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門弟子 冉有에 관한 小考   -  김 경 옥 * 부산대 윤리교육학

요 약 문

冉求는 공구의 공문십철 중 학문적인 견해에 있어서 공구와 가장 대립적인 제자이었다. 그는 “仁”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었다. 󰡔論語󰡕에는 그가 “仁”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대화하는 내용이 한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배움”에 대한 입장은 孔丘와의 政見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즉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정견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 때문에 공구에게 성토 당한 일까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염구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을 때 계씨가 사실상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그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일조를 하고, 또한 계씨가 노공이 행하는 태산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신이 하는 등 참람된 일을 수 없이 많이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특별히 제제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당시 정국에 대한 견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당시 이미 춘추시대는 끝이 나고 전국 시대로 접어드려는 즈음인데 그가 勢의 흐름을 간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구가 이상론자라면 염구는 주도면밀한 현실론자이었다.

비록 공구와 염구의 정견과 학문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제지간의 이해와 사랑은 각별하였다. 공구는 염구가 田賦를 써서 季氏의 부를 더욱 늘려 주었다하여도 노년에 이르러 공문 십철에 대한 평가에서 염구가 정치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 주요어 : 冉有, 孔子, 政見, 退, 勢


Ⅰ. 序 論

일반적으로 孔門 弟子들을 연구할 때 冉求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그의 학문적 견해가 공자와 상당히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공자는 춘추말기의 “亂臣賊子”의 전쟁상황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처방으로 “仁”을 제시하여 시대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염구는 그의 정치적 견해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지만 공자의 정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대부분의 공문제자들과는 달리 “仁”을 탐구하거나 추구하지 않았다.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독자적인 견해는 현실을 예리하게 읽어내는 탁월한 현실파악력에서 기인하였다고 판단한다. 그는 춘추 말 전국 초기 중국사회의 변화 흐름을 현실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였고 그런 변화 가운데 현실적인 역학관계에 기인하여 그의 정치역량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현실상황에 대한 대처방법에서 공자와의 대립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며 공자로부터 내쫒기는 일까지 있으나 공자 말년에 주유천하로부터 魯나라로 귀국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염유의 현실 정치력 때문에 가능하였다.

본 논문은 염유의 인물됨과 공자와의 사제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의 독자적인 정치행로를 당시 사회 상황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염유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학설과 그의 견해를 이해하는데 보다 객관적이고 풍부한 자료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Ⅱ. 本 論

1. 小 傳

冉求(B.C 522-?) 姓은 冉이고 名은 求이다. 字는 子有 혹은 冉子, 有子라고 한다. 春秋末 魯나라 사람이며 孔丘 보다 29세 연하이며, 일찍이 季氏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孔子가 주유천하를 하기 전에 그가 노나라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된 자료가 없으나, 孔子가 노나라를 떠난 지 7년 째 되는 해, 노나라의 季氏가 급히 사람이 필요하여, 孔子를 부르려 하였는데, 측근의 신하가 반대하였고, 公之魚가 반드시 冉求를 부를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使者를 시켜 염구를 불렀다. B.C 490년 冉有는 공자 보다 7 년 앞서 노나라로 돌아갔으므로, 그는 그 다음해인 (B.C 489년) 陳나라에서 絶糧의 厄은 면하였다. 염구가 떠나려 할 때 그의 스승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 求를 부르는 것은 그를 작게 부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큰 재목으로 쓰려고 해서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자의 이러한 예측은 적중하여 귀국 후 곧 季康子는 염구를 계씨의 총재에 임명하였다.

