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이 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

금요일자 한겨레 북리뷰를 인터넷에서 미리 훑어보다가 '한국의 책쟁이들' 시리즈에서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편을 읽었다. 이 연재물을 즐겨 읽지만 유독 이 글만을 옮겨올 생각을 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띄어서이고 또 그가 현재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중이라는 소식이 반가워서이다. 이만한 저술가/책쟁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역정'을 잠시 따라가본다.

한겨레(06. 08. 11) “나 자신이 미디어라고 생각해요”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이게 그림을 보는 안목보다도 더 배울 점이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인문학의 다른 분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글 구본준 기자)

06. 08. 11.

P.S. 따져보니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책은 <미술로 보는 20세기> 한권뿐인 듯하다. 하지만, 그의 러시아 미술관 소개를 나는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한다(사진은 트레챠코프 미술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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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儒敎)

요약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설명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덕치)]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주석학)],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천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19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인민위원회)] 취푸[曲阜(곡부)]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령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 방지와 국가경륜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부흥에 힘써 유학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흥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중국의 송학, 즉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도입되었다.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옴으로써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 신진학자들의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 등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 수용으로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났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촌자치제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에게 몰려 몰락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림들이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에 주력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 탐구에 치중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의 선구였다. 그 뒤를 이어 명종·선조 때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학자로, 그 학풍이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간의 사단칠정이기론변(四端七情理氣論辨)을 거쳐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후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는 등 학파에 따라 학설이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황·이이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한 뒤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국내적으로 전성시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특히 이황의 학설은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齋(산기암재)]를 비롯한 일본 주자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예학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裂) 등이 17세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이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알맹이 없이 서로 헐뜯는 학설로 전락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론(禮論)의 대립을 지양하고 원시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 등을 부르짖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박제가(朴齋家)·정약용(丁若鏞) 등이 영·정조시대를 전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서학(西學)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운동(守舊運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 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維新精神)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유학자류(儒學者流)를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켜 한국 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부설하여 황도유교(皇道儒敎)를 선전하는 등 기형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儒林)의 총의로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46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용어
개물성무 開物成務 인지(人智)를 계발하고 사업을 완성시킨다는 말. 만물과 인사(人事)의 공용(功用)을 이름을 말한다.
거경궁리 居敬窮理 정주학에서의 학문 수양의 두 가지 과제. 거경은 마음을 근신(謹愼)의 상태로 유지하고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성실하게 절제하는 것이며, 궁리는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격물치지 格物致知 《대학》 8조목에 나오는 학문과 수양의 방법론.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함양(涵養)공부의 요체가되는 핵심문제.
계선성성 繼善成性 음양(陰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실천결과를 나타낸 말. 《주역》 <계사(繫辭) 상>에서 <한 번 양하고 한 번 음하는 것이 도이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선이고 이를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계왕개래 繼往開來 선왕의 도를 계승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승하는 것. 주희(朱熹)가 공자를 가리켜 한 말이다.
괴력난신 怪力亂神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패역(悖逆)한 일과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들을 일컫는 말.
궁리진성 窮理盡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다한다는 말. 사물·인사(人事)의 법칙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인간에게 내재화한 것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낸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는 말.
내성외왕 內聖外王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수양의 이상적 상태. 안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 밖으로 민중을 선도하여 천하에 태평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동 大同 모든 사람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財貨)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되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想定)하는 사상.
대성지성 大成至聖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완정(完整)된 학문과 성스러운 인격을 기리는 말. <대성>이란 전인(前人)의 주장과 학설을 집대성하여 완정된 이론체계를 이룬 데 대한 칭송의 말이며, <지성>이란 넓은 학식, 고상한 인격, 비범한 지혜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경칭이다.
대일통 大一統 중국의 고대사회에 있어 종법(宗法)의 근간이 된 것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의 제도적 통일을 주장하는 사상.
덕본재말 德本財末 정치의 근본이 경제적 충족보다 윤리적 교화에 있다고 하는 유교의 보편적 사고방식.
만물개비어아 萬物皆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모두 인간의 마음[心] 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
명교 名敎 명분(名分)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르침. 좁은 뜻으로는 예교(禮敎)와, 넓은 뜻으로는 유교와 같은 말이다.
명덕 明德 인간내면에 있는 본래의 밝은 덕.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거가 되는 근원적 실체의 무형성(無形性)과 실재성(實在性)을 함축한 말.
박문약례 博文約禮 널리 학식을 쌓고 그것을 예(禮)로써 집약하는 일. 학문연구와 도덕적 실천의 방법을 말한다.
반구저기 反求諸己 인식과 수양에 있어 내면적 반성을 강조하는 말.
변화기질 變化氣質 기질의 편탁(偏濁)을 교정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한다는 성리학의 수양법.
사단칠정 四端七情 인간의 착한 본성의 발로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마음과, 인간 감정의 총칭으로서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7가지 감정을 이르는 말.
사대 事大 약소국이 강대국에 정치적·외교적으로 복속(服屬)함으로써 자국의 존립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
사문 斯文 유교에서 자교(自敎)의 학문을 가리켜 이르는 말.
삼강 三綱 동양 고대사회의 기본적 인간관계인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관계를 도덕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유교의 전통적 질서의식.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르는 말이다.
삼불후 三不朽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 3가지 일.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말한다.
생생지도 生生之道 역(易)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나타내는 말.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생성·순환(循環)하는 천도(天道)의 무궁한 변화상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처음 보인다.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상정(想定)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 성리학에서 주요 문제로 다루어진다.
성상근 습상원 性相近習相遠 인간의 선천성은 동일하나 후천적인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질 수 있다는 말.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는 말. 유교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제이다.
시중 時中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신독 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뜻으로, 개인의 내면적 충실을 강조한 덕목.
양지양능 良知良能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인식과 능력.
역자이교지 易子而敎之 자제(子弟)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남과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방법론.
예약형정 禮藥刑政 유교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4가지 통치방법을 가리키는 말. 예는 예법,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政令)을 각각 가리킨다.
오륜 五倫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5가지 관계, 즉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시된 유교의 기본윤리.
오상 五常 사람이 항상 행해야 하는 5가지 덕목. 인(仁)·의(義)·예(禮)·지(智)·(信)을 가리킨다.
위기지학 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
위정척사 衛正斥邪 정학(正學;儒學)의 도통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사상.
모든 사물·현상에 내재한 법칙이나 원리, 혹은 그것들을 성립하는 법칙성.
이단 異端 유교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는 학파가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교(他敎)를 부정하여 가리키는 말.
이용후생 利用厚生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하며 삶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
적연부동 감이수통 寂然不動感而遂通 역(易)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고요하다가 감응(感應)하게 되면 사물의 모든 원리에 통한다는 뜻. 역의 본체와 작용을 통일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존덕성 도문학 尊德性道問學 유교에서 제시하는 도덕수양의 두 가지 방법. 존덕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선한 덕성을 수양을 통해 높이고 보존하는 방법이며, 도문학은 학문을 통해 덕성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중도 中道 극단을 배제하는 유교의 윤리사상을 나타내는 말. 중(中)에 처하여 도(道)를 얻는다는 뜻이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인식과 실천의 합일을 주장하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
진덕수업 進德修業 유덕한 군자가 자기의 덕을 날로 새롭게 진보·향상시키고 그것을 실제의 일에 응용하여 자기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는 뜻.
천인합일 天人合一 하늘과 인간의 선천적 동일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실천적 당위성을 밝히는 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이론.
추기급인 推己及人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理解)를 포함한 대타적(對他的) 관계의 전실천과정에 있어 자기의 도덕적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
춘추필법 春秋筆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한 《춘추》의 독특한 필법을 이르는 말.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실을 다하는 것.
충서 忠恕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치중화 致中和 정(情)의 미발(未發)을 중, 발하여 중절(中節)된 상태를 화라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의 한 방법.
태극 太極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으로서,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
하학상달 下學上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이고 비근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높은 진리에까지 도달한다는 공자의 학문방법.
혈구지도 자로 물건을 재듯이 내마음을 자로 삼아 남의 마음을 재고, 내 처지를 생각해 남의 처지를 아는 방법.
호연지기 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전(轉)하여, 도의(道義)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를 이르기도 한다.

