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儒敎)

요약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설명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라는 말은 외래의 불교에 대비시켜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儒)·불(佛)·도(道)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敎化的)인 면을 중시하여 어느 정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덕치)]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주석학)],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천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19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산동성인민위원회)] 취푸[曲阜(곡부)]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령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 교양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 방지와 국가경륜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부흥에 힘써 유학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흥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중국의 송학, 즉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이 도입되었다.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들여옴으로써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 신진학자들의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길재(吉再) 등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 수용으로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유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세종 때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이래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엽부터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에 진출한 이래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대사화(四大士禍)가 일어났다. 특히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향촌자치제와 왕도정치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에게 몰려 몰락하였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림들이 정계 진출을 단념하고 향촌으로 내려가 학문에 주력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학문 경향도 사색과 이론 탐구에 치중하면서 발전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성리학의 선구였다. 그 뒤를 이어 명종·선조 때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성리학은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대표적인 학자로, 그 학풍이 후세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이이와 성혼(成渾)간의 사단칠정이기론변(四端七情理氣論辨)을 거쳐 학문적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후 이황 계열의 영남학파에서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이이 계열의 기호학파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는 등 학파에 따라 학설이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황·이이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찬한 뒤 유교철학은 고도로 발달하여 국내적으로 전성시대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영향을 미친 바가 크다. 특히 이황의 학설은 야마사키 안사이[山崎闇齋(산기암재)]를 비롯한 일본 주자학파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일본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에는 국가체제와 사회질서 확립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예학이 성립되어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裂) 등이 17세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이어 17세기 후반부터는 알맹이 없이 서로 헐뜯는 학설로 전락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론(禮論)의 대립을 지양하고 원시유교의 근본정신에 입각,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 등을 부르짖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박제가(朴齋家)·정약용(丁若鏞) 등이 영·정조시대를 전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 뒤 서학(西學)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운동(守舊運動)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 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維新精神)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국권피탈 이후 일제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 유학자류(儒學者流)를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시켜 한국 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부설하여 황도유교(皇道儒敎)를 선전하는 등 기형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儒林)의 총의로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시키고 1946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용어
개물성무 開物成務 인지(人智)를 계발하고 사업을 완성시킨다는 말. 만물과 인사(人事)의 공용(功用)을 이름을 말한다.
거경궁리 居敬窮理 정주학에서의 학문 수양의 두 가지 과제. 거경은 마음을 근신(謹愼)의 상태로 유지하고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성실하게 절제하는 것이며, 궁리는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격물치지 格物致知 《대학》 8조목에 나오는 학문과 수양의 방법론.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함양(涵養)공부의 요체가되는 핵심문제.
계선성성 繼善成性 음양(陰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실천결과를 나타낸 말. 《주역》 <계사(繫辭) 상>에서 <한 번 양하고 한 번 음하는 것이 도이니, 이를 계승하는 것이 선이고 이를 이루는 것이 성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계왕개래 繼往開來 선왕의 도를 계승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승하는 것. 주희(朱熹)가 공자를 가리켜 한 말이다.
괴력난신 怪力亂神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패역(悖逆)한 일과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들을 일컫는 말.
궁리진성 窮理盡性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인간의 본성을 다한다는 말. 사물·인사(人事)의 법칙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인간에게 내재화한 것으로서의 본성을 발휘하는 것의 일관성을 나타낸다.
극기복례 克己復禮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라는 말.
내성외왕 內聖外王 유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수양의 이상적 상태. 안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 밖으로 민중을 선도하여 천하에 태평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동 大同 모든 사람의 신분적 평등과 재화(財貨)의 공평한 분배, 그리고 인륜의 구현으로 특징되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형태로 상정(想定)하는 사상.
대성지성 大成至聖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완정(完整)된 학문과 성스러운 인격을 기리는 말. <대성>이란 전인(前人)의 주장과 학설을 집대성하여 완정된 이론체계를 이룬 데 대한 칭송의 말이며, <지성>이란 넓은 학식, 고상한 인격, 비범한 지혜를 가진 사람에 대한 경칭이다.
대일통 大一統 중국의 고대사회에 있어 종법(宗法)의 근간이 된 것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의 제도적 통일을 주장하는 사상.
덕본재말 德本財末 정치의 근본이 경제적 충족보다 윤리적 교화에 있다고 하는 유교의 보편적 사고방식.