(1) 冉求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이면서도 활달하고 시원스러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論語․先進󰡕편에 묘사된 “염유와 자공은 侃侃하였다.”는 뜻에 대하여 何晏은 “中正하고 和樂하는 모양”이라고 해석하였고, 朱熹는“간간侃侃”에 대하여 “和順함이 부족하여 강직함이 밖으로 거칠게 드러나는 모양”이라고 풀이하였다. 염구와 단목사를 간간하다고 묘사한 것은 그 氣象이 賜는 達하고, 求는 다재다능하니, 재능이 풍부하면 자연히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강한 모습으로 비친다. 그래서 강직하다고 묘사하였고, 閔子騫은 효성스러웠으므로 은은誾誾하였다고 하니, 은은함은 말은 적으나 信心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子路는 行行하다고 하였는데, 행행은 기백이 밖으로 드러남이 조야하다는 뜻이다. 은은誾誾, 간간侃侃, 행행行行은 모두 剛正하다는 의미이나 각각의 뉘앙스는 서로 다르다. 求와 賜는 剛直함이 전부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며, 子路의 剛直함은 모두 밖으로 드러나 거칠게 보이고, 閔子騫의 剛直함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으나, 세 가지의 속성은 모두 마음으로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질문하여 의문 나는 것을 덮어두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로 볼 때, 冉有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나 평소에는 겸손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은 공자와 견해가 다를 때,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모습과, 자로와 염유가 “義”를 들으면 곧 바로 행하여야 한다는 염구에게 한 대답은 공자의 해석대로 그가 평소 생활에서 물러나는 측면이 있어서 고무시킨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평소 그의 일 처리하는 방식으로 볼 때 冉求는 시원스러운 면이 분명 있고, 전쟁에 임하여 싸울 때에는 지혜와 용맹을 갖춘 용사였다.

(2) 冉求는 특별히 다재 다능한 인재이다. 季康子가 孔丘에게 염구가 정치에 종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공구는 “求는 才藝가 있으니 정치에 종사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재능이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로가 “成人-완성된 사람”에 대하여 물었을 때 공자가 말하기를 “臧武仲의 지혜와 孟公綽의 청렴과 卞莊子의 용기와 冉求의 재능(藝)에 禮樂으로 가다듬는다면 완성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공자는 재능을 사람이 완성되는 필수적인 한 가지 조건으로 간주하였다. 靑의 劉寶南은 󰡔論語正義󰡕에서 藝는 많이 들어 많이 알아야 가능하며, 또한 藝는 정치에서의 실무 능력이라고 해석한다. 이상에서 볼 때, 冉求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정치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求也退”의 문제는 子路의 기질과 대비되어 그 성격을 설명한 것이다. ‘물러난다’함은 성격이라기 보다는 일을 대하는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즉 염구는 평소 일을 임함에 조심스럽게 처리하여 자로와 같이 무턱대고 덤비지 않아 그것이 잦으면 자칫 소극적인 자세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실질은 일을 처리함에 열심히 하고자 하여 신중하고 치밀함이 지나침을 가리킨 것이다.


2. 師弟關係

염구가 孔門에 들어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일은 孔丘와 더불어 周遊列國이었다. 여행 중에 그는 모든 접하는 일과 사물의 현상에 관하여 고찰하면서 한편으론 항상 통치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그가 지향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인구)들이 많구나!’라고 하자, 염유가 질문하기를 ‘이미 백성들이 많이 모여졌거든 또 무엇을 더하여야 합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백성들을 富有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또 묻기를 ‘富有하고 나면 또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공자 말하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冉求는 시종일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孔丘의 시각에서 본 염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맹무백이 묻기를, ‘求는 어떤 인물입니까?’ 하고 묻자, 공자 대답하기를, ‘求는 千戶의 읍과 경대부의 집에서 집사 노릇은 할 수 있을 것이나, 그가 仁한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자연이 묻기를 ‘중유와 염유는 大臣이라 할 만 합니까?’ 하니, 공자 말하기를 ‘나는 당신이 누구에 대하여 묻는가 여겼더니, 겨우 由와 求를 묻습니까? 이른바 대신이라 함은 의로운 도로서 군주를 섬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만두는데, 지금 由와 求는 겨우 신하로서 數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군주가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니,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일이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魯의 大夫 季氏의 子弟인 계자연이 새로 공문의 자로와 염유를 자기의 家臣으로 삼고 좀 의기양양하였던 모양이다. 공자에게 중유와 염구의 신하로서의 자질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자는 數나 채우는 신하라고 평하여 중유와 염구는 계씨 일가의 노군주에 대하여 僭越하는 행동을 바로 잡지 않고 家臣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 수나 채운다고 비난하였으며 이는 결국 계씨 일가의 야망을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공자는 염유의 정치활동을 수나 채우는 가신정도로 평하는데는 그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공자의 德政은 “仁”을 구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것인데, 정치무대에서 “仁”의 실천이란 종법에 의거한 군주와 신하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노군주에 대한 계씨 집안의 참람한 행위는 당시 사회질서의 기강인 종법제도 자체를 위협하고 이는 곧 사회의 혼란을 야기함으로, 염유가 계씨의 가신 노릇을 하면서도 그런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자의 비판이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공자에게 “仁”에 관하여 질문하지 않은 유일한 제자가 염구이다. 공자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구의 仁함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염구가 공자에게 공자가 생각하는 “仁”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았을 뿐 염유 자신이 생각하는 “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仁”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염구는 공자에게 “仁”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일찍이 공자에게 자신이 공자의 학문을 배우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토로한 때가 있는데, 말하기를 “선생님의 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의 힘이 부족하여 행하지 못합니다”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힘이 부족한 사람은 中途에 그만두나, 지금 너는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자의 견해에서 볼 때, 염유의 학문에 대한 태도는 “求也退”라는 공자의 설명이 타당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그것은 염구의 나태함이나 소극적 성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공자와 염구의 현실인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판단된다. 즉, 공자가 염구를 제자들을 시켜 공문제자가 아니니 북을 쳐서 그를 성토하라고 할 정도로 시각차이가 있는 원인은 바로 공자와 염구의 정견 혹은 당시 사회변화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3. 염유의 시대파악

