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가 뭐래도 '브로크백'이 최고야!"
[해외리포트] 블로그에서 되살아나는 <브로크백 마운틴> 열풍
     윤새라(tomos) 기자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지난 3월 초에 열렸던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맨 마지막, 최우수 영화상 시상에 이르러 모두를 깜짝 놀래켰다.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지던 <브로크백 마운틴> 대신 <크래쉬>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수상자를 정하는 아카데미 협회 구성원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꺼렸다는 해석부터, <브로크백 마운틴>이 너무 일찍부터 바람몰이를 해서 막판에 상승세가 꺾였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나고 한 달이 넘게 지났어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 이목을 끈다.

데이브 컬런이란 언론인이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개설한 '얼티밋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brokeback.davecullen.com)가 바로 그 여진의 주인공이다. 이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목표로 영화를 논할 뿐만 아니라, 영화가 회원들의 삶은 물론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한다.

시상식이 끝난 후 등장한 영화 광고

데이브 컬런이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특별히 기발하지는 않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카데미 최우수영화상을 타리라 기대하고 있다가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자발적 블로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그런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 데이브 컬런만이 아니고 몇 백 명, 이제는 더 숫자가 늘어 몇 천 명에 이르렀다. 4월 말 현재 회원수만 4천명이 넘고 매일 10만에서 20만 정도의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계기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가 개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원들이 의견을 냈다. 돈을 모아 이 영화와 관련된 뜻있는 일을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해서 8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이 2만4천불(약 2400만원).

그 돈으로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거들은 미국 전역에서 판매되는 <데일리 버라이어티>란 잡지 3월 10일자에 <브로크백 마운틴> 광고를 한 장 전면광고로 실었다. 광고 가격은 1만5435불(약 1500만원).

그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카데미 최우수 영화상 수상에 실패한 데 항의하는 대신 이 영화에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긍정적 광고(positive ad)'를 선택했다.

▲ 블로거들이 돈을 모아 잡지에 낸 광고.
이 광고를 보면 남자 대 남자가 아닌 두 인간 사이의 가슴 아린 사랑을 보여준 주인공 히스 레저와 제이크 길렌할의 사진 옆으로 이 영화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 이름이 일일이 적혀있고 "고맙다"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있다.

그리고 사진 밑으로는 "올해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영화인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꿔준 것에 감사한다"는 감사의 변이 달려 있다.

또 <브로크백 마운틴>을 최우수 영화로 지정한 26개 영화단체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러면서 이 광고를 게재한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은 그들과 같은 의견이라고 밝힘으로써 이 영화를 최우수영화로 선정하지 않은 아카데미를 우회적으로 겨냥했다.

아카데미의 상업적 위력을 감안해 미국 업계는 늘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총력을 기울여 영화를 띄우는 광고를 내보낸다. 그리고 상을 탄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영화 광고에 자랑스레 추가한다.

그런데 유력시되던 상을 타지 못한 영화가 도리어 그 사실을 바탕으로 광고를 낸 일은 미국 사회에서 대단히 이례적 일로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광고를 낸 당사자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영화의 감동에 끌려 전세계에서 모여든 경배자'들인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제2의 물결 : <브로크백 마운틴>을 시골 도서관에 보내자!

'브로크백마운틴 포럼' 블로거들은 광고를 내며 미국 언론의 이목을 반짝 끄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개진 중이다. 4월 초에 미국에서 <브로크백 마운틴> DVD가 출시된 것을 계기로 '제2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출시된 영화 DVD를 미국 및 캐나다의 시골 도서관 2천 곳에 보낼 계획이다. 아직까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의 메시지를 DVD를 통해 알리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블로그 참가자들에게 DVD를 기증받는 것도 한 방법으로 DVD 1천 개를 기증받겠다는 목표인데 4월 21일 현재까지 500개가 넘는 DVD가 모였다. 그러나 종교적 보수 색채가 짙어지는 기미를 보이는 작금의 미국 사회에서 이런 움직임이 얼마나 효과를 볼까?

▲ <얼티밋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 초기화면
4월 초에는 메사추세츠 주 한 감옥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죄수들에게 검열을 하지 않고 보여줬다는 이유로 해당 교도관이 징계를 받았다. 또 영화 DVD가 출시되면서 보수 단체에서는 월마트에 <브로크백 마운틴> DVD를 팔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은 영화 DVD를 판매하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월마트에 쓰라고 블로거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문화 전쟁' 속에서 월마트는 보수 단체의 거듭되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브로크백 마운틴> DVD를 취급한다고 발표했다.

한 개인이 개인적으로 시작했지만 예상 외로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꾸준히 외연을 넓혀가고 있는 '브로크백마운틴 포럼'.

따져보면 동성애를 소재로 잘 만든 영화가 결코 <브로크백 마운틴>만은 아니다. 그러나 풀뿌리 운동인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의 의미있는 활동은 인터넷의 힘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와 함께 현재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 문제가 사회·문화적으로 갖는 영향의 진폭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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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27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답니다. 비됴로 보죠...

해콩 2006-04-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 뒤늦게 상영하는 극장 없을까요? CGV 예슬전용관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때 상영되었던 '내곁에 있어줘'를 하고 있답니다. 참고로 하세요~

해콩 2006-05-2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도극장 상영 스케줄~

6/1~6/14

11:40 <브로크백 마운틴>
14:20 <메종 드 히미코>
16:40 <브로크백 마운틴>
19:00 <메종 드 히미코>
21:20 <타임 투 리브>

해콩 2006-06-1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문화 속의 동성애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교수


게이 카우보이들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리안(李安)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아카데미상을 여럿 받은 화제작이지만 국내 영화팬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게이들의 사랑이라는 소재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문제가 된 듯하다. 말하자면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적 요소를 적절하게 버무려놓는 대중적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게이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를 내놓고 옹호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방식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차라리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꼬>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퀴어무비'(동성애영화) 장르의 정치적 코드에서 보면 그다지 혁신적이거나 '불온'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동성애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과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미국문화의 여러 틈새들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번째 틈새는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동시에 가장 마초적인 미국문화의 양면성에서 발생한다. 만약 영화의 무대가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쌘프란씨스코나 뉴욕이라면 이 이야기의 긴장과 매력은 사라질 것이다. 두 주인공 에니스와 잭이 서부지역 가운데서도 '깡촌'에 해당하는 와이오밍주의 촌놈들이기 때문에 내면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사랑에 빠져든다는 설정 자체가 문제가 된다. 마초적 심성을 지닌 두 남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싹튼다는 것은 요샛말로 '대략 난감'한 일이다.

두번째 틈새는 미국 서부의 현실과 이상(신화) 사이에서 벌어진다. 전통적인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들의 끈끈한 우정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때려잡으면서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거친 삶과 투쟁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1963년의 에니스와 잭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뜨내기 일꾼에 불과하고 그들이 찾은 일거리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양떼를 돌보는 일이다. 서부의 신화에 비해 너무 초라한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이 둘은 진정한 카우보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퀴어)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미국 서부의 이상과 신화는 완전히 추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에니스와 잭의 내면 깊숙이에, 그리고 거칠고 황량한 자연의 한 자락에 똬리를 틀고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비록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마초적이면서 순수한 카우보이의 심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동명의 원작소설에서는 애니 프루(Annie Proulx)의 섬세하되 터프하고 과묵한 문체가 서부의 정경과 서부 사나이 특유의 황량하고 비정한 질감을 적절하게 포착한다. 리안 감독의 영상 역시 서정적이긴 하지만 이런 황량한 질감을 보여주는 데 어느정도 성공한다.