만물개비어아 萬物皆備於我 만물의 이치가 모두 인간의 마음[心] 속에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말.
명교 名敎 명분(名分)과 명예를 중시하는 가르침. 좁은 뜻으로는 예교(禮敎)와, 넓은 뜻으로는 유교와 같은 말이다.
명덕 明德 인간내면에 있는 본래의 밝은 덕.
무극이태극 無極而太極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거가 되는 근원적 실체의 무형성(無形性)과 실재성(實在性)을 함축한 말.
박문약례 博文約禮 널리 학식을 쌓고 그것을 예(禮)로써 집약하는 일. 학문연구와 도덕적 실천의 방법을 말한다.
반구저기 反求諸己 인식과 수양에 있어 내면적 반성을 강조하는 말.
변화기질 變化氣質 기질의 편탁(偏濁)을 교정하여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한다는 성리학의 수양법.
사단칠정 四端七情 인간의 착한 본성의 발로인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의 네 마음과, 인간 감정의 총칭으로서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7가지 감정을 이르는 말.
사대 事大 약소국이 강대국에 정치적·외교적으로 복속(服屬)함으로써 자국의 존립과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
사문 斯文 유교에서 자교(自敎)의 학문을 가리켜 이르는 말.
삼강 三綱 동양 고대사회의 기본적 인간관계인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관계를 도덕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유교의 전통적 질서의식.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이르는 말이다.
삼불후 三不朽 영원불멸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 3가지 일.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말한다.
생생지도 生生之道 역(易)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나타내는 말. 우주만물이 끊임없이 생성·순환(循環)하는 천도(天道)의 무궁한 변화상을 가리키는 말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처음 보인다.
선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상정(想定)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 성리학에서 주요 문제로 다루어진다.
성상근 습상원 性相近習相遠 인간의 선천성은 동일하나 후천적인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질 수 있다는 말.
솔성지위도 率性之謂道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라는 말. 유교에서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제이다.
시중 時中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신독 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뜻으로, 개인의 내면적 충실을 강조한 덕목.
양지양능 良知良能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인식과 능력.
역자이교지 易子而敎之 자제(子弟)를 직접 가르치지 않고 남과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방법론.
예약형정 禮藥刑政 유교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4가지 통치방법을 가리키는 말. 예는 예법, 악은 음악, 형은 형벌, 정은 정령(政令)을 각각 가리킨다.
오륜 五倫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5가지 관계, 즉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관계를 확정하기 위해 제시된 유교의 기본윤리.
오상 五常 사람이 항상 행해야 하는 5가지 덕목. 인(仁)·의(義)·예(禮)·지(智)·(信)을 가리킨다.
위기지학 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학문.
위정척사 衛正斥邪 정학(正學;儒學)의 도통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사상.
모든 사물·현상에 내재한 법칙이나 원리, 혹은 그것들을 성립하는 법칙성.
이단 異端 유교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는 학파가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교(他敎)를 부정하여 가리키는 말.
이용후생 利用厚生 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하며 삶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말.
적연부동 감이수통 寂然不動感而遂通 역(易)은 아무런 작위도 없이 고요하다가 감응(感應)하게 되면 사물의 모든 원리에 통한다는 뜻. 역의 본체와 작용을 통일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존덕성 도문학 尊德性道問學 유교에서 제시하는 도덕수양의 두 가지 방법. 존덕성은 인간에게 부여된 선한 덕성을 수양을 통해 높이고 보존하는 방법이며, 도문학은 학문을 통해 덕성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중도 中道 극단을 배제하는 유교의 윤리사상을 나타내는 말. 중(中)에 처하여 도(道)를 얻는다는 뜻이다.
지행합일 知行合一 인식과 실천의 합일을 주장하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
진덕수업 進德修業 유덕한 군자가 자기의 덕을 날로 새롭게 진보·향상시키고 그것을 실제의 일에 응용하여 자기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한다는 뜻.
천인합일 天人合一 하늘과 인간의 선천적 동일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실천적 당위성을 밝히는 유가사상의 핵심적인 이론.
추기급인 推己及人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理解)를 포함한 대타적(對他的) 관계의 전실천과정에 있어 자기의 도덕적 본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
춘추필법 春秋筆法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간결한 문장을 통해 엄격하게 포폄(褒貶)을 한 《춘추》의 독특한 필법을 이르는 말.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실을 다하는 것.