염유가 계씨의 가신이 되어 그의 재력과 권력을 위해 일하게 된 이유를 필자는 당시 춘추 말의 시대상황은 급격한 전환기로서 염구는 그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는 토지와 收稅의 변화를 통하여 주왕실을 중심으로 혈연중심의 중국사회체계가 급격히 붕괴되는 시기이다. 西周後期부터 井田制가 이미 와해되기 시작하여 周宣王( 대략BC825-780)에 이르러서는 王畿의 公田에는 밭가는 禮가 거행되지 않아서, 집체 노동으로 밭을 가는 경작방식이 폐지되었으니, 이른바 “不籍千畝부적천무”라는 용어가 나왔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중원의 각 제후국의 백성들이 公田에서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분분하였다고 사료에서 전한다. 또한 사례로 춘추초기 齊나라의 “甫田(大田)”에는 들풀이 무성하다는 公田에 대한 묘사가 󰡔詩經․齊風․甫田󰡕에 전하고 있다. 秦나라와 같이 경제발전이 더딘 경우 “公作”과 “私作”이 병행되기도 하였지만 시대의 토지관계 대세는 “公作”이 “私作”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이었다. 이는 정전제의 와해와 함께 田地가 점점 私有化하여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井田制의 붕괴는 곧 조세관계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春秋․宣公十五年󰡕에 기재된 “稅畝”는 바로 밭의 크기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는 세법이다.
󰡔左傳․宣公十五年󰡕에서 해석하기를 “노나라가 田畝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禮에 맞지 않다. 과거 곡물을 징수할 때 井田法에서 규정하는 양을 초과하지 않았는데, 이는 財貨를 풍부하게 하는 방법이었다.”라고 하였다. 穀梁傳󰡕에서도 말하기를 “옛날에는 십분의 일을 세율로 하여 공전에 밭 갈게 하고 다른 세금은 거두지 않았으니 稅畝를 실시함은 禮가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이렇게 서주 말기 이미 什一制에서 履田稅로 바뀌는 것은 고대 중국사회의 경제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였다. 춘추후기에는 중원 각국에서 이미 밭의 크기에 따라 조세하는 稅制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 銀雀山에서 출토된 竹簡 󰡔孫子兵法․吳問󰡕편에는 당시 晉나라의 六卿들이 각각의 세율을 적용하여 조세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趙氏의 “公無稅焉”을 제외하고 그 외의 五卿들은 “五稅之”를 채택하여 오분의 일 세제를 시행하였다고 전한다.