이 영화에 서사적 긴장을 불어넣는 최종적인 틈새는 두 인물의 표층의식과 심층의식 사이의 어긋난 지점들이다. 가령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엉겁결에(?) 정사를 벌인 다음날 에니스와 잭은 둘다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그들의 심층에서는 이 치명적인 사랑이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양치기 일이 끝나자 에니스는 헤어짐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잭을 떠나보내고 약혼자 앨머와 결혼한다. 잭은 잭대로 텍사스의 부잣집 딸 루린과 결혼하여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복귀를 꾀한다.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국면은 4년 뒤에 잭이 에니스의 집으로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남편 에니스와 잭이 정신없이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의 앨머의 어두워지는 표정은 동성애자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예고한다. 물론 당사자의 고통은 더 혹독하고 길다. 에니스와 잭은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삶의 표면을 영위하면서 일년에 한두 차례 만나 몰래 사랑을 나누는 구차한 이중생활을 무려 20년 동안 지속한다. 표층과 심층의 괴리가 이제는 표리부동한 이중생활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좀더 자유주의적인 지역으로 도망가서 함께 살지 않을까?

에니스는 농장을 꾸리면서 둘이 함께 살자는 잭의 거듭된 제의를 한사코 거부한다. 어릴 적 이웃의 동성애자가 린치당해 죽어 있는 현장을 목격한 이후 그의 뇌리에 각인된 동성애 공포/혐오가 아직 작동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에니스는 나중에 잭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린치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 공포가 잭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주된 이유는 오히려 노동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지키고 딸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에니스 나름의 신조 때문이다. 에니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듣고 텍사스에서 와이오밍까지 득달같이 달려온 잭을 매정하게 돌려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예정했던 만남을 돌연 취소하여 잭과 격한 언쟁을 유발하는 이유도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다. 에니스의 이런 일상적 고투야말로 "너를 단념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잭의 애절한 목소리 못지않게 영화의 긴장미를 팽팽하게 당기는 힘이다.

에니스는 잭이 죽은 뒤에야 이런 일상적 고투에서 놓여나 잭의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노동자 에니스가 일자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맏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노릇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긴 세월 닫아걸었던 가슴속 깊은 곳의 자기감정에 대한 인정이며, 잭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뒤늦은 응답처럼 보인다. 20년 넘게 잭이 간직해온,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자기들이 입었던 피 묻은 셔츠를 쳐다보면서 "맹세할게"라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마지막 장면은 에니스에게 노동과 동성애 사이의 갈등이 일정한 화해에 도달했음을 일러준다. 한때 카우보이의 영혼을 찢어놓은 동성애는 이제 하층노동자의 일상적 삶 속에서 작은 자리를 허락받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댓글로 저장해야한다.

어느날 갑자기 다른 사이트의 좋은 글들을 복사해도

알라딘에 '붙여넣기'가 안된다.

희안하게도 학교의 내 노트북으로는 안되고

집의 데스크탑으로는 된다.

뭐꼬 이게...

 

일일이 집에 가서 다시 작업한다.

같은 일을 두 번씩..혹은 여러 번

나는 지나치게 부지런한 알라디너이거나

서재 중독자다!!

모든 '중독'엔 毒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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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4-2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찮은 붙여넣기 1

EBS 시네마천국
[4월 28일 예고]제600회 특집 '세상을 보는 다섯가지 시선'

■ 방송일 : 2006. 4. 28. 金.
■ 연 출 : 오한샘
■ 조연출 : 박효진 / 이충환
■ 구 성 : 장혜진 / 박지은 / 김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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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은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유현목-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고통이자 즐거움이죠.” -임권택-

“하나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자.
두 눈을 뜨고 두 귀를 열고 세상을 보자.” -이명세-

“가끔은 따가운 화살을 맞더라도
시대를 한 두 걸음 앞서 나갈 수 있는…” -장진-

“주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아주 핵심적인 것으로 바뀔 때…” -봉준호-


투철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창조해낸 독특한 영상 속에 세상을 담아내고 있는
‘리얼리즘의 거장’, 유현목의 40년 영화 철학!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선보였던 실험적인 영화 세계에 이어
100번째 작품으로 또 한번 영화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감독’, 임권택의 또 다른 시작!

‘영화는 빛과 소리의 예술’이라는 영화 철학을 바탕으로
완벽에 가까운 화려한 영상을 재현해내고 있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영상 미학!

비현실적인 캐릭터 속에 존재하는 낯설음의 매력을 스크린에 담아내고 있는
‘이 시대 영화계의 자극제’, 장진이 말하는 영화의 매력!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어울림 그리고 독특한 상상력 위에서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영화계의 새 바람’, 봉준호가 말하는 영화적 카타르시스!


유현목, 임권택, 이명세 , 장진 , 봉준호 감독의 눈에 비춰진 오늘의 세상-,
그 속에서 그들이 발견해낸 지혜와 철학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전면에 서서 영화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 5인 5색 감독들의 독특하고 진지한 시각과 만나볼 수 있는 시간!

EBS <시네마천국> 600회 특집, ‘세상을 보는 다섯 가지 시선’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1994년 문을 열어 현재까지 12년간
진지한 시선으로 다양한 장르의 가치 있는 영화들을 심도 있게 다루어온 프로그램 EBS <시네마천국>이 올해로 600회를 맞았습니다.

이번 주 <시네마천국>에서는 600회를 기념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195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5인의 영화감독들이 각각 다섯 가지 시선을 통해 바라본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
그들의 영화관과 인생관 속에서 녹아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와 만나봅니다.

본 프로그램은,
최대한 나레이션을 배제하고, 다섯 명 영화감독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8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대별로 각기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영화감독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
예상되지 않은 50가지 이상의 질문을 던지고 그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인터뷰를 통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들이 가지는 고뇌와 희열은 무엇인지 접근해봅니다.

평소 작품을 통해서만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왔던 국내 최고의 영화감독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털어놓는 솔직 담백한 이야기!
스크린 뒤에 숨겨져 왔던 그들의 자유로운 시각과 가치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봄으로써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들어봅니다.
각 감독들의 독특한 영화 세계와 더불어
2006년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는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
영화라는 종합예술이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집중 조명해봅니다.

Koni 2006-04-2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키 삭제를 해보세요.

해콩 2006-04-27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냐오님.. 쿠키삭제했는데도 안되요..ㅠㅠ 암튼 감솨~
 

孔門弟子 冉有에 관한 小考   -  김 경 옥 * 부산대 윤리교육학

요 약 문

冉求는 공구의 공문십철 중 학문적인 견해에 있어서 공구와 가장 대립적인 제자이었다. 그는 “仁”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었다. 󰡔論語󰡕에는 그가 “仁”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대화하는 내용이 한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배움”에 대한 입장은 孔丘와의 政見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즉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정견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 때문에 공구에게 성토 당한 일까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염구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을 때 계씨가 사실상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그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일조를 하고, 또한 계씨가 노공이 행하는 태산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신이 하는 등 참람된 일을 수 없이 많이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특별히 제제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당시 정국에 대한 견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당시 이미 춘추시대는 끝이 나고 전국 시대로 접어드려는 즈음인데 그가 勢의 흐름을 간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구가 이상론자라면 염구는 주도면밀한 현실론자이었다.