충서 忠恕 자신의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치중화 致中和 정(情)의 미발(未發)을 중, 발하여 중절(中節)된 상태를 화라 하여,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의 한 방법.
태극 太極 만유(萬有)의 본원(本源)으로서, 만물이 생성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궁극적 실체.
하학상달 下學上達 형이하(形而下)의 구체적이고 비근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높은 진리에까지 도달한다는 공자의 학문방법.
혈구지도 자로 물건을 재듯이 내마음을 자로 삼아 남의 마음을 재고, 내 처지를 생각해 남의 처지를 아는 방법.
호연지기 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넘치게 가득찬, 넓고도 큰 원기(元氣). 전(轉)하여, 도의(道義)에 뿌리를 박고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를 이르기도 한다.

연표
BC 1500 은(殷) 은(殷)왕조 성립(~1120)
1120 주(周) 주(周)왕조 성립(~256). 이 무렵 기기가 조선으로 가 백성을 교화함
770 주(周) 주나라 동천(東遷), 춘추시대 시작됨(~226)
551 공자 공자 노(魯)나라에서 태어남(~479)
481 공자 공자, 《춘추》 완성함
479 공자 공자 죽음. 이즈음부터 유가사상이 일어남
372 맹자 맹자, 노나라에서 태어남(~289)
300 한반도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213 진시황제 시서 및 백가서 불태움
212 진시황제 유생을 생매장함
136 한(漢)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오경박사를 두고 유교를 국교로 정함
104 한(漢) 동중서 죽음
BC 91 한(漢) 사마천 《사기》 완성함
AD 29 후한 태학을 세움
83 후한 훈고학자 정중(鄭衆) 죽음
166 후한 훈고학자 마융(馬融) 죽음
200 후한 훈고학자 정현(鄭玄) 죽음(127~)
249 위(魏) 경학자 하안(何晏)죽음
320 진(晉) 청담(淸談)이 유행함
372 고구려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함
405 백제 왕인이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함
607 수(隋) 구품중정제를 대신하여 과거제도 시작됨
624 당(唐) 균전법 실시
648 당(唐) 공영달(孔穎達) 죽음(574~)
653 당(唐) 오경정의 반포
682 신라 국학을 세움
717 신라 김수충(金守忠)이 당에서 돌아와 공문십철과 72제자의 화상을 대학에 둠
720 신라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 줌
788 신라 독서삼품과 실시
824 당(唐) 고문운동의 선구인 한유 죽음(768~)
841 당(唐) 《복성서(復性書)》를 지은 이고 죽음(772~)
857 신라 최치원 태어남
858 고려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처음 실시
982 고려 최승로 시무이십팔조의 봉사 올림
992 고려 국자감 설치
1008 북송 공자를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으로 가시(加諡)
1020 고려 최치원을 처음으로 성묘에 배향
1050 고려 이 무렵부터 사학십이도가 생기기 시작
1068 고려 해동공자 최충 죽음(984~ )
1069 북송 왕안석의 신법 실시
1073 북송 송학(宋學)의 비조 주돈이 죽음(1017~)
1076 북송 장재 《정몽(正蒙)》 지음
1085 북송 정호(程顥;明道) 죽음(1032~)
1091 북송 고려사신 이자의(李資義)를 통하여 고려의 서적을 구함
1099 북송 정이 《역전(易傳)》 지음
1101 고려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1107 고려 국자감에 구인재 등 7재 설치. 북송, 정이 죽음(1033~)
1116 고려 궁중에 청연각·보문각 설치
1119 고려 국자감에 양현고 설치
1131 고려 노장의 학문을 금함
1138 남송 호안국(胡安國) 《춘추전》 이룩함
1145 고려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
1170 고려 무신의 난이 일어나 문교의 암흑기가 시작됨
1175 남송 여조겸(呂祖謙)의 중개로 주희와 육구연(陸九淵) 형제가 만나 학문을 토론함(鵝湖之會)
1177 남송 주희 《논어집주》 《맹자집주》 이룩함
1189 남송 주희 《대학장구》 《중용장구》 이룩함
1192 남송 육구연 죽음(1139~)
1197 남송 <경원(慶元) 이학(異學)의 금(禁)>이 일어나 주자학이 위학(僞學)으로 몰림