春秋戰國期間동안 田地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는 일이 이미 보편적으로 시행되었다.이러한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주왕실을 중심으로 종법질서를 지켜 천하를 옛 주나라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한 孔丘의 정치에 대한 설계는 현실을 흐름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冉求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활하다고 까지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孔丘는 理想을 쫒았고, 冉求는 如實한 현실을 쫒았다. 공구 이후 유학사에서 제2의 학자로 꼽히는 孟軻(BC390-)도 각 국의 군주에 대하여 제후의 호칭-君-으로 명명한 것이 아니라 王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이미 주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니, 孔丘와의 시대적 거리가 불과 100여년 정도인데 본격적인 전국시대에 접어들었으니 고대사회의 완만한 변화과정에 비추어 본다면 사회경제적 변화의 충격과 양상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공구와 염구의 정치적 견해의 대립은 춘추말기와 전국초기의 시대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염유와 공자의 대립

계씨가 장차 전유顓臾를 치려할 때 자로가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계씨가 전유를 소유하려 합니다.”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求야 이는 바로 너의 잘못이 아니냐? 전유는 옛날 선왕께서 동쪽 몽산에 봉하시어 나라와 성의 가운데 위치하는데 社稷의 신하된 자가 어찌 그것을 치리오!”라고 하였다. 염구가 말하기를 “어른(계씨)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지 우리 두 신하가 바라는 일은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구야, 주임周任(고대의 훌륭한 史官)이 말하기를 ‘힘을 발휘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도 능하지 못한 사람은 그만 둔다’고 하였는데, 위험에 빠졌는데도 잡아주지 못하니 어찌 그런 재상을 쓰리오, 또한 너희들의 말이 잘못이다. 호랑이나 외뿔소가 우리 밖으로 나오며, 귀옥龜玉이 궤 속에서 깨어짐이 바로 누구의 잘못이겠느냐?”라고 하였다.

염유가 말하기를 “지금 저 전유는 견고하고 또한 費땅에서 가까우니 지금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 자손들에게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구야, 군자는 대개 원한다고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꼭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들으니 나라를 소유한 자는 적음을 근심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하니, 아마도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화평하면 적은 것이 없을 것이고, 안정되면 나라가 기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을 닦아 오게 하고, 그들이 이르면 안정시켜야 한다. 지금 由와 求는 夫子를 도와, 멀리 있는 사람들을 복종하게도, 오게도 하지 않으니 나라가 나뉘어 무너지고 사람들이 흩어져 쪼개지는데 지켜내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안에서 군대를 움직여 싸울 준비를 하니, 나는 아마도 계손의 근심이 전유를 취하는데 있지 않고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季氏가 전유를 치려고 한 것은 魯哀公 11년의 일이다. 당시 노나라 수입을 四分한 계씨가 그 반을 갖고, 孟孫․叔孫이 각각 그 一씩을 갖고, 公室은 겨우 그 이외의 수입을 취하는 데 불과했다. 전유는 魯公室에 귀속된 家臣의 나라이다. 그래서 계씨는 그 附庸인 전유마저도 이를 쳐서 自家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획책한 것이다. 공자가 “계손의 근심이 전유를 취하는데 있지 않고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라고 한 것은 계손이 애공을 칠까 매우 염려하여 제지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철저히 宗法에 근거하여 사회질서를 유지, 안정시키려고 하였는데, 종법질서에 의거하면 계씨의 행동은 신하가 군주를 치려는 亂臣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자의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孤軍奮鬪적 문제해결의 제일 과제는 정치적으로 亂臣賊子를 막는데 있었으므로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공자는 염유가 계씨를 견제하지 못함을 비난하는 사례는 󰡔論語󰡕의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계씨의 행동이 지나침이 극에 달한 사례는 아래에 보인다.

“공자가 계씨를 두고 말하되 八佾을 뜰에서 춤추게 하다니, 이런 짓을 해 넘길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八佾은 天子의 정원에서만 쓰이는 춤으로 1 열 8 인으로 구성되는 춤형식이므로 八佾舞는 64인의 춤인데, 계씨는 대부의 반열이므로 제후보다 아래인 四佾-32명으로 구성해야 함에도 천자의 禮를 참람함이 극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계씨가 그 짓을 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고 분개한 것이다. 이러한 계씨를 염유가 제지하기를 바라고 그의 무능함을 비판한 것이 다음의 내용이다.