비록 공구와 염구의 정견과 학문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제지간의 이해와 사랑은 각별하였다. 공구는 염구가 田賦를 써서 季氏의 부를 더욱 늘려 주었다하여도 노년에 이르러 공문 십철에 대한 평가에서 염구가 정치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 주요어 : 冉有, 孔子, 政見, 退, 勢


Ⅰ. 序 論

일반적으로 孔門 弟子들을 연구할 때 冉求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의 학문적 견해가 공자와 상당히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공자는 춘추말기의 “亂臣賊子”의 전쟁상황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처방으로 “仁”을 제시하여 시대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염구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지만 공자의 정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공문제자들과는 달리 “仁”을 탐구하거나 추구하지 않았다.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독자적인 견해는 현실을 예리하게 읽어내는 탁월한 현실파악력에서 기인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는 춘추 말 전국 초기 중국사회의 변화 흐름을 현실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였고 그런 변화 가운데 현실적인 역학관계에 기인하여 그의 정치역량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현실상황에 대한 대처방법에서 공자와의 대립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공자로부터 내쫒기는 일까지 있으나 공자 말년에 주유천하로부터 魯나라로 귀국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염유의 현실 정치력 때문에 가능하였다.

본 논문은 염유의 인물됨과 공자와의 사제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독자적인 정치행로를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염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학설과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데 보다 객관적이고 풍부한 자료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Ⅱ. 本 論

1. 小 傳

冉求(B.C 522-?) 姓은 冉이고 名은 求이다. 字는 子有 혹은 冉子, 有子라고 한다. 春秋末 魯나라 사람이며 孔丘 보다 29세 연하이며, 일찍이 季氏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孔子가 주유천하를 하기 전에 그가 노나라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된 자료가 없으나, 孔子가 노나라를 떠난 지 7년 째 되는 해, 노나라의 季氏가 급히 사람이 필요하여, 孔子를 부르려 하였는데, 측근의 신하가 반대하였고, 公之魚가 반드시 冉求를 부를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使者를 시켜 염구를 불렀다. B.C 490년 冉有는 공자 보다 7 년 앞서 노나라로 돌아갔으므로, 그는 그 다음해인 (B.C 489년) 陳나라에서 絶糧의 厄은 면하였다. 염구가 떠나려 할 때 그의 스승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 求를 부르는 것은 그를 작게 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큰 재목으로 쓰려고 해서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자의 이러한 예측은 적중하여 귀국 후 곧 季康子는 염구를 계씨의 총재에 임명하였다.

(1) 冉求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면서도 활달하고 시원스러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論語․先進󰡕편에 묘사된 “염유와 자공은 侃侃하였다.”는 뜻에 대하여 何晏은 “中正하고 和樂하는 모양”이라고 해석하였고, 朱熹는“간간侃侃”에 대하여 “和順함이 부족하여 강직함이 밖으로 거칠게 드러나는 모양”이라고 풀이하였다. 염구와 단목사를 간간하다고 묘사한 것은 그 氣象이 賜는 達하고, 求는 다재다능하니, 재능이 풍부하면 자연히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강한 모습으로 비친다. 그래서 강직하다고 묘사하였고, 閔子騫은 효성스러웠으므로 은은誾誾하였다고 하니, 은은함은 말은 적으나 信心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子路는 行行하다고 하였는데, 행행은 기백이 밖으로 드러남이 조야하다는 뜻이다. 은은誾誾, 간간侃侃, 행행行行은 모두 剛正하다는 의미이나 각각의 뉘앙스는 서로 다르다. 求와 賜는 剛直함이 전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며, 子路의 剛直함은 모두 밖으로 드러나 거칠게 보이고, 閔子騫의 剛直함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으나, 세 가지의 속성은 모두 마음으로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질문하여 의문 나는 것을 덮어두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로 볼 때, 冉有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나 평소에는 겸손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은 공자와 견해가 다를 때,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모습과, 자로와 염유가 “義”를 들으면 곧 바로 행하여야 한다는 염구에게 한 대답은 공자의 해석대로 그가 평소 생활에서 물러나는 측면이 있어서 고무시킨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평소 그의 일 처리하는 방식으로 볼 때 冉求는 시원스러운 면이 분명 있고, 전쟁에 임하여 싸울 때에는 지혜와 용맹을 갖춘 용사였다.

(2) 冉求는 특별히 다재 다능한 인재이다. 季康子가 孔丘에게 염구가 정치에 종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공구는 “求는 才藝가 있으니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재능이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로가 “成人-완성된 사람”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가 말하기를 “臧武仲의 지혜와 孟公綽의 청렴과 卞莊子의 용기와 冉求의 재능(藝)에 禮樂으로 가다듬는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공자는 재능을 사람이 완성되는 필수적인 한 가지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靑의 劉寶南은 󰡔論語正義󰡕에서 藝는 많이 들어 많이 알아야 가능하며, 또한 藝는 정치에서의 실무 능력이라고 해석한다. 이상에서 볼 때, 冉求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정치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求也退”의 문제는 子路의 기질과 대비되어 그 성격을 설명한 것이다. ‘물러난다’함은 성격이라기 보다는 일을 대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즉 염구는 평소 일을 임함에 조심스럽게 처리하여 자로와 같이 무턱대고 덤비지 않아 그것이 잦으면 자칫 소극적인 자세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실질은 일을 처리함에 열심히 하고자 하여 신중하고 치밀함이 지나침을 가리킨 것이다.


2. 師弟關係

염구가 孔門에 들어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일은 孔丘와 더불어 周遊列國이었다. 여행 중에 그는 모든 접하는 일과 사물의 현상에 관하여 고찰하면서 한편으론 항상 통치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향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인구)들이 많구나!’라고 하자, 염유가 질문하기를 ‘이미 백성들이 많이 모여졌거든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을 富有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또 묻기를 ‘富有하고 나면 또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공자 말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冉求는 시종일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孔丘의 시각에서 본 염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맹무백이 묻기를, ‘求는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 대답하기를, ‘求는 千戶의 읍과 경대부의 집에서 집사 노릇은 할 수 있을 것이나, 그가 仁한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자연이 묻기를 ‘중유와 염유는 大臣이라 할 만 합니까?’ 하니, 공자 말하기를 ‘나는 당신이 누구에 대하여 묻는가 여겼더니, 겨우 由와 求를 묻습니까? 이른바 대신이라 함은 의로운 도로서 군주를 섬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만두는데, 지금 由와 求는 겨우 신하로서 數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군주가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니,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이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魯의 大夫 季氏의 子弟인 계자연이 새로 공문의 자로와 염유를 자기의 家臣으로 삼고 좀 의기양양하였던 모양이다. 공자에게 중유와 염구의 신하로서의 자질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자는 數나 채우는 신하라고 평하여 중유와 염구는 계씨 일가의 노군주에 대하여 僭越하는 행동을 바로 잡지 않고 家臣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 수나 채운다고 비난하였으며 이는 결국 계씨 일가의 야망을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공자는 염유의 정치활동을 수나 채우는 가신정도로 평하는데는 그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공자의 德政은 “仁”을 구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것인데, 정치무대에서 “仁”의 실천이란 종법에 의거한 군주와 신하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노군주에 대한 계씨 집안의 참람한 행위는 당시 사회질서의 기강인 종법제도 자체를 위협하고 이는 곧 사회의 혼란을 야기함으로, 염유가 계씨의 가신 노릇을 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자의 비판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공자에게 “仁”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가 염구이다. 공자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구의 仁함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염구가 공자에게 공자가 생각하는 “仁”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았을 뿐 염유 자신이 생각하는 “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仁”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염구는 공자에게 “仁”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일찍이 공자에게 자신이 공자의 학문을 배우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토로한 때가 있는데, 말하기를 “선생님의 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의 힘이 부족하여 행하지 못합니다”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힘이 부족한 사람은 中途에 그만두나, 지금 너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자의 견해에서 볼 때, 염유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求也退”라는 공자의 설명이 타당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그것은 염구의 나태함이나 소극적 성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공자와 염구의 현실인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판단된다. 즉, 공자가 염구를 제자들을 시켜 공문제자가 아니니 북을 쳐서 그를 성토하라고 할 정도로 시각차이가 있는 원인은 바로 공자와 염구의 정견 혹은 당시 사회변화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 염유의 시대파악