연표
BC 1500 은(殷) 은(殷)왕조 성립(~1120)
1120 주(周) 주(周)왕조 성립(~256). 이 무렵 기기가 조선으로 가 백성을 교화함
770 주(周) 주나라 동천(東遷), 춘추시대 시작됨(~226)
551 공자 공자 노(魯)나라에서 태어남(~479)
481 공자 공자, 《춘추》 완성함
479 공자 공자 죽음. 이즈음부터 유가사상이 일어남
372 맹자 맹자, 노나라에서 태어남(~289)
300 한반도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213 진시황제 시서 및 백가서 불태움
212 진시황제 유생을 생매장함
136 한(漢)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오경박사를 두고 유교를 국교로 정함
104 한(漢) 동중서 죽음
BC 91 한(漢) 사마천 《사기》 완성함
AD 29 후한 태학을 세움
83 후한 훈고학자 정중(鄭衆) 죽음
166 후한 훈고학자 마융(馬融) 죽음
200 후한 훈고학자 정현(鄭玄) 죽음(127~)
249 위(魏) 경학자 하안(何晏)죽음
320 진(晉) 청담(淸談)이 유행함
372 고구려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함
405 백제 왕인이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함
607 수(隋) 구품중정제를 대신하여 과거제도 시작됨
624 당(唐) 균전법 실시
648 당(唐) 공영달(孔穎達) 죽음(574~)
653 당(唐) 오경정의 반포
682 신라 국학을 세움
717 신라 김수충(金守忠)이 당에서 돌아와 공문십철과 72제자의 화상을 대학에 둠
720 신라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줌
788 신라 독서삼품과 실시
824 당(唐) 고문운동의 선구인 한유 죽음(768~)
841 당(唐) 《복성서(復性書)》를 지은 이고 죽음(772~)
857 신라 최치원 태어남
858 고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처음 실시
982 고려 최승로 시무이십팔조의 봉사 올림
992 고려 국자감 설치
1008 북송 공자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
1020 고려 최치원을 처음으로 성묘에 배향
1050 고려 이 무렵부터 사학십이도가 생기기 시작
1068 고려 해동공자 최충 죽음(984~ )
1069 북송 왕안석의 신법 실시
1073 북송 송학(宋學)의 비조 주돈이 죽음(1017~)
1076 북송 장재 《정몽(正蒙)》 지음
1085 북송 정호(程顥;明道) 죽음(1032~)
1091 북송 고려사신 이자의(李資義)를 통하여 고려의 서적을 구함
1099 북송 정이 《역전(易傳)》 지음
1101 고려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1107 고려 국자감에 구인재 등 7재 설치. 북송, 정이 죽음(1033~)
1116 고려 궁중에 청연각·보문각 설치
1119 고려 국자감에 양현고 설치
1131 고려 노장의 학문을 금함
1138 남송 호안국(胡安國) 《춘추전》 이룩함
1145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 고려 무신의 난이 일어나 문교의 암흑기가 시작됨
1175 남송 여조겸(呂祖謙)의 중개로 주희와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만나 학문을 토론함(鵝湖之會)
1177 남송 주희 《논어집주》 《맹자집주》 이룩함
1189 남송 주희 《대학장구》 《중용장구》 이룩함
1192 남송 육구연 죽음(1139~)
1197 남송 <경원(慶元) 이학(異學)의 금(禁)>이 일어나 주자학이 위학(僞學)으로 몰림
1200 남송 주희 죽음(1130~)
1234 고려 이무렵 최윤의(崔允儀) 《고금상정예문》 50권 간행
1241 남송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를 공자묘에 종사함으로써 도학이 공인화함
1270 남송 여정덕(黎靖德) 편찬 《주자어류》 간행
1271 몽고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고 허형(許衡)을 국자좨주에 임명함
1275 고려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
1289 고려 안향 원나라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됨. 이 무렵 원나라에서 주자학 들어옴
1296 고려 경사교수도감 설치
1304 고려 안향의 건의로 국학에 섬학전을 둠. 국학에 대성전 이룩됨
1306 고려 안향 죽음(1243~)
1313 과거가 실시되고 주자학의 주석이 채용됨
1320 고려 공자의 소상 만듦
1325 주자학을 관학으로 공인. 고려, 평양에 기자사(箕子祠) 세움
1348 고려 이색(李穡) 원에서 성리학 연구
1357 고려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행하게 함
1367 고려 이색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성리학을 보급함
1371 고려 정도전 《심문천답》 지음
1375 명(明) 전국에 사학 세움
1389 고려 5부학당과 지방향교에 교수를 둠
1392 고려 정몽주 죽음(1337~). 고려 멸망
1394 조선 정도전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편찬
1398 조선 성균관의 문묘와 명륜당을 건립
1405 조선 권근의 《예기천견록》 간행됨
1415 명(明) 호광(胡廣) 등 봉칙찬(奉勅撰)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이루어짐
1420 조선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
1432 조선 설순 등 《삼강행실도》 편찬
1443 조선 유교(특히 성리학)의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
1453 조선 문묘의 액(額) 대성전(大聖殿)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침
1464 명(明) 설선(薛瑄)의 《독서록》 이루어짐
1493 조선 김시습 죽음(1435~)
1498 조선 무오사화 일어나 김종직의 문도를 비롯한 다수의 사류들이 죽거나 귀양감
1517 조선 조광조 등 성리학의 장려를 청함
1518 명(明)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 간행됨
1519 조선 기묘사화 일어남. 조광조 사사됨(1482~). 현량과 폐지
1520 명(明) 왕수인 치양지설(致良知說) 제창
1528 명(明) 나흠순(羅欽順) 《곤지기》 이룩함. 왕수인 죽음(1472~)
1543 조선 주세붕 백운동서원 세움(서원의 시초)
1544 명(明) 왕정상(王廷相) 죽음(1474~)
1546 조선 기불멸론자(氣不滅論者) 서경덕의 죽음(1489~)
1553 조선 영남학파의 선구자 이언적 죽음(1491~)
