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엔 신문배달부가 너무 많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새벽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괴상한 일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둘 넘게 구독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서 수십 년째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다. 몹시 부지런한 학생이 먼저 와서 ○○일보를 넣고 돌아간다. 조금 있으면 제법 나이 든 남자가 똑같은 아파트 계단을 똑같이 밟고 올라와 똑같은 집에 △△신문을 집어넣는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남자나 여자가 이번에는 ××일보를 두고 간다. 한 사람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배달하면 효과적이라는 생각은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굴지의 신문사들이 이런 ‘황당한 짓’을 수십 년 동안이나 되풀이하고 있으니, 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닌가.
오후에는 집배원이 똑같은 길을 밟아서 온다. 그런데 그는 전국 각지에서 온 편지는 물론이요, 서로 다른 언론사가 내는 여러 종류의 주간지까지 한꺼번에 우편함에 넣고 간다. 보통 국가가 하는 일은 민간기업이 하는 경우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경우에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편물을 배달하는 체신사업은 왜 국가가 독점해서 운영하는 것일까? 그건 반복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일정한 이동경로를 필요로 하는 배달사업은 경제학에서 ‘자연적 독점’으로 인정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에서는 경쟁이 자원의 낭비를 부르며, 일시적으로 경쟁체제가 형성되어도 반드시 독점으로 귀결되고 만다. 왜 그럴까?
신문과 우편물 배달사업에서는 배달 물량(서비스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한 부를 배달하는 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러 업체가 경쟁할 경우 어느 시점에선가 시장점유율이 높은 업체가 가격경쟁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업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시장에서 축출하려고 한다. 시장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배달 단가를 최저수준까지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한 지역 전체를 한 업체가 장악하게 되고, 배달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은 최저수준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독점업체는 사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만큼 시장지배력을 이용해 소비자나 거래 상대를 ‘착취’할 우려가 있고, 그냥 내버려두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
경쟁의 무풍 지대
이러한 ‘자연적 독점’ 시장에 대한 가장 단순명쾌한 처방은 국가가 그 사업을 독점해버리는 것이다. 전화선, 전기선, 파이프, 레일 따위의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통신, 전기, 가스, 철도운송 사업이 모두 직접적 국가사업 또는 공기업의 독점사업이 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체신사업은 물질적 연결망이 없지만 일정한 동선(動線)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사업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 성격이 똑같은 신문 배달사업만은 이상하게도 경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서로 패싸움을 벌이고 심지어는 경쟁지국의 직원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터질 만큼 격렬한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이 어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면 이러한 경쟁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네마다 모든 신문사의 지국이 있는 것은 신문사들이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언론산업’과 신문을 배달하는 ‘운송사업’을 수직적으로 통합운영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본사가 지국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말이다. 경쟁을 좋아해서 그렇게 하는 건 물론 아니다. 신문사가 직접 ‘배달사업’을 운영하는 목적은 판매부수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소비자 주권’을 박탈하고 새로운 신문사의 출현(신규 공급자의 시장진입)을 방해하기 위해서이다.
신문사는 지국에 내려보내는 신문의 판매대금 가운데 20%만을 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최종 유통단계의 마진율이 80%나 되는 상품은 신문말고는 없을 것이다. 정가의 80%나 되는 유통마진은 배달사업 그 자체만으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는 지국을 인위적으로 존속시키는 데 필요한 ‘은폐된 보조금’이다. 이것 말고도 유력 신문사들은 지국에 막대한 자금 지원을 하기도 한다. 지국은 이런 돈으로 ‘사은품’을 돌리고 사람을 사서 이삿짐을 날라주는 식의 불공정 경쟁행위를 벌였다.