1200 남송 주희 죽음(1130~)
1234 고려 이무렵 최윤의(崔允儀) 《고금상정예문》 50권 간행
1241 남송 주돈이·장재·정호·정이·주희를 공자묘에 종사함으로써 도학이 공인화함
1270 남송 여정덕(黎靖德) 편찬 《주자어류》 간행
1271 몽고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고 허형(許衡)을 국자좨주에 임명함
1275 고려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
1289 고려 안향 원나라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됨. 이 무렵 원나라에서 주자학 들어옴
1296 고려 경사교수도감 설치
1304 고려 안향의 건의로 국학에 섬학전을 둠. 국학에 대성전 이룩됨
1306 고려 안향 죽음(1243~)
1313 과거가 실시되고 주자학의 주석이 채용됨
1320 고려 공자의 소상 만듦
1325 주자학을 관학으로 공인. 고려, 평양에 기자사(箕子祠) 세움
1348 고려 이색(李穡) 원에서 성리학 연구
1357 고려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행하게 함
1367 고려 이색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성리학을 보급함
1371 고려 정도전 《심문천답》 지음
1375 명(明) 전국에 사학 세움
1389 고려 5부학당과 지방향교에 교수를 둠
1392 고려 정몽주 죽음(1337~). 고려 멸망
1394 조선 정도전 《조선경국전》 《불씨잡변》 편찬
1398 조선 성균관의 문묘와 명륜당을 건립
1405 조선 권근의 《예기천견록》 간행됨
1415 명(明) 호광(胡廣) 등 봉칙찬(奉勅撰)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 이루어짐
1420 조선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
1432 조선 설순 등 《삼강행실도》 편찬
1443 조선 유교(특히 성리학)의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훈민정음 창제
1453 조선 문묘의 액(額) 대성전(大聖殿)을 대성전(大成殿)으로 고침
1464 명(明) 설선(薛瑄)의 《독서록》 이루어짐
1493 조선 김시습 죽음(1435~)
1498 조선 무오사화 일어나 김종직의 문도를 비롯한 다수의 사류들이 죽거나 귀양감
1517 조선 조광조 등 성리학의 장려를 청함
1518 명(明) 왕수인(王守仁)의 《전습록》 간행됨
1519 조선 기묘사화 일어남. 조광조 사사됨(1482~). 현량과 폐지
1520 명(明) 왕수인 치양지설(致良知說) 제창
1528 명(明) 나흠순(羅欽順) 《곤지기》 이룩함. 왕수인 죽음(1472~)
1543 조선 주세붕 백운동서원 세움(서원의 시초)
1544 명(明) 왕정상(王廷相) 죽음(1474~)
1546 조선 기불멸론자(氣不滅論者) 서경덕의 죽음(1489~)
1553 조선 영남학파의 선구자 이언적 죽음(1491~)
1559 조선 이황·기대승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66)
1564 명(明) 나홍선(羅洪先;念庵) 죽음(1504~)
1568 조선 이황 선조에게 《성학십도》 올림
1570 조선 이황 죽음(1501~)
1572 조선 이이·성혼 간에 사단칠정논쟁 시작됨(~1578)
1574 조선 도산서원 세워짐
1575 조선 이이 선조에게 《성학집요》 올림
1579 명(明)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강학을 금지시킴. 하심은(何心隱) 옥사(1517~)
1582 명(明) 마테오리치[利瑪寶] 마카오에 상륙하여 가톨릭 포교를 개시
1584 명(明) 왕기(王畿;龍溪) 죽음(1498~). 조선, 이이 죽음(1536~)
1588 명(明) 나여방(羅汝芳;近溪) 죽음(1515~)
1590 명(明) 이지(李贄) 《분서(焚書)》 간행
1592 조선 임진왜란 일어남. (~1598). 조선성리학 일본에 전해짐
1602 명(明) 좌파양명학자 이지 <인심·풍속의 혹란과 성인에 대한 모독>의 죄로 투옥, 옥중에서 자살(1527~)
1603 명(明) 마테오리치 《천주실의》 지음
1620 명(明) 초횡 죽음(1540~)
1625 명(明) 동림파 사대부에게 대탄압 가해짐(~1626)
1631 조선 김장생 죽음(1548~)
1636 조선 병자호란 일어남(~1637).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청에 잡혀가 죽음을 당함
1644 명(明) 명나라 멸망(1368~)
1645 명(明) 명나라 유신 유종주(劉宗周;念臺) 순국(1578~)
1659 조선 김장쟁의 《가례집람》 간행됨
1660 조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시작됨(~1674)