1559 조선 이황·기대승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66)
1564 명(明) 나홍선(羅洪先;念庵) 죽음(1504~)
1568 조선 이황 선조에게 《성학십도》 올림
1570 조선 이황 죽음(1501~)
1572 조선 이이·성혼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78)
1574 조선 도산서원 세워짐
1575 조선 이이 선조에게 《성학집요》 올림
1579 명(明)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강학을 금지시킴. 하심은(何心隱) 옥사(1517~)
1582 명(明) 마테오리치[利瑪寶] 마카오에 상륙하여 가톨릭 포교를 개시
1584 명(明) 왕기(王畿;龍溪) 죽음(1498~). 조선, 이이 죽음(1536~)
1588 명(明) 나여방(羅汝芳;近溪) 죽음(1515~)
1590 명(明) 이지(李贄) 《분서(焚書)》 간행
1592 조선 임진왜란 일어남. (~1598). 조선성리학 일본에 전해짐
1602 명(明) 좌파양명학자 이지 <인심·풍속의 혹란과 성인에 대한 모독>의 죄로 투옥, 옥중에서 자살(1527~)
1603 명(明) 마테오리치 《천주실의》 지음
1620 명(明) 초횡 죽음(1540~)
1625 명(明) 동림파 사대부에게 대탄압 가해짐(~1626)
1631 조선 김장생 죽음(1548~)
1636 조선 병자호란 일어남(~1637).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청에 잡혀가 죽음을 당함
1644 명(明) 명나라 멸망(1368~)
1645 명(明) 명나라 유신 유종주(劉宗周;念臺) 순국(1578~)
1659 조선 김장쟁의 《가례집람》 간행됨
1660 조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시작됨(~1674)
1663 황종희(黃宗羲) 《명이대방록》 이룩함
1670 고염무 《일지록》 간행됨
1673 조선 유형원 죽음(1622~)
1676 황종희 《명유학안》 이룩함
1683 염약거 《고문상서소증》 제1권 지음
1689 조선 송시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지음
1692 왕부지(王夫之) 죽음(1619~)
1703 조선 대명의리의 본산인 만동묘(萬東廟) 세워짐
1709 조선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시작됨(~1715)
1712 이광지(李光地) 등 봉칙찬(奉勅撰) 《어찬주자전서》 지음
1716 《고문상서원사》 지은 모기령 죽음(1623~)
1717 그리스도교 포교금지
1725 《고금도서집성》 지음
1736 조선 정제두(鄭齊斗) 죽음(1649~)
1758 청조한학의 제창자 혜동(惠棟;松崖) 죽음(1697~)
1763 조선 이익(李瀷) 죽음(1682~)
1777 대진(戴震) 《맹자자의소증》 지음
1782 기윤 등 《사고전서》 지음
1783 조선 홍대용 죽음(1731~)
1784 조선 이승훈 가톨릭 전래
1788 청대 공양학의 비조 장존여(莊存與) 죽음(1719~). 조선, 임성주(責聖周) 죽음(1711~)
1798 완원(阮元) 《경적찬고》 지음
1801 조선 신유사옥 일어남. 청, 장학성 죽음(1738~)
1804 전대흔(錢大昕) 죽음(1728~)
1805 조선 박지원 죽음(1737~)
1824 방동수(方東樹) 《한학상태(漢學商兌)》 지음
1836 조선 정약용 죽음(1762~).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 지음
1844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간행
1849 완원 죽음(1764~)
1856 조선 김정희 죽음(1786~)
1862 양무운동 일어남
1866 조선 병인사옥 일어남
1868 조선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단행(~1871)
1877 조선 최한기 죽음(1803~)
1881 조선 위정척사운동 일어남
1885 캉유웨이[康有爲] 《대동서(大同書)》 지음
1886 조선 이진상(李震相) 죽음(1818~)
1891 캉유웨이 《신학경위고(新學經緯考)》 간행
1894 조선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폐지
1895 조선 성균관 관제 공포, 경학과 설치
1896 담사동(譚嗣同) 《인학》 지음
1897 캉유웨이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간행
1898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나 무술정변으로 실패
1902 과거제도 폐지
1906 쑨원[孫文] 일본 도쿄에서 <삼민주의와 중국의 전도(前途)>라는 연설을 함. 조선, 최익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쓰시마섬에 유폐 도중 단식으로 순국
1910 조선 한일합방으로 멸망
1911 신해혁명 일어남. 한국, 일제에 의해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됨
1913 중국 캉유웨이 등 유교의 국교화를 추구하여 존공운동(尊孔運動) 일으킴. 후스[胡適] 유교를 배척함
1919 중국 5·4운동과 함께 유교비판운동 가속화함. 한국, 유림단의 파리장서사건 일어남
1921 중국 중국공산당 결성
1922 한국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간행됨
1927 중국 캉유웨이 죽음(1858~)
1934 한국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 간행됨
1937 중국 국공합작 이루어짐
1939 한국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
1944 중국 펑여우란[馮友蘭] 《신원도(新原道)》 지음
1945 한국 광복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고 유도회 결성
1946 한국 성균관대학 창설
1949 한국 현상윤 《조선유학사》 간행
1965 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으로 전통 사상·문화·풍속·습관 등이 파괴됨
1973 한국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윤리선언문> 발표.
1974 중국 《린뱌오[林彪]와 공맹의 도》 배포를 계기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 시작됨
1976 중국 마오쩌둥 사망, 장칭[江靑] 등 4인방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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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대건인성교육(영상교육/네번째)/2003.6.14(토)/논산대건중학교 1학년/학번       성명          

