

이제 오랜 세월 사회․정치적 쟁점이 되어왔던 언론개혁 가운데 신문 개혁 문제로 넘어가 보자. 지금까지 나온 신문 비판의 초점은 대체로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재벌과 언론의 유착’ 또는 ‘재벌의 언론 지배’ 문제다. ‘재벌신문’들은 재벌그룹의 재정적 지원에 목줄을 걸고 있기 때문에 재벌 총수와 그들이 임명한 신문사 경영진은 신문의 보도내용을 직접적으로 통제한다.

 

재벌의 비리를 들추는 기사는 원천봉쇄하고, 재벌의 이익을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으며, 재벌의 행태를 비난하는 정치인은 우스꽝스럽거나 위험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다. 서로를 공격하다보면 공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재벌신문들은 경쟁사가 속한 재벌그룹에 손해를 줄지도 모르는 보도를 자제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다른 신문사들도 재벌기업이 최대의 광고주이고, 광고수입이 신문사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침묵의 카르텔’에 가담한다. 소비자인 독자들이 바라는 사실보도와 공정보도는 재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실현된다.

 

영국 신문은 전통적으로 썩고 구린 냄새가 나는 곳을 들추어내는 ‘탐지견’을 자처하고, 독일 신문은 ‘무지한 민중을 계도하는 선교사’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지만, 우리나라 신문은 주로 힘없는 집단이나 재벌의 이익을 해치는 집단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런 증상은 가장 대표적인 ‘재벌신문이었던’(얼마 전 소유지배 관계에서는 『중앙일보』와 삼성그룹이 분리되었지만 인적인 유대는 계속되기 때문에 『중앙일보』가 재벌신문의 성격을 어디까지 벗겨낼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중앙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문사가 광고주와 자본주라는 외부세력과 맺는 관계에서 생긴 문제이지 신문시장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두 번째 비판의 초점은 신문사 경영진의 편집권에 대한 간섭과 통제다. 이것은 주요 일간지 가운데 『한겨레신문』사를 제외한 모든 신문사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로서 지난 몇 년 간 기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선일보』를 ‘벤치마킹’한 여타 신문들의 사례에서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신문시장의 구조와 관련된 비판은 아니며, 오늘날 주요 신문사의 인적 구성을 볼 때 편집권을 독립시킨다고 해서 금방 신문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세 번째는 지도적 언론인이 사상적, 정치적 편향성이다. 이것은 특히 ‘신문재벌’ 『조선일보』가 예로부터 부둥켜안고 있는 문제로서, 지난 대선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 ‘대통령 만들기 사업’이나 얼마전 어설프게 봉합한 최장집 교수의 사상 시비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자본주이며 광고주인 재벌그룹 총수들의 DJ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증상은 ‘밖에서 온 질병’으로 해석할 소지도 있지만, 주필과 주요 논설위원들이 극도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토록 중증으로 번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 보도’의 해악에 대해서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김대중 죽이기』와 『인물과 사상』등에서 전개한 비판을 참고하면 되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언론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비판한다고 해서 고칠 사람들도 아니고, 신문사 밖에 있는 그 누군가가 나서서 내쫓아 벌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WHY NOT?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읽기)』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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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은 악이요, 수입은 선이다

환율 비상이 걸렸다. 국내 외환시장의 수급 불균형으로 달러 환율이 급락하여 경제운용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가격경쟁력이 급격히 악화, 수출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한동안 억제되어왔던 소비재 등의 수입도 환율하락에 편승해 되살아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급격한 환율 하락이 ‘수출 둔화 수입 확대’라는 경상수지 악화 패턴을 재등장시켜 200억 달러 흑자 목표 달성에 차질이 우려된다.


정말 사랍 겁주는 말이다. 여기에다 「수출업계 거액 환차손 비명」, 「채산성 악화 비상」, 「원고(圓高) 이대로는 안 된다」, 「팔수록 손해」, 「3개월 환차손 1조 9천억 원」 따위의 분석과 해설기사가 덧붙여지면 ‘IMF체제’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러니 어쩌자는 말인가? 결론은 빤하다. ‘정부가 달러를 사들여 환율을 방어하라’는 것이다. 옳은 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진단과 처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그럴 수가 없다.