“계씨가 태산에서 山祭를 지내니 선생님이 염유에게 말하기를 ‘네가 구할 수 없었느냐?’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하니,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통재라! 어찌 태산의 神이 임방만큼도 禮를 알지 못하리오?’라고 하셨다.”태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는 산으로 노공만이 산제를 지내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었는데, 계씨가 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이 제후를 자처하였으니 孔丘는 분개하여 당시 계씨의 신하로 있던 제자 염구를 향하여 “왜 윗사람의 잘못을 구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한 내용이다. 태산이 임방만큼도 못하겠는가하고 반문하는 것은 非禮를 행하는데 태산의 신이 그 제사를 받겠느냐, 즉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계씨를 도와 그를 더욱 부강하게 해 주는 염구를 공자는 孔門에서 내쫒으려 한다. “계씨가 周公 보다 부유하였는데 冉求가 그를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더욱 그에게 재산을 늘려주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제자가 아니니, 얘들아!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함이 옳다’고 하셨다.”
淸 劉寶楠의 <正義>에서의 해석은 周公旦이 노나라에 封해져 세금을 취할 때 什一을 넘지 않았는데, 노 선공이후 稅畝가 실시되어 이미 什二(1/5)의 세무를 실시하였고, 당시 계씨가 四分公室하여 그 二를 취하였으니, 세입을 비교하면 周公의 세수보다 그 양이 많았다. 그러므로 周公 보다 부유하다고 말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데 염구가 그러한 계씨의 재산을 늘려 주었으니 염구는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그를 성토한 것이다.

季康子가 田畝의 크기에 따라 稅畝를 거두려고 할 때, 염유를 파견하여 공자의 의견을 구하였다. 공자는 직설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염유에게 私的으로 말하기를 “ 有야 너는 先王들의 조세방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였고 노동의 강약정도에 따라 田畝를 징수하였고, 게다가 토지의 멀고 가까움의 거리에 근거하여 田畝의 양을 調整하였으며, 상업세를 징수할 때는 상인의 이윤수입에 따라 정하였고 게다가 그 재산의 많고 적음을 책정하여 상업세를 조정하였으며, 노역을 시킬 때에는 각 가정의 男丁네의 수에 따라 정하되 노인과 어린 남자 아이들을 고려하였으니 이 때문에 바로 홀아비, 과부, 고아, 장애인의 이름이 생겼는데, 전쟁이 발발해서야 그들을 징집하였고, 평시에는 이들은 동원되지 않았다. 전쟁이 발생하는 해에는 한 가구당 마른 곡식 一稯(종:마흔 뭇을 묶은 것)과 벼 一秉(병:열 여섯섬) 과 쌀 一缶(부:사십 두)를 적용하여 이 기준을 초과하여 걷지 않았다. 선왕들은 이렇게 하더라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만약 季康子가 法에 따라 조세를 거두려 한다면 주공의 세법을 쓸 것이요, 법을 어기려고 한다면 마음대로 거둘 것이지 뭐하러 나의 의견을 물어오느냐?”라고 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구는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였고 季康子를 도와 그의 富를 늘려준 冉求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추세에 따라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자와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그는 보수주의자라는 평을 듣는다. 염유는 자신의 견해를 견지함으로서 독자적인 정치역량을 발휘하여 공자가 주유천하를 마치고 노국으로 귀국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쌓는다.

 

5. 염유의 정치역량

哀公 十一年 魯의 在郞地에서 齊나라와 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여기에서 冉有의 전쟁수행능력(정치역량)이 십분발휘되고 있다.