    반딧불의 묘                            

 

  

  감독(시나리오):다카하타 이사오/원작자:노사카 아키유키/

  제작사:스튜디오 지브리/일본/애니메이션/1988년/88분


“나는 소화 20년 9월에 죽었다”  

 "나는 소화 20년 9월에 죽었다"라는 주인공 세이다의 멘트로 이 "반딧불의 묘"는 시작된다. 노사카 아키유키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애니메이션한 반딧불의 묘는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이 오랜 세월동안 발전시켜 온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만든 명 작품이다. 반딧불의 묘는 매우 비극적으로 짧은 삶을 마친 두 남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작품으로 주인공의 죽음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며 마지막 역시 죽음으로 끝난다. 즉, 주인공의 영혼이 과거를 회상한다는 구조로 진행된다. 다카하다 감독은 반딧불의 묘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중심 주제를 두개의 상징적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물과 불이다. 그 외에도 주인공 세이다와 세쓰코의 추억을 상징하는 사탕상자와 현실과 회상을 분리시켜 주는 전차, 기성세대에 대한 세이다의 저항. 반딧불들의 죽음과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 등으로 다카하다 감독은 많은 메시지를 남기려 한다. 다카하다 감독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비정한 삶 속의 차가운 인간성과 그로 인한 상처, 인간소외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조금씩 사라져 가는 인간미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1. 다카하다 감독은 “반딧불의 묘”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중심 주제를 두개의 상징적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물과 불이다. 그래서 물의 이미지는 삶이다. 어린 남매가 힘든 시절에 작은 웃음을 주었던 장소는 모두 물이 있는 곳이었다. 그 예로 이사 갈 적의 논바닥의 물, 그들이 기거하는 호수 및 바닷가에서의 즐거운 한때 등이다. 반대로 반딧불로 대표되는 불은 죽음의 이미지다. 우선 비극의 시작인 공습부터 어머니의 죽음 뒤의 화장, 세쓰코의 화장, 그리고 중간 중간의 반딧불과 회상장면의 붉은 색 처리 등은 죽음에 관련된 요소에 불이 관련된 것을 나타낸다.

 지금까지 나의 삶 속에서 물이라고 생각되는 삶을 모두 쓰시오.

 지금까지 나의 삶 속에서 불이라고 생각되는 삶을 모두 쓰시오.

 

 

2. 반딧불이는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며 황홀한 빛을 냅니다. 또한 세쓰꼬의 고사리 손 안에서 터져버리는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려보면서...

 왜 제목을 반딧불의 묘라고 했을까요?

영상속 반딧불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시오.

 

 

3. 전쟁은 서로 싸우는 양쪽 모두 명분을 갖고 시작하게 됩니다. 서로 자신이 정의롭다고 하며, 적은 불의의 세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괴로움을 겪게 되는 사람- 사람은 어느 편의 사람이건 모두 비슷합니다.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뿐입니다. 지금도 세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단 몇 분 동안 그 사실을 알고 생각할 뿐이며, 죽이고 피 흘리게 하는 처참함과 잔혹함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고 살지요. 마치 스포츠 경기처럼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엔 누구나 잔인한 본성과 평화와 순수함을 사랑하는 본성이 함께 있다고 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전쟁 중계를 바라 본 후에도, 잔인한 컴퓨터 게임을 하며 피를 즐기고, 파괴 본능과 인간의 잔혹함을 키워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를 죽이고 상처 주며, 끊임없이 강도를 높여 가며 피 흘려야 하는 게임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 게임을 본 따 친구를 해치기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혹시 잔인한 게임을 즐기지 않습니까?  싸우고 피 흘리는 만화를 즐겁게 읽지 않습니까? 그러한 욕구들이 내 마음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      만약 자신이 그러하다면 그런 자신에게 편지를 쓰시오. 자신은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시오. 내용은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다만 장난치지 않고 진지한 생각이 담겨 있으면 합니다.

편지쓰기

 

 

 

 

 

 

 이러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 3가지 이상 나열하시오.

 

 


4. “반딧불의 묘”와 읽기자료“숲 속의 휴전”을 생각하면서 전쟁 중에 일어난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비정하고 차가운가? 그로 인한 상처, 인간소외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무엇이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는가? 입니다.

 읽기자료“숲 속의 휴전”을 듣고, 느낌을 구체적으로 쓰시오.

 영화“반딧불의 묘”와 읽기자료“숲 속의 휴전”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내용이 있는 그림으로 그리시오.

 

 



♠ 숲 속의 휴전

1944 년 크리스마스 이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나 나는 다음에 일어날 조그만 기적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열 두 살, 독일과 벨기에 국경 부근에 있는 휴르트겐 숲속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아버지가 주말이면 찾아와 머무르면서 사냥을 즐기곤 하던 집이었다. 연합군 폭격기가 우리가 살던 아아헨 마을을 파괴하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이곳에 보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4마일 떨어진 구경도시 몬샤우의 민방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숲속은 안전할 거다’고 아버지는 우리를 떠나보내면서 말했다. ‘네가 어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한다. 이제 너는 우리 집의 기둥이야.’

크리스마스를 아흐레 앞두고 독일군의 폰 룬드슈테트 원수(元帥)는 2차 대전을 통해 가장 필사적인 막판의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내가 문을 열러 나가는 순간에도 전투의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가까운 곳의 대포소리가 밤의 숲을 뒤흔들었고,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머리 위로 날고 있었다. 탐조등의 불기둥이 밤하늘의 어둠을 씻으며 이곳저곳으로 부산스레 움직였다. 수천 수만의 연합군, 그리고 독일 병사들이 가까운 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또 죽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어머니는 곧 촛불을 불어 껐다. 내가 문 쪽으로 가는데 어머니가 한 발 앞서 문을 열었다. 눈 쌓인 겨울나무들을 배경으로 철모를 쓴 병사 둘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눈 위에 누워 있는 셋째 번 사내를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와 나는 거의 동시에 그들이 미국 군인임을 알아챘다.

<적군이다!>

어머니는 나의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나의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잠시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무장한 그들은 구태여 우리의 허락 없이 강제로라도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서서 눈으로 간청하고 있었다. 눈 위에 쓰러져 있는 부상자는 이미 죽은 것 같았다.

“들어오시오” 어머니가 독일어로 말했다.

그들은 곧 부상자를 들어다 내 침대 위에 눕혔다.

그들은 독일어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프랑스 말을 써보았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말을 알고 있었다. 부상자를 살펴보러 가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의 발가락이 언 것 같구나. 자켓과 구두를 벗겨 줘라. 그리고 밖에 나가 눈을 한 양동이만 퍼다 다오.”