염유가 계씨의 가신이 되어 그의 재력과 권력을 위해 일하게 된 이유를 필자는 당시 춘추 말의 시대상황은 급격한 전환기로서 염구는 그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는 토지와 收稅의 변화를 통하여 주왕실을 중심으로 혈연중심의 중국사회체계가 급격히 붕괴되는 시기이다. 西周後期부터 井田制가 이미 와해되기 시작하여 周宣王( 대략BC825-780)에 이르러서는 王畿의 公田에는 밭가는 禮가 거행되지 않아서, 집체 노동으로 밭을 가는 경작방식이 폐지되었으니, 이른바 “不籍千畝부적천무”라는 용어가 나왔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원의 각 제후국의 백성들이 公田에서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분분하였다고 사료에서 전한다. 또한 사례로 춘추초기 齊나라의 “甫田(大田)”에는 들풀이 무성하다는 公田에 대한 묘사가 󰡔詩經․齊風․甫田󰡕에 전하고 있다. 秦나라와 같이 경제발전이 더딘 경우 “公作”과 “私作”이 병행되기도 하였지만 시대의 토지관계 대세는 “公作”이 “私作”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이는 정전제의 와해와 함께 田地가 점점 私有化하여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井田制의 붕괴는 곧 조세관계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春秋․宣公十五年󰡕에 기재된 “稅畝”는 바로 밭의 크기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는 세법이다.
󰡔左傳․宣公十五年󰡕에서 해석하기를 “노나라가 田畝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禮에 맞지 않다. 과거 곡물을 징수할 때 井田法에서 규정하는 양을 초과하지 않았는데, 이는 財貨를 풍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라고 하였다. 穀梁傳󰡕에서도 말하기를 “옛날에는 십분의 일을 세율로 하여 공전에 밭 갈게 하고 다른 세금은 거두지 않았으니 稅畝를 실시함은 禮가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이렇게 서주 말기 이미 什一制에서 履田稅로 바뀌는 것은 고대 중국사회의 경제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였다. 춘추후기에는 중원 각국에서 이미 밭의 크기에 따라 조세하는 稅制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銀雀山에서 출토된 竹簡 󰡔孫子兵法․吳問󰡕편에는 당시 晉나라의 六卿들이 각각의 세율을 적용하여 조세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趙氏의 “公無稅焉”을 제외하고 그 외의 五卿들은 “五稅之”를 채택하여 오분의 일 세제를 시행하였다고 전한다.

春秋戰國期間동안 田地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는 일이 이미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주왕실을 중심으로 종법질서를 지켜 천하를 옛 주나라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한 孔丘의 정치에 대한 설계는 현실을 흐름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冉求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활하다고 까지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孔丘는 理想을 쫒았고, 冉求는 如實한 현실을 쫒았다. 공구 이후 유학사에서 제2의 학자로 꼽히는 孟軻(BC390-)도 각 국의 군주에 대하여 제후의 호칭-君-으로 명명한 것이 아니라 王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이미 주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니, 孔丘와의 시대적 거리가 불과 100여년 정도인데 본격적인 전국시대에 접어들었으니 고대사회의 완만한 변화과정에 비추어 본다면 사회경제적 변화의 충격과 양상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공구와 염구의 정치적 견해의 대립은 춘추말기와 전국초기의 시대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염유와 공자의 대립

계씨가 장차 전유顓臾를 치려할 때 자로가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계씨가 전유를 소유하려 합니다.”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求야 이는 바로 너의 잘못이 아니냐? 전유는 옛날 선왕께서 동쪽 몽산에 봉하시어 나라와 성의 가운데 위치하는데 社稷의 신하된 자가 어찌 그것을 치리오!”라고 하였다. 염구가 말하기를 “어른(계씨)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 두 신하가 바라는 일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구야, 주임周任(고대의 훌륭한 史官)이 말하기를 ‘힘을 발휘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도 능하지 못한 사람은 그만 둔다’고 하였는데, 위험에 빠졌는데도 잡아주지 못하니 어찌 그런 재상을 쓰리오, 또한 너희들의 말이 잘못이다. 호랑이나 외뿔소가 우리 밖으로 나오며, 귀옥龜玉이 궤 속에서 깨어짐이 바로 누구의 잘못이겠느냐?”라고 하였다.

염유가 말하기를 “지금 저 전유는 견고하고 또한 費땅에서 가까우니 지금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 자손들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구야, 군자는 대개 원한다고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꼭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들으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하니, 아마도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화평하면 적은 것이 없을 것이고,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을 닦아 오게 하고, 그들이 이르면 안정시켜야 한다. 지금 由와 求는 夫子를 도와, 멀리 있는 사람들을 복종하게도, 오게도 하지 않으니 나라가 나뉘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져 쪼개지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안에서 군대를 움직여 싸울 준비를 하니, 나는 아마도 계손의 근심이 전유를 취하는데 있지 않고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季氏가 전유를 치려고 한 것은 魯哀公 11년의 일이다. 당시 노나라 수입을 四分한 계씨가 그 반을 갖고, 孟孫․叔孫이 각각 그 一씩을 갖고, 公室은 겨우 그 이외의 수입을 취하는 데 불과했다. 전유는 魯公室에 귀속된 家臣의 나라이다. 그래서 계씨는 그 附庸인 전유마저도 이를 쳐서 自家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획책한 것이다. 공자가 “계손의 근심이 전유를 취하는데 있지 않고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한 것은 계손이 애공을 칠까 매우 염려하여 제지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철저히 宗法에 근거하여 사회질서를 유지, 안정시키려고 하였는데, 종법질서에 의거하면 계씨의 행동은 신하가 군주를 치려는 亂臣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자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孤軍奮鬪적 문제해결의 제일 과제는 정치적으로 亂臣賊子를 막는데 있었으므로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공자는 염유가 계씨를 견제하지 못함을 비난하는 사례는 󰡔論語󰡕의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계씨의 행동이 지나침이 극에 달한 사례는 아래에 보인다.