제나라가 식鄎땅에서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고 국서와 고무비國書․高無邳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여 우리나라를 치려고 淸땅에 이르렀다. 이 때 계손季孫이 그의 가신 염구冉求에게 말하기를: “제나라 군대가 청 땅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노국을 치려는 심산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당신이 혼자 남아서 지키십시오. 숙손과 맹손이 양쪽에서 애공을 따라 국경 근처에 가서 제나라 군대를 막도록 하겠습니다.” 계손이 말하기를 “어렵지 않겠소?”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이 방법이 곧 국가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라고 하니, 계손이 숙손, 맹손 두 사람을 불러 말하니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이에 염구가 말하기를: “만약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애공은 궁을 나갈 필요가 없고, 계손 당신 혼자 군대를 인솔하여 성을 뒤로하여 싸우셔야 합니다. 만약 당신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노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노나라의 경대부 집안의 병차는 제나라의 병차 보다 많으니 부자일가(계손)의 병차만으로도 제나라의 병차를 대적하기에 충분하니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숙손과 맹손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려 함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정권이 계씨의 집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직접 정권을 잡고 있는 지금,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공하니 전쟁에 이기지 못한다면 이는 곧 당신의 수치가 클 것입니다. 또한 제후들과 함께 회동하지도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계씨는 염구를 조회에 따라오게 한 후 당씨의 고랑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무숙武叔이 염구를 불러들여 그에게 작전계획을 물었는데, 염구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일에 대하여 깊이 그리고 멀리 내다보며 생각하니, 소인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하니, 맹의자孟懿子가 강한 어조로 물으니, 염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능력을 고려하여 말하고, 역량을 계산하여 일을 도모합니다.” 하니 무숙이 말하기를: “그럼 내가 사내 대장부가 아니라는 말인가?”하고는 들어가 병차들을 검열하였다. 맹유자孟孺子 군사를 헤아려 우군을 인솔하고, 안우顔羽가 그의 말을 몰고, 병설邴洩이 오른쪽에서 병차를 맡고, 冉求는 좌군을 인솔하되 관주부管周父가 말을 몰고 번지樊遲가 오른쪽에서 병차를 맡았다. 계씨가 말하기를: “번지는 너무 어리다.”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그는 능히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계씨는 甲士 칠천명을 보유하였고, 염구는 삼백명의 무성武城人을 보병으로 삼고, 노인과 어린이는 궁실의 문을 지키게 하고 전군이 우문雩門의 밖에 주둔하였다. 닷새 후에 우군이 겨우 따라왔다. 公叔務人이 궁실을 보위하는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백성들의) 노역은 그다지도 많고, 부세는 점점 가중되는데, 위자리에 있는 자가 전승할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전사자와 함께 죽지 못한다면 어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오! 라고 나는 이미 이런 말을 하였는데 어찌 노력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노군과 제군의 전쟁이 교외에서 시작되었다. 제군이 직곡稷曲에서 부터 공격해 들어왔는데, 우리군(노군)은 도랑溝을 넘어 적을 맞아 싸우지 못하였다. 번지가 말하기를: “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청컨대 求의 부대로 하여금 도랑을 넘어가게 하십시오.” 염구가 그의 의견에 따라 병사들이 도랑을 넘게 하였다. 노군이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격하였다. 右軍이 달아나자 제나라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였는데, 진관陳瓘․진장陳莊이 걸어서 사수泗水를 건넜다. 孟之側은 대열의 후미에 있어서 최후로 도성에 입성하였다. 그는 채찍을 뽑아 말을 치면서 말하기를: “말이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자 임불유 林不狃의 동료가 말하기를: “달려라!”라고 하자, 불뉴不狃가 말하기를: “내가 누구인들 함께 달리지 못하겠느냐?” 라고 하자, 그 동료가 말하기를: “그럼 멈춰서서 저항할거요?” 라고 하자, 불뉴가 말하기를: “어떻게 달리기로 강함을 다투겠는가?”라고 하면서 천천히 말을 타고 걸어가다가 피살되었다. ……저녁이 되어 정보원이 말하기를: “제군이 모두 달아났습니다.”라는 보고를 하였다. …… 염구는 제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矛를 사용하여 적지 한가운데로 뛰어들 수 있었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이는 道義에 합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염구가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자 季康子가 그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하여 감탄하며 묻기를 “그대의 전략과 전숭은 배운 것인가? 타고난 것인가?”라고 하니, 염구가 말하기를: “공선생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라고 하니, 계강자가 묻기를: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생님을 임용하려면 명분이 맞아야 합니다. 그의 학설은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귀신에게도 베풀어 질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軍事에 공을 세워 2500호 민가를 받을 만하더라도 나의 선생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상의 사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염유와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략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 염유는 공자로부터 배운 전쟁수행방법을 발휘하여 노나라를 승리로 이끌었고, 그의 공훈으로 공자는 주유천하에서 노나라 군주의 예우를 받으며 귀국한다.