나는 곧 그들의 퍼렇게 언 발을 눈으로 비벼 주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땅딸막하고 머리가 검은 군인이 짐이고, 크고 날씬한 친구는 로빈임을 알았다. 부상자 해리는 문밖 숲 속에 쌓인 눈처럼 파르라니 창백한 얼굴로 내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부대에서 낙오되어 독일군으로 부터 몸을 숨겨가며 꼬박 사흘 동안 숲 속을 방황했던 것이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더부룩했지만 방한복을 벗은 그들은 큰 소년들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그들을 소년처럼 대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가서 헤르만을 잡아와라. 감자도 여섯 개 가져오고”

그것은 크리스마스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헤르만이란 어머니가 싫어하는 나찌의 제2인자인 헤르만 괴링의 이름을 따 붙인 통통한 수탉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기로 된 아버지를 위하여 살찌게 먹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전 아버지가 못 오실 것이 확실해지자 신년 축하용으로 쓰기로 용도를 변경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는 그 계획을 다시 바꾼 것이다.

짐과 내가 음식 만드는 것을 돕는 동안 로빈은 해리를 보살폈다. 해리는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피를 많이 흘려 거의 죽게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보를 길게 잘라 붕대를 만들었다.

곧 구운 닭고기의 냄새가 방안 가득히 퍼졌다. 어머니를 도와 식탁을 차리고 있을 때 문 쪽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또 길 잃은 미군이겠지 생각하며 나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5 년이나 끈 전쟁 동안 내 눈에 익은 군복을 입은 군인 넷이 서 있었다.

<독일 군인이다!>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놀람과 공포감으로 몸이 얼어붙는 거 같았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나는 그 정도의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적군을 보호하는 것은 반역죄며 총살감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공포감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마 후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프뢸리에 바이나하텐 (메리 크리스마스) !” 군인들 역시 “프뢸리에 바이나하텐”하고 대답했다.

“우리들은 부대를 잃었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이 집에서 쉴 수 없을까요?” 하사가 말했다. “물론 되고말고요” 공포에 잠긴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가 대답했다. “여러분은 따뜻한 음식을 남비가 빌 때까지 먹을 수도 있습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를 맡고 독일 군인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 어머니가 한껏 엄숙한 음성을 지어 이렇게 말을 이었다. “지금 다른 손님 셋이 계신데 아마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소”

그리고는 내가 그때까지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준엄한 목소리로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요. 이곳에서 총질을 하면 안돼요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하사가 물었다.

“미국 군인!”

어머니는 추위에 언 독일 군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들어 보세요” 어머니는 천천히 말했다. “여러분은 내 아들 같고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래요. 부상을 입은 소년 하나가 죽음과 싸우고 있고, 그의 두 친구도 여러분처럼 길을 잃고 배고파 지쳐 있어요.  오늘  밤만은……” 어머니는 하사를 향해 어조를 좀 높여 “이 크리스마스 이브만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잊었으면......” 조금은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듯 말했다.

하사는 멍하니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실제보다는 몇십 배나 더 길게 느껴지는 2,3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어머니가 다시 입을 열어 망설이는 그들에게 결단을 내려 주었다.

“자,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리고 손뼉을 치고는 “무기는 이 장작더미에 놔요.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모두 먹어치우기 전에 어서 서둘러요 !” 어머니의 말에 군인들은 마치 귀신에 흘리기라도 한 듯이 고분고분 문안에 있는 장작더미 위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뒤돌아 서서 미군 짐에게 프랑스말로 몇 마디 했다. 그는 다시 영어로 동료에게 어머니의 말을 전하고 나서 자기들의 무기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이윽고 독일군과 미군들이 좁은 방에 꼭 끼어 서자 어머니는 시종 미소 띤 얼굴로 모든 사람에게 좌석을 지정해 주면서 앉도록 했다.

의자는 셋밖에 없었지만 어머니의 큰 침대를 끌어다 새로 온 두 사람을 짐, 로빈과 함께 그곳에 앉게 했다.

분위기는 살얼음판 같았으나 어머니는 곧 저녁준비를 했다. 입이 넷이나 더 늘었는데 비해 헤르만의 크기는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나에게 속삭였다.

“빨리 가서 감자와 귀리를 더 가져와라. 저들은 배가 고프단다. 배가 고픈 사람은 화를 내게 마련이거든”

창고에서 식량을 찾는 동안 나는 해리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돌아와 보니 독일군 하나가 안경을 쓰고 해리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간호병이군요?”

"아닙니다. 하지만 몇 달 전까지 하이델 베르그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꽤 유창하게 들리는 영어로, 추위 덕분에 해리의 상처가 곪지는 않았다고 미군들에게 말했다.

“과도한 출혈 때문이에요.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괜찮을 거에요.”

서로간의 적의와 의심이 가시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모두 식탁에 앉았을 때 다시 보니 어린 내 눈에까지도 군인들은 아주 어려 보였다.

퀼른에서 온 하인츠와 빌리는 열여섯 살이었고, 스물 세 살 난 하사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하사는 배낭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냈고, 하인츠는 호밀빵 한 덩어리를 꺼내 놓았다. 어머니는 그 빵을 잘게 썰어 식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포도주 반 병은 ‘부상당한 소년을 위해’ 따로 남겨 두었다.

어머니가 기도를 드렸다. 귀에 익은 “주님이시여, 오셔서 저희들의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읊조릴 때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나는 식탁 주위를 돌아보았다. 전쟁에 시달린 군인들, 다시 소년이 된 그들, 미국에서 그리고 독일에서 모두 집으로부터 멀리 더나온 그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자정 직전에 어머니는 문 앞 계단으로 나가 모두들 베들레헴의 별을 보자고 제의했다. 잠들어 있는 해리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곁으로 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을 찾던 그 침묵의 순간에 전쟁은 멀리, 그리고 거의 우리의 머리에서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우리 집에서의 그 사적(私的) 임시 휴전은 다음날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해리는 이른 새벽에 깨어 어머니가 떠 넣어 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그는 원기를 많이 회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독일군 하사에게서 얻은 포도주 반병에 달걀과 설탕을 섞어 마시게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오트밀을 먹었다.

장대 두 개를 주워다 어머니가 가장 아끼는 식탁보를 이용해서 해리를 위한 들것을 만들었다. 하사가 미군들에게 부대를 찾는 길을 알려주웠다. 짐이 꺼내어 펴놓은 지도 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물줄기를 따라가면 제1군이 상류에서 재편성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될 거요”

의학도가 옆에서 하사의 말을 영어로 통역해 주웠다.

“왜 몬샤우로 가면 안됩니까?” 짐이 물었다.

“나인(안됩니다) !”하사가 짐에게 대답했다.

“우리 독일군이 몬샤우를 점령하고 있거든요”

어머니가 그들에게 무기를 돌려주었다.

“여러분 몸조심하세요. 모두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래요.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같이 하시기를……”

독일군과 미군들은 악수를 나누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들의 모습이 숲 속으로 사라지고 난 다음 어머니와 나는 집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낡은 성경을 꺼냈다. 나는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그 책을 들여다보았다. 펼쳐진 곳에는 크리스마스 이야기, 즉 그리스도의 구유 속에서의 탄생,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멀리서 선물을 가지고 찾아왔는가 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마태복음 2장 12 절의 끝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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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남교육연구소] 홈피에서 퍼왔다. 얼마 전 '그' [반딧불의 묘]를 봤는데.. 정말 좋은 반전 영화였다. 레바논... 암울하다.
 

