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禁食을 해야겠다.

요즘 내게 남은 욕망이라곤  '식욕'이 유일한 것 같다. 먹어댄다. 살이 찌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내 모습이 마뜩찮다. 한 달에 한 번은 종일 굶어봐야겠다. 몸의 허기로 마음의 허기를 잊을 수 있을까? 무슨 짓을 해도 배부른 자의 헛짓 같이 느껴지는 죄스러움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지만...

 

내일부터 한 가지씩 아이들이 내게 남기는 '흔적'을 기록해야겠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아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러다간 잊어버리겠다. 묶어둘 빌미가 필요하다.

사실 며칠 전엔 ㅈ모를 등교길에 만났다. 여름방학 후, 녀석이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자친구가 생겼고 그 아이가 머리카락에 손 대면 가만히 안둔다고 해서 두발검사가 있는 날이면 결석을 한단다.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를 해주신다나? 졸업하면 뭐할건데? 했더니 처음엔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그거 얼마나 힘든 일인줄 아냐? 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아이들은 졸업 후 할 일이 궁하면 '농사 짓겠다'는 무책임한 말을 잘 뱉아낸다. 암튼.... 그 말 대신 내가 해준 말이라고는 틀에 박힌 애매한 잔소리... 한심했다. 하지만 그 후론 얼마간 생각해보았는데 뭐 딱히 내가 따로 해줄 말도 생각나질 않는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목요일, 7명의 아이들이 보충수업을 빠지겠다고 했다. 대부분이 아파서였다. 그 중 네 명은 우리 반 반장을 포함해 녀석과 친한 세 명이었다. 솔직히 의심스러웠다. 한꺼번에 달려와 동시에 생리통이란다. 특히 ㄷ원이는 성실한 녀석은 아니다. 그래서 부모님 확인을 강요했더니 울먹이기까지 했다. 나중 한 녀석은 어머니도 의심한다고 투덜투덜... 내 잘못이다. ㄷ원이 말이 맞다. 같은 날 아프지 말란 법이 어디있어요? 에구... 녀석에게 담임의 입장에 관한 궁색한 변명따위나 늘어놓다니 부끄럽다. 뒷날까지 녀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방학숙제 - self camera로 하루 일과 찍어보기-해온 데 대한 상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받고도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안한다. 물론 인사는 평소에도 잘 안하기 때문에 조퇴 의심한 데 대한 앙심의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난 너무 소심-세심하다. 이런...

암튼... 이런 저런 일들로... 아이들로 인해 일렁이는 나의 마음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이건 대단한 노동이 될텐데 감당할 수 있으려나...

이것들이 오늘 내가 느닷없이 한 결심 두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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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9-11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선생님이란 참 힘든직업인거 같아요..제가 집에서 애들을 키워봐도 그렇고 애들친구가 와도 애매할때가 많은데 다큰녀석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는지 늘 존경스럽답니다..어렸을적에 선생님을 꿈꾼적이 있었지요..하지만 애들키우면서 제 감정 조절을 잘 못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정말 선생님 안하길 잘했다 싶었어요.ㅎㅎㅎ

프레이야 2006-09-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이 허기져 먹을 걸 입에 달고 있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요.. 그리고 해콩님은 참 좋은 선생님인 것 같아요. 아이들 마음 관리하기 정말 힘들죠..

해콩 2006-09-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터님, 혜경님.. 안녕하시죠? ^^
내친 김에 오늘 당장 하루를 굶어봐? 생각하다가 다음주 월요일로 미뤘어요. 생리중이라 약간 어지럽고 몸이 다소 가라앉은 상태거든요. 교사도 아이들처럼 생리 휴가를 한 달에 한 번 쓸 수 있는데 감히 그걸 쓰겠다고 말할 용기가 없네요. 학교는 내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데 말이요. ㅋㅋ 이제 가을이라 마음은 점점 더 허기질 것이고 먹을 것은 쏟아져 나올텐데... 이 가을에 무모하게 금식 결심을 하다니. 그렇지만 하루쯤 굶는 것,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그쵸? 보기보다 제가 독한 구석이 있어놔서리..ㅋㅋ

아이들 마음 보듬는 건.. 정말 힘들죠. 제 마음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데요.. 그렇지만 길지 않지만 제 경험으로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 아이들쪽이 더 너그러웠던 것 같아요. 뭔가 잘못했을 때, 바로 "미안. 샘이 잘못-실수했다"고 사과하면 늘 받아주거든요. 진정으로 대하면 무관심한 녀석은 있어도 외면하는 녀석은 없답니다. 정말이예요~ ^^

BRINY 2006-09-1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발검사가 있는 날 결석을 한다니, 그 녀석도 참 단세포네요. 재검사는 안한답니까. 오늘 보니까, 금요일날은 근처 학교 축제했다고 야자 출석부에 줄 좌좌작 그어져있고, 오늘은 이틀 놀고 왔는 데다가 날 춥다고 벌써부터 겨울잠 모드로 들어간 아이들-..-