“공자가 계씨를 두고 말하되 八佾을 뜰에서 춤추게 하다니, 이런 짓을 해 넘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八佾은 天子의 정원에서만 쓰이는 춤으로 1 열 8 인으로 구성되는 춤형식이므로 八佾舞는 64인의 춤인데, 계씨는 대부의 반열이므로 제후보다 아래인 四佾-32명으로 구성해야 함에도 천자의 禮를 참람함이 극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계씨가 그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고 분개한 것이다. 이러한 계씨를 염유가 제지하기를 바라고 그의 무능함을 비판한 것이 다음의 내용이다.

“계씨가 태산에서 山祭를 지내니 선생님이 염유에게 말하기를 ‘네가 구할 수 없었느냐?’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하니,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통재라! 어찌 태산의 神이 임방만큼도 禮를 알지 못하리오?’라고 하셨다.”태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는 산으로 노공만이 산제를 지내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었는데, 계씨가 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후를 자처하였으니 孔丘는 분개하여 당시 계씨의 신하로 있던 제자 염구를 향하여 “왜 윗사람의 잘못을 구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한 내용이다. 태산이 임방만큼도 못하겠는가하고 반문하는 것은 非禮를 행하는데 태산의 신이 그 제사를 받겠느냐, 즉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계씨를 도와 그를 더욱 부강하게 해 주는 염구를 공자는 孔門에서 내쫒으려 한다. “계씨가 周公 보다 부유하였는데 冉求가 그를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더욱 그에게 재산을 늘려주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제자가 아니니, 얘들아!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함이 옳다’고 하셨다.”
淸 劉寶楠의 <正義>에서의 해석은 周公旦이 노나라에 封해져 세금을 취할 때 什一을 넘지 않았는데, 노 선공이후 稅畝가 실시되어 이미 什二(1/5)의 세무를 실시하였고, 당시 계씨가 四分公室하여 그 二를 취하였으니, 세입을 비교하면 周公의 세수보다 그 양이 많았다. 그러므로 周公 보다 부유하다고 말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데 염구가 그러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 주었으니 염구는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그를 성토한 것이다.

季康子가 田畝의 크기에 따라 稅畝를 거두려고 할 때, 염유를 파견하여 공자의 의견을 구하였다. 공자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염유에게 私的으로 말하기를 “ 有야 너는 先王들의 조세방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였고 노동의 강약정도에 따라 田畝를 징수하였고, 게다가 토지의 멀고 가까움의 거리에 근거하여 田畝의 양을 調整하였으며, 상업세를 징수할 때는 상인의 이윤수입에 따라 정하였고 게다가 그 재산의 많고 적음을 책정하여 상업세를 조정하였으며, 노역을 시킬 때에는 각 가정의 男丁네의 수에 따라 정하되 노인과 어린 남자 아이들을 고려하였으니 이 때문에 바로 홀아비, 과부, 고아, 장애인의 이름이 생겼는데, 전쟁이 발발해서야 그들을 징집하였고, 평시에는 이들은 동원되지 않았다. 전쟁이 발생하는 해에는 한 가구당 마른 곡식 一稯(종:마흔 뭇을 묶은 것)과 벼 一秉(병:열 여섯섬) 과 쌀 一缶(부:사십 두)를 적용하여 이 기준을 초과하여 걷지 않았다. 선왕들은 이렇게 하더라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만약 季康子가 法에 따라 조세를 거두려 한다면 주공의 세법을 쓸 것이요, 법을 어기려고 한다면 마음대로 거둘 것이지 뭐하러 나의 의견을 물어오느냐?”라고 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구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였고 季康子를 도와 그의 富를 늘려준 冉求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추세에 따라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자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그는 보수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염유는 자신의 견해를 견지함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역량을 발휘하여 공자가 주유천하를 마치고 노국으로 귀국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쌓는다.

 

5. 염유의 정치역량

哀公 十一年 魯의 在郞地에서 齊나라와 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서 冉有의 전쟁수행능력(정치역량)이 십분발휘되고 있다.

제나라가 식鄎땅에서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국서와 고무비國書․高無邳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여 우리나라를 치려고 淸땅에 이르렀다. 이 때 계손季孫이 그의 가신 염구冉求에게 말하기를: “제나라 군대가 청 땅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노국을 치려는 심산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당신이 혼자 남아서 지키십시오. 숙손과 맹손이 양쪽에서 애공을 따라 국경 근처에 가서 제나라 군대를 막도록 하겠습니다.” 계손이 말하기를 “어렵지 않겠소?”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이 방법이 곧 국가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라고 하니, 계손이 숙손, 맹손 두 사람을 불러 말하니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염구가 말하기를: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애공은 궁을 나갈 필요가 없고, 계손 당신 혼자 군대를 인솔하여 성을 뒤로하여 싸우셔야 합니다. 만약 당신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노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노나라의 경대부 집안의 병차는 제나라의 병차 보다 많으니 부자일가(계손)의 병차만으로도 제나라의 병차를 대적하기에 충분하니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숙손과 맹손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려 함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정권이 계씨의 집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직접 정권을 잡고 있는 지금,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니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곧 당신의 수치가 클 것입니다. 또한 제후들과 함께 회동하지도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계씨는 염구를 조회에 따라오게 한 후 당씨의 고랑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무숙武叔이 염구를 불러들여 그에게 작전계획을 물었는데, 염구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일에 대하여 깊이 그리고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니, 소인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니, 맹의자孟懿子가 강한 어조로 물으니, 염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능력을 고려하여 말하고, 역량을 계산하여 일을 도모합니다.” 하니 무숙이 말하기를: “그럼 내가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는 말인가?”하고는 들어가 병차들을 검열하였다. 맹유자孟孺子 군사를 헤아려 우군을 인솔하고, 안우顔羽가 그의 말을 몰고, 병설邴洩이 오른쪽에서 병차를 맡고, 冉求는 좌군을 인솔하되 관주부管周父가 말을 몰고 번지樊遲가 오른쪽에서 병차를 맡았다. 계씨가 말하기를: “번지는 너무 어리다.”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그는 능히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씨는 甲士 칠천명을 보유하였고, 염구는 삼백명의 무성武城人을 보병으로 삼고, 노인과 어린이는 궁실의 문을 지키게 하고 전군이 우문雩門의 밖에 주둔하였다. 닷새 후에 우군이 겨우 따라왔다. 公叔務人이 궁실을 보위하는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백성들의) 노역은 그다지도 많고, 부세는 점점 가중되는데, 위자리에 있는 자가 전승할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전사자와 함께 죽지 못한다면 어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오! 라고 나는 이미 이런 말을 하였는데 어찌 노력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노군과 제군의 전쟁이 교외에서 시작되었다. 제군이 직곡稷曲에서 부터 공격해 들어왔는데, 우리군(노군)은 도랑溝을 넘어 적을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번지가 말하기를: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청컨대 求의 부대로 하여금 도랑을 넘어가게 하십시오.” 염구가 그의 의견에 따라 병사들이 도랑을 넘게 하였다. 노군이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격하였다. 右軍이 달아나자 제나라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진관陳瓘․진장陳莊이 걸어서 사수泗水를 건넜다. 孟之側은 대열의 후미에 있어서 최후로 도성에 입성하였다. 그는 채찍을 뽑아 말을 치면서 말하기를: “말이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임불유 林不狃의 동료가 말하기를: “달려라!”라고 하자, 불뉴不狃가 말하기를: “내가 누구인들 함께 달리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자, 그 동료가 말하기를: “그럼 멈춰서서 저항할거요?” 라고 하자, 불뉴가 말하기를: “어떻게 달리기로 강함을 다투겠는가?”라고 하면서 천천히 말을 타고 걸어가다가 피살되었다. ……저녁이 되어 정보원이 말하기를: “제군이 모두 달아났습니다.”라는 보고를 하였다. …… 염구는 제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矛를 사용하여 적지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었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이는 道義에 합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염구가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자 季康子가 그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하여 감탄하며 묻기를 “그대의 전략과 전숭은 배운 것인가? 타고난 것인가?”라고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공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라고 하니, 계강자가 묻기를: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생님을 임용하려면 명분이 맞아야 합니다. 그의 학설은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귀신에게도 베풀어 질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軍事에 공을 세워 2500호 민가를 받을 만하더라도 나의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상의 사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염유와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염유는 공자로부터 배운 전쟁수행방법을 발휘하여 노나라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의 공훈으로 공자는 주유천하에서 노나라 군주의 예우를 받으며 귀국한다.