사람이 자꾸 치사해진다.

같이 다니는 대학 동기 은ㅈ, 무지 부지런한 범생이다. 몸도 불편한데 연수 시작하던 그 날부터 도서실로 자료실로 돌아다니며 강의에 도움되는 자료 찾고 복사하고 예습하고 복습하고 무지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다. 또 한 분, 임명ㅎ 선생님,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계신 이 분도 참 바지런히 다니시며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 번역본, 단행본 찾으셔서 읽으신다. 이 곳 저 곳 돌아다니며 콧구멍에 새로운 바람넣기 바쁜 나랑은 다른 두 사람. 꼬셔도 안넘어 온다.

두 분이 모은 자료를 나에게도 나눠준다. 그냥 힘 닿는 대로 열심히 해야지 생각하며 게으름 피우고 모셔두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하고 무엇보다 챙겨주는 맘, 참 고맙다. 그런데... 고민이 생긴다. 엊그제 은ㅈ가 복사해준 [만복사저포기] 번역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후배들이 번역본을 찾을 때 모른척했다. 내가 찾은 자료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은ㅈ가 준 것이니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다. 흠...

그리고 시험 때 제출해야할 과제물이 서넛 있는데... 후배가 이걸 보여달라고 하는데 망설여진다. 자신의 생각과 구체적인 상황을 써야하는 것인데 보여주면? 이런 과제물은 다른 사람 것을 보면 그것에 영향받게 되어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과제이기 때문에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논리가 세워지는 것인데... 라는 자기 변명만 궁시렁거리고 있다.

시험과 점수에 목을 메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렇게 열심히 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려하기 보다는 '뭐 그렇게까지..'라며 약간의 시니컬함으로 대하면서 역시 그런 것들에 완전히 자유로와지지 않는 어정쩡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참 보잘것 없고 초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내일은 집으로 간다. 네 가지 과제물을 다 하고 돌아오는 월요일엔 금강걷기 팀에게 저녁 사주며 응원하고, 화요일엔 계룡산 위에 우뚝 설 거다. 그리고 한 가지 작은 소망 더! 연미산 일출을 꼭 봐야겠다. 5시쯤 나서면 되려나? 눈 떴을 때 가장 날씨 좋은 날로 해야지. 앗! 그럼 매일 4시에는 눈을 떠야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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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권정안 선생님의 글을 올리기 위해 마이페이퍼 카테고리를 하나 더 만들었다. [한문관련]이라는 이름으로.

과제물도 전혀 안 하고, 일기도 안 쓰고 그 글 퍼다 붙이고 읽느라고 꼬박 두 시간을 보냈다. 꼭꼭 씹어가며 읽으니 선생님의 과제물에 대한 방향이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직접 들으면 더 좋은 수업이지만 이렇게 읽는 것만으로도 내 자잘한 수고에 충분히 갚하는 글들이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또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있던 '유학/유교/한문'에 대한 묘한 컴플렉스에서 조금씩 놓여나는 느낌, 무엇보다 소중하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끔 하종강씨의 강연에서 들은 것 같다고 느끼는 나는 또 오버하고 있는 걸까? 암튼 선생님처럼 학문으로, 수업으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내공이다. 나도 이런 수업, 할 수 있을까?

뭔가에 쉽게 빠지고 헤어날 줄 모르는 나, 그 병 또 도졌다.

BRINY 2006-08-1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는 분반이 2개인데, A반과 B반 분위기가 너무 달라요. 제가 있는 A반에선 절반은 뒷자리로 도망가서 강의시간에 과제하고 소설 보고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졸리면 그냥 엎드려 자는 사람도 있고~~ 그러고 있는데, 옆반 얘기 들어보니 다들 열심히 필기하고 슬라이드에 나오는 글씨까지 짝과 분담해서 하나도 안 빠트리고 쓴다네요. 그래서 저와 제 짝인 선생님은 '슬라이드 빨리 넘어가면 그냥 안쓰고 말지. 그런데서 시험 내면 사람이 아니지~'이러고 말았는데. 반 분위기란게 이래서 중요한가봐요~~.

국경을넘어 2006-08-1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은 한문이 전공이셨나 보군요. 권장안 선생, 백원철 교수 등등 이름이 나오는 걸 보니... 이전에 송석준 선생 강의르 한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사상사. 저도 어그제까지 공주에 가서 열나게 자료 찾았는데... ^^* 일정 연수 받나 보군요. 너무 일정에 목매지 마세요. 점수 잘 받으면 앞으로 그거 아까워서 계속 신경쓰면서 살아야 하는데 힘들지 않나요? 그 점수가 교사 점수도 아니고(욕심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 기준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 브리니님도 일정연수인가 봅니다. 얼마 전 어느 지역엔가 일정 연수 강의 다녀왔는데... 설마 거기서 뵙지는 않았을런지.... ^^*

해콩 2006-08-1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에 목 매는 거 졸업했는데요, 그리고 그 점수따위 전혀 관심 없는 사람 중의 하나인데요.. 그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제껏 살아온 관성처럼 자꾸 뭔가 어슬렁거리게 되어서 말예요. 습관, 정말 무서운 질병이예욤. 학교에서 교육받은 '무엇이든 무조건 열심히 하고보자'는 '주의'!! 이 정도면 저는 쇄뇌당한 걸까요? ㅋㅋ 폐인촌님 일정 끝나셨다니 부러워요~

hook-choi 2006-08-11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열심히 잘 살고 있구나...샘은. 난 휴가때 서울다녀온 것 빼곤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오랫만에 온종일 혼자 집에 있는데 하루종일 에어컨 바람도 머리 아프고 해서 선풍기로 견디려니 너무 더워^^ 조금만 더 힘내.