Ⅲ. 結 論

冉求는 孔子의 공문십철 중 학문적인 견해에 있어서 孔丘와 극단적으로 대립한 제자이었다. 그는 “仁”에 대한 연구나 관심은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현저히 적었다. 󰡔論語󰡕에는 그가 “仁”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대화하는 내용이 한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배움”에 대한 입장은 孔丘와의 政見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즉 공구의 정치적 원칙은 “인”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주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보호하여 宗法秩序를 지킴으로서 안정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는데, 염구는 당시 정세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정견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 때문에 공구에게 성토 당한 일까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염구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을 때 계씨가 사실상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그를 저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그의 재산을 증식하는데 일조를 하고, 또한 계씨가 노공이 행하는 태산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자신이 하는 등 참람된 일을 수 없이 많이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특별히 제제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당시 정국에 대한 견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당시 이미 춘추시대는 끝이 나고 전국 시대로 접어드려는 즈음인데 그가 勢의 흐름을 간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구가 이상론자라면 염구는 주도면밀한 현실론자이었다.

그는 비록 공구의 제자이긴 하였지만,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하였다. 예를 들면, 子華란 제자가 공구의 심부름으로 제나라에 갔었는데, 염자가 그의 모친을 위하여 양식을 줄 것을 공구에게 청하여, ‘여섯 말 넉 되를 주어라’고 하였는데, 적다고 여겨 더 주기를 청하자 공구가 ‘열 여섯 말을 주어라 ’하였는데, 스스로 적다고 여겨 독자적으로 여든 섬을 주었다는 일이 「雍也」편에 전한다. 이러한 사례는 그가 공구의 의견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일을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정치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공구로부터 배운 원칙을 실현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역학관계에서 일을 자신의 판단으로 처리하였다.

비록 공구와 염구의 정견과 학문의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사제지간의 이해와 사랑은 각별하였다. 공구는 염구가 田賦를 써서 季氏의 부를 더욱 늘려 주었다하여도 노년에 이르러 공문 십철에 대한 평가에서 염구가 정치에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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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對孔門弟子冉有的小考

金 京 玉

本論文是一篇關與孔門弟子冉有的硏究文章. 冉有是孔子的著名的學生. 他不但受到孔子的一定肯定, 而且也受到過嚴厲指責. 冉有和孔子雖然有不一致的地方, 但是他們師徒之間的關係還是密切的. 有一次, 齊國討伐魯國, 冉有力主出兵抗拒, 並親自率領左軍冲殺齊軍, 結果大敗齊軍. 在孔門弟子中, 冉有以擅長政事而著稱. 當孔子與弟子們談論自己的志向時, 冉有說 : 讓我去治理一個方圓五六十里或六七十里的小國, 治理三年, 就能使人民豊衣足食. 至于這個國家的禮樂, 則等待君子去實行了. 由此看來, 冉有治理政使擅長軍事和管理經濟. 所以孔子在評論冉有的才能時說 :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公冶長>]
󰡔論語󰡕一書曾記載了孔子與冉有在政治問題上的分岐. 孔子曾多次激烈批評冉求不沮止季氏祭祀泰山, 背着孔子多給子華母親糧食, 幇助季氏聚斂財富, 推行田賦制度和征伐顓臾等不義行爲. 孔子氣憤地說 : “求,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先進>]. 孔子對冉求激烈批評, 旣表明冉有不符合孔子以德治國的政治主張, 又說明在孔子弟子內部, 儒家思想孕育着一定的分化.
盡管如此, 孔子仍肯定了冉有的特長. 󰡔史記․孔子世家󰡕說冉 : 有爲季氏將師, 與齊戰與郞 克之. 季康子曰: “子之于軍旅 學之乎? 性之乎?” 冉有曰: “學之於孔子.” 季康子曰: “孔子何人哉?” 對曰: “用之有名. 播之百姓 質諸鬼神而無憾. 求之至於此道 雖累千社 夫子不利也.” .由此看來, 冉有雖受到孔子的嚴厲批評, 但他仍十分尊崇孔子, 對孔子有着深刻的認識

※ 主要語 : 冉有, 孔子, 政見, 退, 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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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7 0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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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4-27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사무실 아니고 연수하셨어요? ㅇㅇ학교 강사로도 이름 올라계시더마는..ㅋㅋ 유명한 분을 친구로 두었군요.
염유..는 중국어 숙제하다가 올려둔 것이지요. 제 전공이잖아요.

2006-04-27 0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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