1663 황종희(黃宗羲) 《명이대방록》 이룩함
1670 고염무 《일지록》 간행됨
1673 조선 유형원 죽음(1622~)
1676 황종희 《명유학안》 이룩함
1683 염약거 《고문상서소증》 제1권 지음
1689 조선 송시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지음
1692 왕부지(王夫之) 죽음(1619~)
1703 조선 대명의리의 본산인 만동묘(萬東廟) 세워짐
1709 조선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시작됨(~1715)
1712 이광지(李光地) 등 봉칙찬(奉勅撰) 《어찬주자전서》 지음
1716 《고문상서원사》 지은 모기령 죽음(1623~)
1717 그리스도교 포교금지
1725 《고금도서집성》 지음
1736 조선 정제두(鄭齊斗) 죽음(1649~)
1758 청조한학의 제창자 혜동(惠棟;松崖) 죽음(1697~)
1763 조선 이익(李瀷) 죽음(1682~)
1777 대진(戴震) 《맹자자의소증》 지음
1782 기윤 등 《사고전서》 지음
1783 조선 홍대용 죽음(1731~)
1784 조선 이승훈 가톨릭 전래
1788 청대 공양학의 비조 장존여(莊存與) 죽음(1719~). 조선, 임성주(責聖周) 죽음(1711~)
1798 완원(阮元) 《경적찬고》 지음
1801 조선 신유사옥 일어남. 청, 장학성 죽음(1738~)
1804 전대흔(錢大昕) 죽음(1728~)
1805 조선 박지원 죽음(1737~)
1824 방동수(方東樹) 《한학상태(漢學商兌)》 지음
1836 조선 정약용 죽음(1762~).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 지음
1844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간행
1849 완원 죽음(1764~)
1856 조선 김정희 죽음(1786~)
1862 양무운동 일어남
1866 조선 병인사옥 일어남
1868 조선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단행(~1871)
1877 조선 최한기 죽음(1803~)
1881 조선 위정척사운동 일어남
1885 캉유웨이[康有爲] 《대동서(大同書)》 지음
1886 조선 이진상(李震相) 죽음(1818~)
1891 캉유웨이 《신학경위고(新學經緯考)》 간행
1894 조선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 폐지
1895 조선 성균관 관제 공포, 경학과 설치
1896 담사동(譚嗣同) 《인학》 지음
1897 캉유웨이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간행
1898 캉유웨이 등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으나 무술정변으로 실패
1902 과거제도 폐지
1906 쑨원[孫文] 일본 도쿄에서 <삼민주의와 중국의 전도(前途)>라는 연설을 함. 조선, 최익현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쓰시마섬에 유폐 도중 단식으로 순국
1910 조선 한일합방으로 멸망
1911 신해혁명 일어남. 한국, 일제에 의해 성균관이 경학원으로 격하됨
1913 중국 캉유웨이 등 유교의 국교화를 추구하여 존공운동(尊孔運動) 일으킴. 후스[胡適] 유교를 배척함
1919 중국 5·4운동과 함께 유교비판운동 가속화함. 한국, 유림단의 파리장서사건 일어남
1921 중국 중국공산당 결성
1922 한국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간행됨
1927 중국 캉유웨이 죽음(1858~)
1934 한국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 간행됨
1937 중국 국공합작 이루어짐
1939 한국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
1944 중국 펑여우란[馮友蘭] 《신원도(新原道)》 지음
1945 한국 광복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환원하고 유도회 결성
1946 한국 성균관대학 창설
1949 한국 현상윤 《조선유학사》 간행
1965 중국 문화대혁명의 시작으로 전통 사상·문화·풍속·습관 등이 파괴됨
1973 한국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윤리선언문> 발표.
1974 중국 《린뱌오[林彪]와 공맹의 도》 배포를 계기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 시작됨
1976 중국 마오쩌둥 사망, 장칭[江靑] 등 4인방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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