신문배달을 공동으로 하면 유통비용이 절약된다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 신문사 경영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거리와 지하철의 가판대에서는 실제로 모든 신문과 잡지를 공동으로 판매한다. 그런데도 정기구독자를 위한 배달만은 공동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건 공동배달을 하면 유가부수를 감출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인쇄한 신문의 상당 부분을 포장도 뜯지 않은 채 폐지공장으로 넘겼다. 이렇게 해서 판매부수를 부풀림으로써 광고료 수입을 올린 것이다. 유가부수를 속이기 위해 지국에 높은 마진율과 별도의 보조금을 주고 멀쩡한 신문을 폐지 공장으로 넘기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부수를 부풀려 얻는 광고비 수입보다 적게 드는 한, 개별 신문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속임수가 ‘남는 장사’ 일 수 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대대적인 환경 보호 캠페인을 벌이는 후안무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엄청난 양의 귀중한 자원이 낭비된다는 것만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렇게 부풀린 부수를 근거로 광고료를 책정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광고주들은 판매부수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광고의 효과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신문사가 엉터리 ‘판매부수’를 근거로 요구하는 광고비를 물어야 한다. 광고시장에서까지도 불공정 거래행위가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지국을 중심으로 한 배달시장의 인위적 경쟁체제는 새로운 신문의 출현을 저지하는 경쟁제한 수단이기도 하다. 주요 ‘중앙일간지’들은 오랫동안 가격 카르텔을 유지해왔다. 공식적, 비공식적 정보교환 또는 담합을 통해 가격경쟁과 진정한 의미의 ‘품질경쟁’을 억제했다. 그 대신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혹사시키는 증면 경쟁과 살인까지 부른 부수 확대 경쟁 등 정보전달 매체로서 신문 그 자체의 품질과는 무관한 소모적 경쟁만을 벌인 것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등 ‘전통 있는’ 신문들이 지배하던 시장에 새로 진입한 『문화일보』와 『국민일보』가 재벌과 종교기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지간한 자본력으로는 전국에 지국망을 개설할 수가 없다. 『한겨레신문』도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특수 지위’가 없었다면 신문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한겨레신문』도 창간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잦은 배달사고 때문에 독자들의 원성을 듣고 있다. 잠재적 경쟁자의 신규진입을 봉쇄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존의 과점적 공급자들 사이의 담합과 경쟁 제한이 매우 수월하다는 것은 경쟁정책 영역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신문 비판의 세 가지 쟁점
이제 오랜 세월 사회․정치적 쟁점이 되어왔던 언론개혁 가운데 신문 개혁 문제로 넘어가 보자. 지금까지 나온 신문 비판의 초점은 대체로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재벌과 언론의 유착’ 또는 ‘재벌의 언론 지배’ 문제다. ‘재벌신문’들은 재벌그룹의 재정적 지원에 목줄을 걸고 있기 때문에 재벌 총수와 그들이 임명한 신문사 경영진은 신문의 보도내용을 직접적으로 통제한다.
재벌의 비리를 들추는 기사는 원천봉쇄하고, 재벌의 이익을 해치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으며, 재벌의 행태를 비난하는 정치인은 우스꽝스럽거나 위험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다. 서로를 공격하다보면 공멸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재벌신문들은 경쟁사가 속한 재벌그룹에 손해를 줄지도 모르는 보도를 자제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다른 신문사들도 재벌기업이 최대의 광고주이고, 광고수입이 신문사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침묵의 카르텔’에 가담한다. 소비자인 독자들이 바라는 사실보도와 공정보도는 재벌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실현된다.
영국 신문은 전통적으로 썩고 구린 냄새가 나는 곳을 들추어내는 ‘탐지견’을 자처하고, 독일 신문은 ‘무지한 민중을 계도하는 선교사’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지만, 우리나라 신문은 주로 힘없는 집단이나 재벌의 이익을 해치는 집단에 대해 적대적이다. 이런 증상은 가장 대표적인 ‘재벌신문이었던’(얼마 전 소유지배 관계에서는 『중앙일보』와 삼성그룹이 분리되었지만 인적인 유대는 계속되기 때문에 『중앙일보』가 재벌신문의 성격을 어디까지 벗겨낼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중앙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문사가 광고주와 자본주라는 외부세력과 맺는 관계에서 생긴 문제이지 신문시장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두 번째 비판의 초점은 신문사 경영진의 편집권에 대한 간섭과 통제다. 이것은 주요 일간지 가운데 『한겨레신문』사를 제외한 모든 신문사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로서 지난 몇 년 간 기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선일보』를 ‘벤치마킹’한 여타 신문들의 사례에서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신문시장의 구조와 관련된 비판은 아니며, 오늘날 주요 신문사의 인적 구성을 볼 때 편집권을 독립시킨다고 해서 금방 신문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세 번째는 지도적 언론인이 사상적, 정치적 편향성이다. 이것은 특히 ‘신문재벌’ 『조선일보』가 예로부터 부둥켜안고 있는 문제로서, 지난 대선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 ‘대통령 만들기 사업’이나 얼마전 어설프게 봉합한 최장집 교수의 사상 시비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다. 자본주이며 광고주인 재벌그룹 총수들의 DJ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증상은 ‘밖에서 온 질병’으로 해석할 소지도 있지만, 주필과 주요 논설위원들이 극도의 정치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토록 중증으로 번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 보도’의 해악에 대해서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김대중 죽이기』와 『인물과 사상』등에서 전개한 비판을 참고하면 되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 문제는 언론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비판한다고 해서 고칠 사람들도 아니고, 신문사 밖에 있는 그 누군가가 나서서 내쫓아 벌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WHY NOT? (불온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의 세상읽기)』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