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가 뭐래도 '브로크백'이 최고야!"
[해외리포트] 블로그에서 되살아나는 <브로크백 마운틴> 열풍
     윤새라(tomos) 기자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지난 3월 초에 열렸던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던 아카데미 시상식은 맨 마지막, 최우수 영화상 시상에 이르러 모두를 깜짝 놀래켰다.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지던 <브로크백 마운틴> 대신 <크래쉬>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수상자를 정하는 아카데미 협회 구성원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꺼렸다는 해석부터, <브로크백 마운틴>이 너무 일찍부터 바람몰이를 해서 막판에 상승세가 꺾였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나고 한 달이 넘게 지났어도 <브로크백 마운틴>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 이목을 끈다.

데이브 컬런이란 언론인이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개설한 '얼티밋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brokeback.davecullen.com)가 바로 그 여진의 주인공이다. 이 곳은 <브로크백 마운틴>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룬다는 목표로 영화를 논할 뿐만 아니라, 영화가 회원들의 삶은 물론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한다.

시상식이 끝난 후 등장한 영화 광고

데이브 컬런이 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특별히 기발하지는 않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카데미 최우수영화상을 타리라 기대하고 있다가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오자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자발적 블로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그런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 데이브 컬런만이 아니고 몇 백 명, 이제는 더 숫자가 늘어 몇 천 명에 이르렀다. 4월 말 현재 회원수만 4천명이 넘고 매일 10만에서 20만 정도의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계기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가 개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원들이 의견을 냈다. 돈을 모아 이 영화와 관련된 뜻있는 일을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해서 8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이 2만4천불(약 2400만원).

그 돈으로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거들은 미국 전역에서 판매되는 <데일리 버라이어티>란 잡지 3월 10일자에 <브로크백 마운틴> 광고를 한 장 전면광고로 실었다. 광고 가격은 1만5435불(약 1500만원).

그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카데미 최우수 영화상 수상에 실패한 데 항의하는 대신 이 영화에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긍정적 광고(positive ad)'를 선택했다.

▲ 블로거들이 돈을 모아 잡지에 낸 광고.
이 광고를 보면 남자 대 남자가 아닌 두 인간 사이의 가슴 아린 사랑을 보여준 주인공 히스 레저와 제이크 길렌할의 사진 옆으로 이 영화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 이름이 일일이 적혀있고 "고맙다"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있다.

그리고 사진 밑으로는 "올해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영화인 <브로크백 마운틴>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꿔준 것에 감사한다"는 감사의 변이 달려 있다.

또 <브로크백 마운틴>을 최우수 영화로 지정한 26개 영화단체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러면서 이 광고를 게재한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은 그들과 같은 의견이라고 밝힘으로써 이 영화를 최우수영화로 선정하지 않은 아카데미를 우회적으로 겨냥했다.

아카데미의 상업적 위력을 감안해 미국 업계는 늘 아카데미 시상식 전에 총력을 기울여 영화를 띄우는 광고를 내보낸다. 그리고 상을 탄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 이후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영화 광고에 자랑스레 추가한다.

그런데 유력시되던 상을 타지 못한 영화가 도리어 그 사실을 바탕으로 광고를 낸 일은 미국 사회에서 대단히 이례적 일로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광고를 낸 당사자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영화의 감동에 끌려 전세계에서 모여든 경배자'들인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제2의 물결 : <브로크백 마운틴>을 시골 도서관에 보내자!

'브로크백마운틴 포럼' 블로거들은 광고를 내며 미국 언론의 이목을 반짝 끄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개진 중이다. 4월 초에 미국에서 <브로크백 마운틴> DVD가 출시된 것을 계기로 '제2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출시된 영화 DVD를 미국 및 캐나다의 시골 도서관 2천 곳에 보낼 계획이다. 아직까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의 메시지를 DVD를 통해 알리겠다는 취지다.

이를 위해 블로그 참가자들에게 DVD를 기증받는 것도 한 방법으로 DVD 1천 개를 기증받겠다는 목표인데 4월 21일 현재까지 500개가 넘는 DVD가 모였다. 그러나 종교적 보수 색채가 짙어지는 기미를 보이는 작금의 미국 사회에서 이런 움직임이 얼마나 효과를 볼까?

▲ <얼티밋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 블로그 초기화면
4월 초에는 메사추세츠 주 한 감옥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죄수들에게 검열을 하지 않고 보여줬다는 이유로 해당 교도관이 징계를 받았다. 또 영화 DVD가 출시되면서 보수 단체에서는 월마트에 <브로크백 마운틴> DVD를 팔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에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은 영화 DVD를 판매하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월마트에 쓰라고 블로거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문화 전쟁' 속에서 월마트는 보수 단체의 거듭되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브로크백 마운틴> DVD를 취급한다고 발표했다.

한 개인이 개인적으로 시작했지만 예상 외로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꾸준히 외연을 넓혀가고 있는 '브로크백마운틴 포럼'.

따져보면 동성애를 소재로 잘 만든 영화가 결코 <브로크백 마운틴>만은 아니다. 그러나 풀뿌리 운동인 '브로크백 마운틴 포럼'의 의미있는 활동은 인터넷의 힘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와 함께 현재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 문제가 사회·문화적으로 갖는 영향의 진폭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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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4-27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고 싶었답니다. 비됴로 보죠...