Ⅲ. 結 論

冉求는 孔子의 공문십철 중 학문적인 견해에 있어서 孔丘와 극단적으로 대립한 제자이었다. 그는 “仁”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었다. 󰡔論語󰡕에는 그가 “仁”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대화하는 내용이 한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배움”에 대한 입장은 孔丘와의 政見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즉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정견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 때문에 공구에게 성토 당한 일까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염구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을 때 계씨가 사실상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그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일조를 하고, 또한 계씨가 노공이 행하는 태산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신이 하는 등 참람된 일을 수 없이 많이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특별히 제제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당시 정국에 대한 견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당시 이미 춘추시대는 끝이 나고 전국 시대로 접어드려는 즈음인데 그가 勢의 흐름을 간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구가 이상론자라면 염구는 주도면밀한 현실론자이었다.

그는 비록 공구의 제자이긴 하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였다. 예를 들면, 子華란 제자가 공구의 심부름으로 제나라에 갔었는데, 염자가 그의 모친을 위하여 양식을 줄 것을 공구에게 청하여, ‘여섯 말 넉 되를 주어라’고 하였는데, 적다고 여겨 더 주기를 청하자 공구가 ‘열 여섯 말을 주어라 ’하였는데, 스스로 적다고 여겨 독자적으로 여든 섬을 주었다는 일이 「雍也」편에 전한다. 이러한 사례는 그가 공구의 의견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정치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공구로부터 배운 원칙을 실현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역학관계에서 일을 자신의 판단으로 처리하였다.

비록 공구와 염구의 정견과 학문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제지간의 이해와 사랑은 각별하였다. 공구는 염구가 田賦를 써서 季氏의 부를 더욱 늘려 주었다하여도 노년에 이르러 공문 십철에 대한 평가에서 염구가 정치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참 고 문 헌

司馬遷, 󰡔史記․仲尼弟子列傳󰡕, 󰡔史記․孔子世家󰡕.
張岱年 主編, 󰡔孔子大辭典󰡕, 上海辭書出版社, 上海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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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星元, 󰡔論語新講義󰡕, 명문당, 서울 1993.
陳奇猷譯, 󰡔呂氏春秋․審分󰡕, 學林出版社, 上海 1995.
楊寬, 󰡔戰國史󰡕, 上海人民出版社, 上海, 1998.
唐滿先외 편저, 󰡔十三經直解․ 公羊傳宣公․十五年󰡕江西人民出版社, 南昌 1993.
鄔國義, 胡果文 李曉路選, 󰡔國語譯註󰡕, 上海古籍出版社, 上海 1994.
劉寶楠注, 󰡔論語正義󰡕, 上海書店, 上海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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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專誠, 󰡔孔子․孔子弟子󰡕, 山西人民出版社, 楡次 1989.
來可泓, 󰡔論語直解󰡕, 復旦大學出版社, 上海 1996.
蔡尙思, 󰡔孔子思想體系󰡕, 上海人民出版社, 上海 1982.


Abstract

對孔門弟子冉有的小考

金 京 玉

本論文是一篇關與孔門弟子冉有的硏究文章. 冉有是孔子的著名的學生. 他不但受到孔子的一定肯定, 而且也受到過嚴厲指責. 冉有和孔子雖然有不一致的地方, 但是他們師徒之間的關係還是密切的. 有一次, 齊國討伐魯國, 冉有力主出兵抗拒, 並親自率領左軍冲殺齊軍, 結果大敗齊軍. 在孔門弟子中, 冉有以擅長政事而著稱. 當孔子與弟子們談論自己的志向時, 冉有說 : 讓我去治理一個方圓五六十里或六七十里的小國, 治理三年, 就能使人民豊衣足食. 至于這個國家的禮樂, 則等待君子去實行了. 由此看來, 冉有治理政使擅長軍事和管理經濟. 所以孔子在評論冉有的才能時說 :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公冶長>]
󰡔論語󰡕一書曾記載了孔子與冉有在政治問題上的分岐. 孔子曾多次激烈批評冉求不沮止季氏祭祀泰山, 背着孔子多給子華母親糧食, 幇助季氏聚斂財富, 推行田賦制度和征伐顓臾等不義行爲. 孔子氣憤地說 : “求,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先進>]. 孔子對冉求激烈批評, 旣表明冉有不符合孔子以德治國的政治主張, 又說明在孔子弟子內部, 儒家思想孕育着一定的分化.
盡管如此, 孔子仍肯定了冉有的特長. 󰡔史記․孔子世家󰡕說冉 : 有爲季氏將師, 與齊戰與郞 克之. 季康子曰: “子之于軍旅 學之乎? 性之乎?” 冉有曰: “學之於孔子.” 季康子曰: “孔子何人哉?” 對曰: “用之有名. 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 .由此看來, 冉有雖受到孔子的嚴厲批評, 但他仍十分尊崇孔子, 對孔子有着深刻的認識

※ 主要語 : 冉有, 孔子, 政見, 退, 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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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7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6-04-27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사무실 아니고 연수하셨어요? ㅇㅇ학교 강사로도 이름 올라계시더마는..ㅋㅋ 유명한 분을 친구로 두었군요.
염유..는 중국어 숙제하다가 올려둔 것이지요. 제 전공이잖아요.

2006-04-27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활 꿈꾸는 추억 속 국도극장 | 공연.전시정보 2006/04/12 12:39
http://blog.naver.com/mare1020/150003370512
부활 꿈꾸는 추억 속 국도극장
'예술영화관'으로 지정 저예산영화 등 상영
"휴관 → 재개봉관 → 제한상영관 변신 거듭… 우여곡절 끝 재기 발판 마련"

자본을 앞세운 대형 멀티플렉스의 침공으로 하나 둘 맥없이 무너진 부산지역 향토 극장들. 부산 중구 PIFF 거리의 국도극장도 그 중 하나.