 

수출업자들의 거짓 아우성

‘IMF체제’를 하루 빨리 극복하자는 ‘국민적 합의’에 딴지를 거는 불경스러운 짓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보도와 주장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주인은 수출업자가 아니다’는 말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론의 영역에서 널리 통하는 상식에 따르면, 소수의 이익은 조직하기 쉽지만 소비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생산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쉽지만 소비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그리고 수출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쉬우나 수입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우리 언론의 환율 보도를 보면 이 세 가지 상식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달러 환율은 1997년 여름까지는 900원 수준이었다가 외환위기의 조짐이 일면서 1,000원을 돌파했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인 1997년 12월의 평균환율은 무려 1,700원에 육박했다. 국가부도 위기를 넘긴 1998년 봄 이후에는 줄곧 13,00원대를 중심으로 폭이 그리 크지 않은 가운데 등락을 거듭하다가 지난해 막바지에서야 1,200원대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1999년에 접어들어 장이 열리기가 무섭게 며칠 사이에 달러당 50원이 넘게 빠져 1,100원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의 고환율은 국민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 국민 중에는 엄청난 이익을 본 사람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수출업자다. 1998년 한국의 물가는 설탕과 밀가루와 우유 등 원자재를 절대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상품의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도, 전체적으로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원자재를 수입하지 않는 상품값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작은 나라다. 메모리 반도체 등 한국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은 몇 가지 제품을 제외하면 국제시장의 상품가격에 한국 기업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환율이 폭등해도 수출업자들은 그 전과 같은 달러 표시가격으로 물건을 팔 수 있다. 더 많이 팔기 위해 물론 달러 표시가격을 내릴 수도 있다.

 

지난해 유럽연합 국가의 소비자 단체에서 현대 등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가 환율 변동을 감안해서 가격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했던 데서 보듯, 한국의 대형 수출업자들은 제품의 달러 표시가격을 별로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출업자들은 똑같은 물량을 수출하고서도 환율이 오른 것과 똑같은 비율로 늘어난 원화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예컨대 1만 달러짜리 소형차 한 대를 팔 경우 환율이 800원이면 800만 원을 얻지만 환율이 1,600이면 1,600만 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한국 최대의 수출업자가 최대의 생산자인 재벌기업임을 고려하면 수출업자가 얻은 이익의 폭은 더욱 커진다. 반면 한국의 달러 표시 임금은 1998년 한 해에 무려 절반 수준으로 하락했다. 상여금 삭감까지 포함하면 우리 근로자의 임금은 원화 표시로도 20% 넘게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업은 임금이 삭감된 만큼 추가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러면 환율 인상의 최대 피해자는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소비자다. 원자재나 중간재를 수입하는 국산품과 완성제 수입품의 가격이 폭등하면 소비자는 예전과 똑같은 물건을 더 비싸게 사거나 구입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상품이 덜 팔리면 당연히 수입업자도 손해를 보게 된다. 환율이 내리는 경우에는 수혜자와 피해자가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1998년 한 해에만 무려 399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올렸다. 달러 표시 수출액은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조금이지만 어쨌든 감소세를 보였다. 하지만 수입이 너무나 큰 폭으로 줄었기 때문에 유사 이래 최대의 흑자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환율이 오를 때나 내릴 때나 상관없이 수출업자들의 아우성뿐이다.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수출기반 붕괴 우려」, 이것은 1998년에 가장 자주 등장한 경제관련 보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였다. 달러가 비싸지면 원자재를 사기가 힘드니까 지당한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나 적어도 재벌기업처럼 직접 수출을 하는 생산자에 관한 한 이런 아우성은 엄살에 불과하다. 그들은 원자재를 수입할 때 달러를 지불하지만 물건을 내다팔 때는 달러를 벌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출업자들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달러 표시가격을 약간 인하할 수 있었다. 1998년도 수출이 전년도에 비해 물량으로는 10% 이상 늘었는데도 달러 표시 금액으로는 오히려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하지만 환율이 오르는 달러 표시 생산비 역시 낮아지기 때문에 이러한 달러 표시 가격인하에도 불구하고 개별 수출업자들은 이득을 보게 되어 있다. 예컨대 1만 달러짜리 소형차 한 대를 만드는 데 5,000달러를 손에 쥔다. 이걸 원화로 바꾸어서 국산 원자재와 부품 대금을 결재하고 인건비를 지급하고 영업비용을 지출하고 이윤을 남긴다. 대량 실업사태와 함께 국내 임금이 떨어지면 기업의 이윤을 남긴다. 대량 실업사태와 함께 국내 임금이 떨어지면 기업의 이윤은 오히려 증가한다. 아무 문제가 없다. 직접 수출을 하지 못해서 수출업자와 원화로 계약을 하는 ‘불쌍한 중소기업’은 때로 원자재를 수입하는데 필요한 달러를 구하지 못해서 애를 먹고 손해를 본다. 그러나 종합상사를 보유한 재벌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언론 보도는 모든 수출업자가 고환율 때문에 큰 피해를 보는 것처럼 묘사한다. 거짓말이다.


무시되는 다수의 이익

그런데 수출업자는 정말로 대한민국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수출 이데올로기’가 온 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많은 경제전문가와 전문 저널리스트들은 마치 수출은 선이요 수입은 악인 것처럼, 그리고 수출업자는 애국자요 수입업자는 매국노라도 되는 것처럼 선동한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전혀 없다. 경제 정책의 목표에는 경제생활의 안정 등 다른 것도 포함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부(國富)’의 증진이다. 그리고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갈파한 바와 같이 국부는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필품과 편의품의 양’을 의미한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다. 생산은 어디까지나 소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저축이 ‘현재 소비의 포기’이며, ‘미래의 소비’을 위한 수단인 것과 마찬가지다.