해콩 2006-09-1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체 단속이 있는 날은 결석하구요, 아침엔 일찍 와서 교문지도 피하구요. 수업시간엔 대충 뻐팅기거나 자구요. 뭐 그런 식이지요. 그 반 담임샘이나 저나 도무지 아이들 헤어스타일에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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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8. 23. 서울에서

그날 아침, 마음 먹은 대로 5시에 눈을 떴다. 찜질방.. 여러 모로 편리했지만 결정적으로 잠자리가 불편했다. 요도, 이불도 없었고 들락날락 하는 낯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잠을 청하기는 둔한 나로서도 쉽질 않아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꼬박 밤을 새웠을 여탕의 아주머니께서 새벽잠을 청하고 늘 그렇게 탕을 청소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아주머니들이 박박 여탕 바닥에 세제를 문지르는 가운데 대충 씻고 챙겨 나왔다. 8천원의 입장료에 호박죽 3,000원+인터넷사용료 1,000을 더 지불하고. 가방이 좀 무거웠지만 명륜동을 거쳐 성대 쪽으로 걸어올라갔다. 많이 변했다. 금잔디 광장이야 그 맘 때에도 뭔 건물을 짓는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기대할 것도 없었지만 늘 공부하던 도서관 아래쪽, 허름한 건물이 있던 자리엔 600주년 기념관인가 뭔가가 들어서서 그야말로 삐까뻔쩍했다. 도서관 뒤쪽으로 와룡산이 보이는 전망좋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곳도 막아버렸고 낡은 책상이랑 의자가 후줄근 쌓여 볼쌍 사나왔다. 새벽 커피를 한 잔 옛 살던 곳을 둘러보며 회상~ 도서관 그 자리에서 뭔가 끄적이고 싶어 들어섰는데... 막막해졌다. 경비아저씨게 쫓겨나왔다. 열람실에 들어가보려고 해도 카드공용 학생증이 있어야하나보다. 모든 것이 야박해졌다. 나를 증명하는 '증'이 나를 대신한다. 그 땐 그렇지 않았는데... 흘러간 것들을 무조건 향수하는 습관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나를 포함한 세상은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공허함을 거의 의미없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그 아침 내가 본 풍경들에서 느낀 것이라면 사람들이 비어있는 공간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다. 기어이 꼭대기까지 끙끙 기어올라가 마을버스를 타고 온 길을 되짚어 대학로로 다시 돌아와 둘러본 광경 역시 이러한 느낌에 방점을 찍게 했다. 전날 밤엔 어두워 미쳐 살피지 못했는데 대학로 도로가운데 세워진 말뚝들은 다 뭐냐. 그리고 이렇게 도로가 좁지도 않았단 말이다. 노천공원도 마찬가지. 뭔 이동 통신사가 다 망쳐놨다. 최손한 내눈엔 그리 보인다. 그 자유롭던 광장은 어디로 갔느냐... 걸어 걸어 삼련서점을 찾았지만 실패했다. 유일하게 중국 수입 서적들을 취급했던 그 서점에 걸려있던 액자에 걸려있던 글귀를 참 좋아했는데... 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디로 옮겼나 싶어 주위를 한 바퀴 둘어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제자리. 대학로. 서울역에서 8시에 ㅎㅈ이를 만나기로 했다. 수원에서 이까지 오려면 새벽에 출발했겠지? 부산 가는 표를 끊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계획에도 없던 '철도회원'카드를 만들어버렸다. 것도 현금 이만오천원이나 내고. 바로 후회했다. 가끔 이렇게 도발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반가운 오양! 시립미술관은 덕수궁 근처에 있다. 덕수궁 옆 '그 집'에서 콩나물국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침이나 점심이나 이집을 빠글빠글하구나. 11시 개관. 둘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몇 년 만이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듯. 일본, 중국, 우리나라 중등학교 한문 교과서를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란다. 이런 연구논문이 상당할텐데.. 그 중엔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쏠쏠할텐데... 늘 일상에 쫓겨다니느라 챙겨보질 못하는구나. 안주한 걸까? 암튼.. ㅎㅈ이의 논문은 꼭 챙겨봐야겠다. 피카소전을 졸면서 봤다. 역시 무리였는지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전날 본 인상파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작품 수! 평생 엄청난 작품을 남긴 피카소이니까. 그의 사람들과 관련된 작품배치. 재미있군. 여성들.. 화가의 여성들.. 아이들... PAPER에서 '그는 행복했을까'하는 질문을 전시회에 대한 소감으로 남긴 글을 보았는데 작품을 졸면서 봐서 그런지 변하는 감정을 인정하면서 그런 삶을 녹여 작품 활동하면서 '그는 행복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인사동으로 갔다. 그냥 점심먹고, 겨우 농협 찾아 ㅎㅈ이는 등록금 넣고 나는 돈 좀 찾고. 서울역으로 돌아와 차시간까지 팥빙수 먹으면서 수다 떨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돌아오는 열차... 역시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의 창가자리 '운빨'이 떨어진 것이 확실하다. 해가 지는 오른쪽 창가자리를 원했는데 왼쪽에 그것도 칸막이 때문에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열악한 자리다. 내쳐 잠들었다. 8시 반쯤 도착!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고 가족들이랑 휴양림으로 향했다. 이리 저리 흘러다니며 구경하고 쉬고... 간만에 가족들 사이에서 그저 편안했다. 그렇게 24일까지 시간은 잘도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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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겨레 - 20세기 포토 다큐세계사 1.2