국도극장은 휴관과 폐관을 반복하고 제한상영관 등으로의 변신을 거듭하며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왔다. 이렇게 겨우 간판만 내건 채 잊혀져 가던 국도극장이 화려한 변신을 꿈꾸고 있다. 지난날의 무력함을 씻어내고 지역 예술영화의 거점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세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지난해 이미 '국도극장예술관'으로 이름을 바꾼 극장은 이달 초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올해의 예술영화관으로 선정됐다. 부산지역에선 서면CGV 인디영화관과 함께 선정돼 앞으로 작품성 높은 예술영화와 인디영화,저예산 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좌석수 345석의 국도극장예술관은 한 해 상영일 수의 60%인 219일을 예술영화 상영에 할애하는 조건으로 영진위로부터 연간 5천250여만원을 지원받는다. 그러나 지원금보다 더 큰 득은 극장의 색깔변화이다.

국도극장예술관의 전신인 국도극장은 대표적인 향토 영화관 중 하나였다. 지난 2000년 말 멀티플렉스의 위협에 본관이 무릎을 꿇기 전까지는 그랬다. 잘 나가던 시절 본관에 이어 착공된 2관이 본관이 쓰러지는 그 해 문을 열었지만 역시 얼마 가지 않았다. 본관은 건물이 팔려 아예 극장의 실체가 사라졌고,2관은 2002년부터 휴관했다.

2003년 9월 지금의 정상길(55·사진) 대표가 휴업 중이던 극장 운영권을 인수해 재개봉관으로 극장을 의욕적으로 재출발시켰다. 그러나 내리막은 끝이 없었다. 작품성 높은 영화 재개봉운동을 벌이는 동호회와 손을 잡고 스스로 예술영화관으로 거듭나려 했지만 경영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2004년에는 제한상영관으로 돌파구를 찾는듯 했으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제한상영가 등급의 영화만 상영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도통 작품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스크린쿼터 미이행으로 52일간의 영업정지 처분까지 당했어요. 국내영화는 아예 제한상영가 판정이 나오지 않아 스크린에 틀고 싶어도 틀 수 가 없는데도 말이죠." 당시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정 대표의 말이다.

휴관→재개봉관→제한상영관으로 애환을 거듭해오던 극장은 지난해 2월 결국 폐관으로 내몰렸다. 정 대표는 두 달 후 극장 이름을 국도극장예술관으로 바꾸고 허가를 다시 받아 예술영화와 애니메이션 상영관으로 극장의 명맥만 겨우 유지해 왔다. 하루 관객은 10명에도 못미쳤다. 지난해에도 영진위에 예술영화관 신청을 했지만 신규 영화관으로 치부돼 상영실적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숱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길을 걸어 온 국도극장예술관. 이달 초부터 묵은 때를 씻고 예술영화관으로 탈바꿈하면서 각오가 대단하다. 앞으로 부산독립영화협회와 프로그램을 함께 고민해 질 높은 예술영화를 선보이고 다채로운 소형 영화제도 마련해 지역문화를 풍성하게 가꿔나갈 작정이다. 변신의 첫 작품으로 부산 극장가에 걸리지 않았던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망종'을 상영하고 있다. cafe.naver.com/gukdo,051-245-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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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4-2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4/21~4/28
12:30 <망종>
14:30 <천국을 향하여>
16:30 <망종>
18:30 <천국을 향하여>
20:30 <천국을 향하여>

*4/29~5/4
12:30 <천국을 향하여>
14:30 <스윙걸즈>
16:30 <천국을 향하여>
18:30 <스윙걸즈>
20:30 <천국을 향하여>

*5/5~5/7
10:30 <폭풍우 치는 밤에>
12:30 <폭풍우 치는 밤에>
14:30 <폭풍우 치는 밤에>
16:30 <폭풍우 치는 밤에>
18:30 <스윙걸즈>
20:30 <천국을 향하여>

*5/8~5/10
12:30 <천국을 향하여>
14:30 <스윙걸즈>
16:30 <천국을 향하여>
18:30 <스윙걸즈>
20:30 <스윙걸즈>

*5/11~5/17
<박치기!> 상영

*5/18~5/25
<박치기!>, <린다린다린다> 교차상영

*5월중 <나그네와 마술사> 상영

2006-04-25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6-04-2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윙걸즈]는 중간고사 끝낸 아이들이랑 보고 싶은데 날짜가 어떨지 모르겠어요.
평일 저녁엔 아이들 야자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낼 수 없으니...
학부모님께 전화해서 담임이랑 야자빼고 영화보러 간다하면 좋아하실까요? 아이들은? (물론 영화비는 즈그들이 내야지요. 다섯 명 안 쪽이면 제가 쏠 수도 있지만.. )
아니면 [린다린다린다]도 좋을 것 같긴한데...
[박치기]는 당근 필수이고!! 뭐 그렇습니다.
*참! [박치기]는 졸업한 제자랑 시간 맞춰보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2006-04-26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6-04-26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을 [스윙걸즈]

시놉시스 : 지루한 여름방학, 보충 수업을 받고 있는 13명의 낙제 여고생들이 합주부에게 도시락을 전해주자는 토모코(우에노 쥬리)의 제안을 구실로 땡땡이를 감행한다. 그러나 전달된 도시락이 여름 땡볕에 상해 합주부 전원이 식중독에 걸리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도시락을 못 받은 나카무라 제외한 합주부 전원이 병원에 입원한 상태. 낙제생 소녀들은 보충수업 땡땡이를 위해 그 자리를 대신하기로 결심하며 재즈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다. 식중독에 걸렸던 합주부원들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토모코를 비롯한 못말리는 낙제소녀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고 잠시나마 경험했던 재즈에 재미를 느낀 이들은 자신만의 스윙밴드, 일명 ‘스윙걸즈’를 조직한다.
그러나 문제는 연주할 악기가 없다는 사실! 악기를 구입하기 위해 소녀들은 좌충우돌 기상천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고 막상 악기를 구해도 번듯히 연습할 공간조차 없어 해산위기에 처한 스윙걸즈...
대책없이 발랄했던 소녀들의 스윙밴드 도전은 성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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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청춘의 저항불가한 매력, <스윙 걸즈> -씨네 21 이다혜 2006.03.14 09:48

청춘에 주어진 최고의 특혜는 영원히 지속될 듯한 시간이다. 일곱번 넘어져도 일곱번 일어나는 건 청춘의 패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스윙걸즈>의 소년, 소녀들을 키우는 것 역시 번듯한 악기나 연습실, 대의명분, 거창한 스승님의 교습이 아니다. “재즈, 한번 해볼까” 하는 호기심과 마음만 맞으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무궁한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진 전부다.

남고생들이 수중발레를 한다는 설정의 <워터 보이즈>를 감독한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스윙걸즈>는 스윙은커녕 관악기를 부는 것조차 힘든 여고생들이 빅 밴드를 구성해서 스윙을 멋지게 연주한다는 줄거리다. 무더운 여름방학, 공부에 취미없던 여학생들은 합주부가 두고 간 도시락을 전해주는데, 도시락이 모두 상해 합주부는 식중독에 걸린다. 엉거주춤하게 살던 소녀들은 보충수업을 빼먹기 위해 합주부 대타를 자청하는데, 공교롭게도 합주부는 너무 빨리 학교로 돌아온다. 낙동강 오리알 처지가 된 소녀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음악을 정말 즐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빅 밴드 재즈를 연습한다.