 

소비가 생산의 목적이라면 수출의 목적은 수입이다. 수입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직접 생산하지 않은 것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입은 선이다. 반면 수출은 우리가 직접 만든 물건을 소비하지 않고 외국 사람에게 내주는 행위다. 수출 그 자체는 악이다. 수출이 선이 되는 것은 수출을 해야 수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업자가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옴으로써 ‘애국’을 한다면, 수입업자 역시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다가 소비자에게 공급함으로 ‘애국’을 한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어 원화가치가 폭락하고 외채를 갚기 위해서 한푼이라도 더 달러를 벌어야 하는 시점에는 ‘한시적으로’ 수출이 선이요 수입은 악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도 이러한 선악의 구분은 국민의 절대 다수인 소비자의 희생과 극소수 수출업자들의 엄청난 축재(蓄財)라는 ‘불가피한 사회악’을 전제로 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원가가치의 상승은 악이 아니다. 외채위기가 없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이다. 수출업자는 손해를 보겠지만 소비자인 국민은 같은 액수의 돈으로 더 많은 상품을 사거나 더 좋은 물건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비상시국을 예외로 하면, 서울 거리에 BMW나 벤츠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것도 좋은 일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평생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좋은 차 타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국민 위화감을 거론하는 것은 고약한 선동이다. 만약 모두가 정당하게 경쟁해서 번 돈이라면 외제차를 탄다고 욕할 이유가 없다. 도둑질과 부정부패가 판친 결과 빈부격차가 생겼다면 그걸 바로잡아야지 외제차 못 타게 해서 감추어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흔히들 신문, 방송에 나와서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과소비를 지목하지만 제정신 가진 경제학 교수 치고 강의실에서까지 그런 소리를 하는 이는 없다. 이론적으로 볼 때 과소비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다. 소비는 소득을 초과할 수 없다. 소득 가운데 어는 정도를 소비하는지는 개인의 선호와 습관, 인생 설계에 달려 있다. 몇%를 저축해야 과소비가 안 되는지를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산품을 사든 외제품을 사든 소득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몫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외채가 많을 때는 되도록 국산품을 쓰는 것이 국민경제를 위해서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입품의 소비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이유는 없다.

 

‘국산품 애용주의’는 한국의 기업이 손쉽게 소비자를 등쳐먹는 데 퍽 쓸모가 있는 이데올로기다. ‘수출 애국주의’는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 상승의 최대 피해자인 소비자들을 찍소리 못하게 만드는 수출업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환율 변동에 대한 모든 보도의 이면에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칼날이 숨겨져 있다. 이렇게 해서 다수의 이익은 무시당하고 소수의 이익은 효과적으로 조직된다.

 

환율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행이 통화량을 늘려서 물가가 뛰면 당연히 원화가치는 떨어져야 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어도 원화가치가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수출이 늘고 수입이 줄어 대외적 불균형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투자자금이 지나치게 많이 몰려드는 경우에도 환율 인상은 이자율 하락과 더불어 불균형을 교정하는 균형회복 장치로 작동한다. 문제는 환율 변동 자체가 아니라 그 속도다.

 

외환거래는 원래 독립적 존재 의의를 가진 행위가 아니라 단지 실물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필요한 보조적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지구촌 시대의 현대화된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외환거래가 자산증식을 추구하는 투기의 무대로 독립적 성격을 획득했다. 소수의 ‘큰손’과 그 뒤를 따르는 무수한 ‘작은손’과 ‘개미군단’ 투자가들이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떼를 지어 똑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환율은 실물경제의 움직임을 앞질러서 또는 그와 전혀 무관하게 단기적 등락을 거듭한다. 환율이 이처럼 단시간 안에 큰 폭으로 요동치면 상품과 서비스의 국제적 거래에 따르는 리스크가 높아진다. 그리고 리스크가 높을수록 기업은 안정된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지고, 이것이 각국의 국민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환율이 오르든 내리든 변동의 속도와 폭을 완화하기 위해서 정부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외환시장의 안정을 위한 정부의 개입은 ‘대칭적’이어야 한다. 수출업자들은 환율이 급등할 때는 무역금융 지원을 요구하고, 환율이 떨어질 때는 ‘적정환율’을 들먹이면서 정부가 달러를 사들여 고환율을 유지하라고 소리를 지름으로써 ‘비대칭적’ 환율정책을 유도하려고 한다. 사익(私益)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수출업자들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WHY NOT?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읽기)』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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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 끝에

                                                - 이시영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자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바람 속으로]. 창작과 비평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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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6-0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눈물난다. 그 여자도.. 그 여자의 어린 것들도.. 그리고.. 허물어버리지 못하는 공사장 인부들의 마음도.. 눈물난다.. 그러나 나는 울어주는 것 외에 무얼하였는지.. 그래도.. 이젠 최소한 외면하진 않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