 
렌즈로 낚은 20세기 역사
전족, 마지막 황제, 홍위병…중국 희귀사진 300컷
노예사상, IRA, 비틀스…영국의 ‘영광과 좌절’ 담아
한겨레 최재봉 기자
»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1 - 중국의 세기
조너선 D. 스펜스·안핑 친 지음. 콜린 제이콥슨·애너벨 메럴로 사진편집. 김희교 옮김. 북폴리오 펴냄. 5만원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2 - 영국의 세기
브라이언 모이나한 지음. 애너벨 메럴로·세러 잭슨 사진편집. 김상수 옮김. 북폴리오 펴냄. 5만원.
1900년 의화단의 난에 참여했던 네 명의 의화단원들이 양손을 등 뒤로 묶이고 두 눈이 가린 채 머리가 잘라져 나뒹구는 끔찍한 주검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 청나라 군인들이 호위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막 참수형을 끝낸 일본군 장교가 흰 천으로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있다. 스페인 내전 참전 경험이 있는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은 1938년 중국 북부로 들어가 헌신적인 열정으로 항일 공산 게릴라들을 치료하다가 병원균에 감염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1 - 중국의 세기>는 300여 컷의 흑백사진을 통해 중국의 지난 한 세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발가락이 기형으로 뒤틀려 있는 전족의 참상, 1903년 가마에 타고 여름궁전 이화원에 출동한 서태후, 1911년 말 당시 여섯 살이었던 ‘마지막 황제’ 푸이, 공자의 고향인 취푸의 사당 대리석 기둥을 파괴하는 홍위병들, 천안문 시위에 참가한 대학생들의 모습 등 그동안 중국 밖에서는 공개된 적이 없는 희귀사진들에 세계적인 중국 전문가인 조너선 스펜스와 그 부인 안핑 친의 글이 곁들여졌다.

» 전족을 한 중국 여인의 발.
함께 나온 2편 <영국의 세기>는 한때 세계 인구의 4분의1을 호령하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의 영광과 좌절, 전통과 변화를 역시 사진과 글(브라이언 모이나한)에 담았다. 흑인 노예를 사냥해 오는 선상의 모습, 반란에 가담한 버마인들에 대한 잔인한 체벌, 1922년 더블린 시내를 무장한 채 순찰하는 아일랜드공화군(IRA) 대원들, 독일군의 공습을 받은 런던 시내의 폐허 위로 배달할 우유를 들고 가는 남자,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미군에 의해 해방된 영국군 포로들이 환호하는 모습,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유명한 조지 리 맬러리가 1924년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아랫도리를 벗은 차림으로 찍은 사진 등이 흥미롭다. 1918년에 낙타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버지니아 울프와 올더스 헉슬리, E. M. 포스터 등 ‘블룸즈버리 그룹’,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언 리 부부, 롤링 스톤스와 비틀스 등 영국 문화의 영웅들을 만나는 기쁨도 각별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북폴리오 제공

» 1930년대 후반 중국 북부의 공산당 게릴라들 사이에 섞여 불교사원에 임시로 마련한 야전병원에서 수술하고 있는, 캐나다 의사 노먼 베순.
» 1903년께 베이징 서쪽에 새로 지은 여름궁전에서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서태후. 그는 의전용 차양 아래 앉아 앞에 놓인 향로로 정화한 공기를 마시면서 환관들의 보호를 받았지만, 새로운 질서를 용인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것도 그 중 하나다.
» 영국 등반가 조지 리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려 하냐”는 질문에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1924년 그는 에베레스트 산으로 가던 중, 셀프타이머를 이용해 반라의 상태로 자신들을 찍었다.
» 1963년만 해도 비틀스는 리버풀의 클럽에서 연주하던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이었다. 이듬해 여왕은 이들에게 대영제국 훈장(MBE)을 주었다. 버킹엄 궁에서 훈장을 받고 나온 존 레넌의 모습을 브라이언 워턴이 사진에 담았다.