BRINY 2006-08-1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며칠전에 저녁을 사주진 선배 선생님 왈, '그래도 선생님들이라서 다들 투덜투덜하면서도 과제 꼬박꼬박 내고 시험공부 다 하고 그러죠?'. 그렇죠 뭐~ 그런데, 어제는 전공중간고사 힌트 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도 수업 끝나자마자 가버리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호오~ 전 그렇게까지 용감하지는 못하네요. 결국은 힌트 줘도 단순 암기(유적지 지명) 문제는 두 문제 다 틀리고 말았지만요.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권정안 / 소장ㆍ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단발령의 추억


공주 방면에서 봉현리에 있는 우리 연구소를 가 본 사람들은 그 중간에 있는 저수지와 그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는 모덕사를 알 것입니다. 처음에야 웬 절[寺]이 있는가 하겠지만, 몇 번 드나들다 보면 이 곳은 절이 아니라 구한말 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대마도에 끌려가 단식절사(斷食節死)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슨 인연일까? 처음 제가 선생에 대해서 들은 것은 아마 고등학교 국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은 서세동점의 도도한 흐름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민족과 국가 생존의 위기 앞에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개화의 요구에 대해 선생은 수구파의 우두머리로 개화정책을 반대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보다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내용은, 선생이 반대한 가장 중요한 정신이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보다 개화정책의 자잘한(?) 조목 가운데 하나인 단발령을 거부하면서 내세운 주장, 즉 ‘이 목은 벨 수 있어도 이 머리털은 벨 수 없다.(此首可斷 此髮不可斷)’는 말이었습니다. 상투는 당연히 해본 일이 없고 까까머리 학생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가던 나에게, 이 말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코미디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말을 한 선생 자체가 시대착오적 사고와 말로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정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찌 선생과 선생의 이 말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세기 내내 우리의 조상들과 그들의 문화전통을 모두 시대착오적인 코미디 정도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많은 부분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목을 벨지언정 머리칼을 자르지는 못하겠다는 이 말은, 생명이 달린 목과 생명이 없어 잘라도 아프지도 않고 그냥 두어도 수시로 빠지는 머리칼 사이의 가치의 차이를 모르는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그런 정신병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우리는 선생과 달리 개화된 문명한 사회에 산다는 자만감을 만끽하면서, 이 말을 시대착오적인 우스개 소리나 미치광이의 말쯤으로 가볍게 치부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조금 식견이 있는 경우에는 선생의 인격과 행적을 고려하여 그 말이 나름의 상징성을 가진 것임을 인정하지만, 그 상징적 의미의 사상적 기반인 유학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나 가치로 치부해왔기에, 이 말은 여전히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유학자의 고집스러운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선생과 선생이 살았던 구한말의 우리 민족과 국가는 서세동점의 국제적인 흐름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참담한 패배자였습니다. 현실적으로 개인이건 집단이건 패배자는 승자에게 경멸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경멸 이상의 참혹한 대가를 치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패배자에게 남은 길은 대개 저항과 굴종의 선택뿐입니다. 그리고 굴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런 굴욕을 합리화할 자기변명의 희생양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평범한 개인의 말이라도 그것이 생명을 걸고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진지한 이해의 자세나 적어도 경청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담보한 주장은 이미 단순히 일상적인 주장에 대해서와 같은 평범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을 아니라, 그 사람의 전 생명을 건 그래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알아달라는 요구를 담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면암 선생 정도의 인격과 실천을 보여준 선비들의 주장인 경우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시대의 희생양으로 삼아 우리 책임을 전가한 전력 때문에,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지하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성찰하기를 회피했고, 그런 우리들에게 있어 이 말을 다시 상기하는 것은 역시 괴로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반성이야말로 지성의 첫째 조건이고 반성 없는 삶과 반성 없는 시대는 희망이 없다고 보기에, 늦었지만 더 늦지 않게 이 말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새겨 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 출발에서 우선 이런 의문 하나를 던져봅니다. 단발령은 국가가 임금의 명을 빌려서 국민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단발령을 주장한 개화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종하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런 국가와 임금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현실적인 정치상황에서 그들은 반역자까지는 아니라 해도 적어도 당시 정치권력에 대해서 충신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소중한 부모가 주신 것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머리칼을 지키는 것이 효도이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이라도 거부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은 그 많은 선비들의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이처럼 효도 지상주의자 같은 그들이, 어떻게 망국의 상황에서는 머리칼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소중한 목숨은 도리어 초개처럼 내던지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니겠습니까?

 


몸에 상처 한번 나지 않는 삶이 가능한가?


그러면 단발령을 거부한 선비들의 주장은 도대체 어떤 정신에 근거한 것인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그 주장의 근거가 된 한문 구절에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그것은 효경(孝經)에 나오는 공자의 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헐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이 말은 본래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저자이면서 유명한 효자로 알려진 증자(曾子)에게 공자가 한 말입니다. 증자는 그 아버지인 증점(曾點)도 공자의 제자로, 통칭 삼 천 제자라고 하는 많은 제자 가운데 비교적 어린 제자에 속하였을 뿐 아니라, 공자가 ‘노둔하다’고 평가할 만큼 총명하지도 못한 제자였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백 번 해서 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열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나는 천 번 해서 할 수 있더라도, 그 할 수 있게 되면 같은 것이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及其能則一也)’ 할 정도의 노력파였습니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않는 노력파인 어린 제자에게 가르친 공자의 이 말은 어찌 보면 참으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아니 이 말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도리어 통속적이기까지 합니다.


입신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서 부모를 현창함이 효도의 끝이다.

(立身出世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물론 공자가 여기에서 말한 입신양명이 설마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실의 모습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개인의 영달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노장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가치를 고상하게 갖는 선비들의 입장에서 조차 이 말은 너무 통속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공자가 증자에게 말한 이 구절 가운데, 앞의 내용은 효도의 시작으로서는 너무나 자잘한 것이고, 뒤의 내용은 효도의 최고 경지를 의미하는 끝으로서는 너무나 통속적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공자의 교육 방식이 이른바 ‘그 사람의 수준에 따라 가르친다(因人施敎)’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이 말은 증자를 너무 무시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건 증자는 이 공자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하였습니다. 뒤의 구절이야 적어도 증자의 입장에서는 증자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결과적으로 보면 세속적인 입신양명에서는 아니라 해도, 증자만큼 그 본래적 의미의 측면에서 성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앞의 구절은 그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는 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물론 글자 그대로라면 첫째 구절의 실천인들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터럭이야 시간이 지나면 빠지기도 하는 것이고, 몸의 상처인들 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불가피하게 상처가 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스스로의 의지로 헐거나 상처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겠지만 증자는 실제로 평생 단 한번도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지 않았습니다. 공자의 이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애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 말 그대로 실천한 것이며, 그것도 평생을 실천한 것입니다. 논어(論語)에 보면 이 증자의 임종 때 일화가 나옵니다. 가족과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은 증자가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바로 앞의 공자의 가르침을 평생 실천한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증자가 위독하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내 발을 걷어 보고, 내 손을 걷어 보라. 시경에 이르기를, ‘언제나 전전긍긍하여, 마치 깊은 연못가를 지나듯이,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듯이 하라.’ 하였는데, 내가 이제야 더 이상 내 몸을 훼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았노라. 얘들아.” 하였다. (曾子有疾 召門弟子曰 啓予足 啓予手 詩云 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而今而後 吾知免夫 小子)                 