중고 악기를 사기 위한 온갖 우여곡절은 즐거운 추억거리가 된다. 음악 때문에 겪는 당황스러움과 짜증을 포함한 모든 것이 소녀들에게는 즐거움이다. 연정으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소년과의 찌릿한 눈빛 교환 역시 사랑의 성취 대신 짓궂은 장난으로 이어질 뿐이다 (버섯을 따러 갔다가 멧돼지에게 쫓긴 소녀들이 정지화면으로 서 있는 장면에 루이 암스트롱의 가 깔리는 대목은, <스윙걸즈> 이후 제작된 <웰컴 투 동막골>의 특정 장면을 연상시킨다).

밴드의 존폐가 달린 막다른 순간마다 폭소를 이끌어내는 <스윙걸즈>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마지막 음악제 장면이 아니다. 소녀들이 호각 소리, 탁구치는 소리, 이불 두들겨 말리는 소리에서 재즈의 리듬을 발견할 때 그리고 폭설로 막힌 기차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을 위해 음악을 연주할 때다. 소년, 소녀들이 음악제 연주를 마치고 한껏 웃어 보인다. 영화를 보던 관객도 그들과 함께 미소짓는다. 그게 <스윙걸즈>의 저항불가한 매력이다.

해콩 2006-04-2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아이들과 함께 보면 좋을 [린다린다린다]

더없이 유쾌하고 찬란한 ‘한때’, <린다 린다 린다> - 씨네 21 남다은 2006.04.11 09:38

“아이를 그만두는 순간,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중략)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영화의 도입부, 한 소녀가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혹은 불안하게 묻는다. 소녀는 지금 시바사키고등학교의 문화제를 취재하는 동급생의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소녀의 표정은 무심하지만, 그녀가 내뱉는 말들에는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았을 청춘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러니 영화가 시작한 지 채 몇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질문해보는 게 나을 것이다. 영화는 학창 시절의 마지막 문화제, 이 3일간의 축제를 통해 불안한 청춘들에게 어떤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던 걸까. 세상과 대면한 예민한 소녀들의 방황 따위는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문화제에 참가하려고 연습 중이던 여학생 밴드가 내부의 갈등으로 해체될 위기에 놓인다. 드럼주자 교코(마에다 아키), 기타를 연주하는 케이(가시이 유우) 그리고 베이스를 맡은 노조미(세키네 시오리)는 보컬을 찾지 못해 걱정이다. 이들은 매우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서 유학 온 송(배두나)에게 보컬을 제의하고 송은 얼떨결에 수락하고 만다. 문제는 송이 노래는커녕 일본어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괜찮다. 이들에게는 모든 장애를 허물어줄 노래가 있고, 젊은 열정이 있고, 소녀들에게만 가능한 특유의 연대감이 있으니. 영화는 문화제 3일 전에야 급조된 이 어설픈 밴드의 연습과정을 따라가며, 특히 송과 일본 소녀들 사이의 어색하지만 재기발랄한 소통과정을 관찰하며,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녀들의 ‘한때’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그 ‘한때’는 더없이 유쾌하고 찬란한 시절이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소녀들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카메라는 소녀들이 마침내 행동을 결정하고 그 마지막 3일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준다.

무엇 하나 뛰어난 것 없는 소녀들이 밴드를 결성해,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어낸다는 기본 설정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이 평이한 구조에 생생함을 불어넣는 건 배우들, 특히 유학생 송을 연기한 배두나 덕분이다. 일찍이 <플란다스의 개>를 통해 배두나를 점찍어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선택은 적중했다. 그녀는 어색한 일본어와 어색한 한국어(배두나는 한국말을 구사할 때도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언제나 조금씩 어색하다)를 오가며 특유의 낯선 표정으로 자칫 진부해지기 쉬운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다. 더욱이 1980년대 활동했던 일본의 펑크록 밴드 ‘블루하트’의 ‘린다 린다’가 약간은 어린아이 같은 그녀의 외침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시궁창의 쥐”(노래 가사의 일부)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아무래도 일본 학교 속의 한국인 소녀, 청춘영화 속 한국과 일본의 만남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박치기!>처럼 한-일관계를 전면에 부각하거나 특정한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의 초점은, 국적을 뛰어넘은 ‘여고생’의 이야기이다. 그저 일본 학교 안에 한국인 유학생이 있을 뿐이며, 문화제의 일부로 매우 무의미한 한-일 문화교류전이 열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일본과 한국 학생들의 만남에서 어떤 민족적, 문화적인 특수성이나 정체성을 제거하고 이들의 교류를 개인 대 개인의 만남 혹은 같은 세대의 만남으로 전환시킨다. 이를테면, 한-일 문화교류전은 파리가 날릴 정도로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유학생 송은 언어나 민족적 정체성이 아닌, 음악으로 혹은 또래의 감수성으로 일본인과 어울리는 법을 터득한다. 또는 송을 짝사랑하는 일본인 남학생과 송이 비품실에서 나누는 가장 사랑스러운 대화장면에서도 이러한 방식은 잘 드러난다. 일본인 남학생은 어렵게 외운 한국어로, 송은 어색한 일본어로, 그러니까 서로 자기 나라 말이 아닌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닌, 사랑의 고백, 세상에서 가장 내밀한 언어의 이야기를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그려놓고 한-일관계를 주장하는 표면적인 교류의 방식 대신, 민족, 언어적 정체성을 제쳐두고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공통적인 감수성을 통해 만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남의 방식은 분명 새롭고 긍정적인 시작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영화의 시선이 그만큼 이상적인 순진함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로 읽히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소녀들의 뒷모습이 유달리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즉 앞을 바라보며 서 있는 소녀들의 뒤통수를 찍는다. 예컨대, 연주 전날, 송은 무대 위, 눈부시게 하얀 벽면 앞에 서 있다. 카메라는 송을 정면으로 비춘다.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송의 뒤통수를 비추는데, 이 때, 송이 바라보는 앞, 즉 관객석은 무대 위의 하얀 벽면과 반대로 깜깜하다. 영화가 보여주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내 뒤의 지나간 시절들은 찬란하지만, 내 앞에 다가올 현실은 어둡고 두려운 것.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무대 위에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존재하므로. 의미를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다만 다 함께 노래하는 게 중요할 뿐이다. 학생들이 떠나 텅 빈 학교의 풍경들을 카메라가 홀로 둘러볼 때에도, ‘린다, 린다’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추억처럼 소곤소곤 퍼진다. 영화는 이렇게 소녀들의 ‘한때’에 생명력을 안겨주려고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무심한 소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던, 그 개별 청춘의 고독한 철학은 어느새 존재를 감춘다. <린다 린다 린다>의 밝고 쾌활한 힘인 동시에 최대의 약점이 있다면, 그건 이처럼 철모르는 낭만적 시각일 것이다.
 
 전출처 : 바람구두 > 이성복 - 편지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

이성복 시인의 이 시를 연애시로만 읽어선 안 될 일이겠지만,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이 시의 맛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니, 단언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두 행의 맛이 절절하게 전해질 수 없다.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억울하니까....

누군가에게 쥐어주지 못한 마지막 편지가 내게 아직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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