해콩 2006-04-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 뒤늦게 상영하는 극장 없을까요? CGV 예슬전용관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때 상영되었던 '내곁에 있어줘'를 하고 있답니다. 참고로 하세요~

해콩 2006-05-2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도극장 상영 스케줄~

6/1~6/14

11:40 <브로크백 마운틴>
14:20 <메종 드 히미코>
16:40 <브로크백 마운틴>
19:00 <메종 드 히미코>
21:20 <타임 투 리브>

해콩 2006-06-1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문화 속의 동성애 이야기 <브로크백 마운틴>
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교수


게이 카우보이들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리안(李安)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 Mountain)은 아카데미상을 여럿 받은 화제작이지만 국내 영화팬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게이들의 사랑이라는 소재 자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기보다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문제가 된 듯하다. 말하자면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적 요소를 적절하게 버무려놓는 대중적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게이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를 내놓고 옹호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방식도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차라리 김인식 감독의 <로드무비>나 이누도 잇신 감독의 <메종 드 히미꼬>가 더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퀴어무비'(동성애영화) 장르의 정치적 코드에서 보면 그다지 혁신적이거나 '불온'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동성애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과 강렬한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미국문화의 여러 틈새들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첫번째 틈새는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동시에 가장 마초적인 미국문화의 양면성에서 발생한다. 만약 영화의 무대가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쌘프란씨스코나 뉴욕이라면 이 이야기의 긴장과 매력은 사라질 것이다. 두 주인공 에니스와 잭이 서부지역 가운데서도 '깡촌'에 해당하는 와이오밍주의 촌놈들이기 때문에 내면의 금기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사랑에 빠져든다는 설정 자체가 문제가 된다. 마초적 심성을 지닌 두 남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싹튼다는 것은 요샛말로 '대략 난감'한 일이다.

두번째 틈새는 미국 서부의 현실과 이상(신화) 사이에서 벌어진다. 전통적인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들의 끈끈한 우정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때려잡으면서 프런티어를 개척하는 거친 삶과 투쟁 속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1963년의 에니스와 잭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뜨내기 일꾼에 불과하고 그들이 찾은 일거리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함께 양떼를 돌보는 일이다. 서부의 신화에 비해 너무 초라한 현실인 것이다. 더욱이 이 둘은 진정한 카우보이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퀴어) 짓거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 미국 서부의 이상과 신화는 완전히 추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에니스와 잭의 내면 깊숙이에, 그리고 거칠고 황량한 자연의 한 자락에 똬리를 틀고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비록 생계를 위해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지만 마초적이면서 순수한 카우보이의 심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 동명의 원작소설에서는 애니 프루(Annie Proulx)의 섬세하되 터프하고 과묵한 문체가 서부의 정경과 서부 사나이 특유의 황량하고 비정한 질감을 적절하게 포착한다. 리안 감독의 영상 역시 서정적이긴 하지만 이런 황량한 질감을 보여주는 데 어느정도 성공한다.

이 영화에 서사적 긴장을 불어넣는 최종적인 틈새는 두 인물의 표층의식과 심층의식 사이의 어긋난 지점들이다. 가령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엉겁결에(?) 정사를 벌인 다음날 에니스와 잭은 둘다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그들의 심층에서는 이 치명적인 사랑이 이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양치기 일이 끝나자 에니스는 헤어짐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잭을 떠나보내고 약혼자 앨머와 결혼한다. 잭은 잭대로 텍사스의 부잣집 딸 루린과 결혼하여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복귀를 꾀한다.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국면은 4년 뒤에 잭이 에니스의 집으로 찾아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남편 에니스와 잭이 정신없이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의 앨머의 어두워지는 표정은 동성애자 가족이 당하는 고통을 예고한다. 물론 당사자의 고통은 더 혹독하고 길다. 에니스와 잭은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삶의 표면을 영위하면서 일년에 한두 차례 만나 몰래 사랑을 나누는 구차한 이중생활을 무려 20년 동안 지속한다. 표층과 심층의 괴리가 이제는 표리부동한 이중생활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들은 왜 좀더 자유주의적인 지역으로 도망가서 함께 살지 않을까?

에니스는 농장을 꾸리면서 둘이 함께 살자는 잭의 거듭된 제의를 한사코 거부한다. 어릴 적 이웃의 동성애자가 린치당해 죽어 있는 현장을 목격한 이후 그의 뇌리에 각인된 동성애 공포/혐오가 아직 작동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에니스는 나중에 잭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린치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내면적 공포가 잭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주된 이유는 오히려 노동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지키고 딸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에니스 나름의 신조 때문이다. 에니스가 자신의 이혼 소식을 듣고 텍사스에서 와이오밍까지 득달같이 달려온 잭을 매정하게 돌려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또한 예정했던 만남을 돌연 취소하여 잭과 격한 언쟁을 유발하는 이유도 일자리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이다. 에니스의 이런 일상적 고투야말로 "너를 단념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잭의 애절한 목소리 못지않게 영화의 긴장미를 팽팽하게 당기는 힘이다.

에니스는 잭이 죽은 뒤에야 이런 일상적 고투에서 놓여나 잭의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노동자 에니스가 일자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고 맏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 노릇을 다하려는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긴 세월 닫아걸었던 가슴속 깊은 곳의 자기감정에 대한 인정이며, 잭의 애절한 사랑에 대한 뒤늦은 응답처럼 보인다. 20년 넘게 잭이 간직해온,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자기들이 입었던 피 묻은 셔츠를 쳐다보면서 "맹세할게"라고 나직하게 읊조리는 마지막 장면은 에니스에게 노동과 동성애 사이의 갈등이 일정한 화해에 도달했음을 일러준다. 한때 카우보이의 영혼을 찢어놓은 동성애는 이제 하층노동자의 일상적 삶 속에서 작은 자리를 허락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