저는 아직도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을 기억합니다. 마치 지난 호에 고백한 사마광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감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평생 자신의 몸에 단 한번도 상처를 내지 않고 산다는 것이 도무지 가능한 것인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회의는 이어서 그런 삶에 대한 야릇한 선망과 함께, 20대 초반의 저 자신은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상처를 경험한 상황이라서,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회한과 자괴감을 금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란 그 자신의 삶의 어떤 모습이건 적어도 스스로에게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자신을 납득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또 누구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드높은 자존심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가진 저였기에, 이 증자의 삶에 대한 선망과 이미 불가능이 되어버린 저 자신에 대한 회한을 어떻게든 풀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첫걸음은 증자의 삶에 대한 선망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은 증자의 이런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면 되는 것이었고, 그렇게 깎아내릴 빌미를 찾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자 스스로도 시경의 글을 인용하여 표현하였듯이 그가 전전긍긍하는 조심스러운 삶을 산 사람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바로 그 말은 그가 평생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내더라도 이를 무릅쓰고 용기있고 과감하게 행동을 해 본 일이 없다는 것이며, 결국 그는 한 평생 소심한 겁쟁이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있는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한다.

그 부럽던 증자에게서 용기 없는 겁쟁이의 모습, 스스로의 신체에 상처를 내지 않기가 마치 가장 소중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좀생이의 모습을 찾아낸 나는 적이 안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증자와 같은 삶이 불가능해진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한도 풀어버리고, 내 삶이 그 유명한 증자에 비해 적어도 과감하고 용기있는 삶이라는 자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유를 찾은 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그런 삶을 그의 개성적 가치로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개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그런 시대이고 또 제가 처했던 자리가 그런 자리라서, 이런 저의 과감성과 용기는 여러 번 시험에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80년대 초반 대학에 온 뒤에는 이런 시험에 수없이 들게 되었고, 그 대부분의 경우에 저는 두려움에 뒷걸음을 치거나 갖가지 회피의 변명을 찾기에 골몰하는 비겁한 스스로와 부딪쳐야 했고, 그때마다 증자에 대한 저의 변명과 자부심은 형편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이런 자괴감을 통해서 저는 증자의 소심한 겁쟁이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 보았습니다. 저 소심한 겁쟁이인 증자와 그 동안 그런 증자를 조소하면서 과감하고 용기있게 내 몸의 상처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내가, 만약 동시에 부모나 국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내 놓아야 할 상황에 함께 부딪쳤다면, 과연 누가 기꺼이 이를 위해서 생명을 내 놓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열 번을 물어도 저는 아닌 것 같은데, 그 소심한 증자는 기꺼이 생명을 내 놓을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도대체 이 모순의 해답은 무엇일까? 증자는 겨우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몸에 상처내지 않기를 평생을 두고 실천한 것뿐인데, 그는 도리어 정말로 소중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받는 것이고, 나는 그런 상처내기쯤은 별 볼일이 없는 사소한 것으로 치면서 굉장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진 것 같은데, 진정으로 용기를 낼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조차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오랜 자괴의 시간을 거치면서, 저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맹자에게서 찾았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일이 없고, 바라지 않아야 할 것을 바라는 일이 없는 것, 단지 이 두 가지 일뿐이다.(無爲其所不爲 無欲其所不欲 如斯而已矣)


그랬구나, 그랬구나. 나는 그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을 바라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구나.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라는 것에 대한 관심은, 자연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무엇을 바라고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이끌어, 나로 하여금 그 조건과 힘을 얻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갖도록 한 것이구나. 내 나름대로는 내 능력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고, 이는 부끄러울 것 없는 정당한 욕망이고 행동이라고 자만했지만, 그게 아니었구나.

성현들께서 가르치신 정의로운 삶이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可能之中]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行可當之事]’이라고 학생들에게 그럴듯하게 가르쳤지만,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떠벌인 것이구나. 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판단과 반드시 함께인 것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의 선택은 마땅히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한 선택과 반드시 함께라는 이 당연하고 단순한 이치조차 몰랐구나. 아니 모른 것이 아니라 내 무지와 욕심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했구나.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라고 부르고, ‘무엇을 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퇴영적인 자세라고 매도하는 선전에 나도 모르게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구나.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고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과 회한, 그리고 나를 이런 무지 속에 가두어 내 소중한 삶의 가능성을 망쳐온 그 무엇인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감히 증자를 소심한 겁쟁이라고 치부하다니, 저는 얼마나 파렴치한 자입니까? 저를 이렇게 파렴치하게 만든 저 자신 속의 무지와 탐욕은 또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입니까? 그런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더러운 현실의 모습은 또 어떠하며, 그 모습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갖가지로 합리화해 주는 이론들은 또 왜 그리 많은 것입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아직도 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현실 속에 더러운 모습들이나 저를 합리화주는 갖가지 이론들에서 편안함과 위안을 얻는 것을 단호하게 중지할 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도 적어도 한 가지, 저 위대한 증자에 대한 터무니없는 경멸을 중지하고, 진정으로 그를 배우고 싶다는 바람만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다짐해봅니다. 그 바람 속에서 그 동안 증자가 속삭여주신 몇 마디의 말씀들은 이런 것입니다.

 

*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소중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소중한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 하지 않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이 성장하는 인간이다.

* 세상에서 별로 문제 삼지 않는 자잘한 행동까지도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으로 차마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 하지 않아야 할 작은 일을 작게 여겨서 함부로 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함부로 하는 일이 많아지고 커져서 결국은 못할 짓이 없게 되기 쉽다.   

*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기회를 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은 약속을 쉽게 하는 사람이 지킬 의지가 없는 것과 같아서, 대체로 그 기회가 주는 권력에 집착하여 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도 그리고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뒤에도 그가 있었던 자리와 그가 있는 자리에서 그 능력을 펴는 사람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사회적 지도자를 선택할 때,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따지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인가를 보아야 한다.

  

사족 1 : 위의 *표한 말들은 한번 읽으신 뒤에 모두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의 구절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죄악에 빠지지 말라’는 것인데, 또 이 교훈을 잊고 사람에 대한 판단을 제멋대로 내린 것 같습니다. 역시 증자의 속삭이심이 아닌 제 미숙한 인격의 울림이었나 봅니다. 타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이 끈질긴 시선을 멈추고, 그 방향을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사족 2 : 단발령을 거부한 그 정신을 그 정신을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머리카락을 가볍게 여겨 더 소중한 것들까지 마구 내 던져 온 지난 세기 우리가 어떤 것들을 상실했는가를 생각하면 참혹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게 됩니다.


사족 3 :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요? 아마 자식을 두어 본 사람, 그 자식의 몸에 난 상처를 바라 본 사람은 모두 알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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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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