기사등록 : 2006-09-07 오후 07:02:25 기사수정 : 2006-09-08 오후 03:02:17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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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교육
           - 이계삼
1.
김진경 박복선 선생님께

<우리교육> 2월호에 실린 두 분의 대담을 읽고 제법 오랫동안 머뭇거리다 이 글을 씁니다. 저는 경남 밀양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두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대학 시절부터 저는 두 분의 성함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 1학년 무렵 두 분이 함께 엮어낸 <꽃이 사람보다 따뜻할 때>라는 산문집을 통해서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3년 내내 교과서 말고 다른 책을 접했던 기억이 거의 없던 제게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산문’이라는 부제가 너무나 신선했거든요. 그 책에 실린 글들도 참 좋았고, 그래서 그 책을 여러 권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때 저는 박복선 선생님을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선생님일 거라 혼자 상상하기도 했지요). 또 이런 기억도 있네요.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늘 과 학생회실에서 빈둥거리던 저는 선배들이 기타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곁에서 따라부르곤 했는데, 김진경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라는 노래를 처음 듣고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벗이여, 어서 오게나 움푹 패인 수갑 자욱 그대로’ 하는 부분의 그 아름다운 선율과 서늘한 서정이 얼마나 좋던지요. 군대 다녀와서부터는 비록 떨어지긴 했지만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교육>은 도서관 잡지실에서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그 앞머리에 실린 편집장 박복선 선생님의 짧은 에세이를 참 좋아해서 우선 그것부터 먼저 펼쳐 읽기도 했어요.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서신 형식으로 쓰려고 맘먹은 것도 그 대담 기사를 읽으면서 느꼈던 새삼스러운 반가움 때문입니다. 교직에 들어 조금씩 경력을 쌓아갈수록 커져만 가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무언가, 우리 교육이 처한 이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주변에도 제가 마음으로 기대고 또 삶의 사표로 모시는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다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가능성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그분들 또한 이 상황에 대해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담 기사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그 신랄함과 날카로움에 약간의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기사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저 또한 무언가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이른바 ‘밀양 고교생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떠들썩한 소용돌이를 현장에서 겪은 뒤끝이었습니다. 언론에서 익히 보셨을 테지만, 근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이 사회는 밀양의 고등학교들과 지역 사회와 그 속의 ‘패악한 아이들’을 실컷 두들겨 팼습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토론 좀 하자’는 내 속의 열망에 대해선 ‘잠자코 맞고 있어!’라고 윽박지르더니, 분이 좀 풀릴 무렵에는 총총히 다른 곳으로 떠나가더군요. 때린 자나 맞은 자나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커다란 상흔만 남긴 실로 기묘한 한판 소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월, 학교는 언제나처럼 다시 문을 열었고, 저는 ‘비평준화지역 2등그룹에 속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평반(우수반 아닌)’이라는 긴 꼬리표가 달린 학급의 담임으로, 도서관/학교신문 담당자로, 일주일 도합 스물여섯(보충수업, 야간 특별수업 포함) 시간의 수업을 하면서 학교와 집을 오락가락합니다.


2.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저는 야간 자율 학습을 감독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과 차례로 면담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 나눈 열명 중 세명이 편부/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늘 겪는 일이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중학교 내신 성적 50~60%대에 속하는, 그래도 성적향상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어 노동하는 부모들의 ‘고래심줄’같은 돈으로 심야 학원까지 다니지만 모의고사를 치르면 절반을 채 맞추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수시모집으로 부산 경남권의 사립대학에 근근이 입학할, 그래도 졸업하고 10년쯤 뒤에는 파출소 순경으로, 포크레인 기사로, 국밥집 젊은 사장으로 스승의 날 꽃다발을 들고 옛 담임을 찾아오기도 하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아이들을 하나 둘 번호 순으로 복도로 불러내 공부 방법을 조언하고, 신상의 변화를 물으며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고등학교 1학년, 중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아이들은 수줍어 말이 없습니다. 혼자만의 이야기끝에 녀석들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다가 어찌할 수 없는 애틋함에 손등에다 제 손을 포개어도 봅니다. 이 아이들 중 또 얼마는, 주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 테지만, 가난과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는 결국 ‘즐기고 저지르는’ 어떤 삶의 길에 접어들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제가 근무하는 이 조그만 시골 고등학교 안에도 남김없이 아로새겨진 이 세상의 모습을 느낄 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학교와 세상의 담장은 완전히 허물어져버려서 우리는 ‘학교’ 아닌 ‘세상’ 속에서 근무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학교 안에는 이른바 ‘교실 붕괴’라는 교육적 불가능이, 입시라는 꼭지점을 향한 가없는 질주가, 천박한 중산층 의식에 깊이 물든 교사 집단의 안일과 무기력이, 초고속 성장의 단물을 흠뻑 빨아들인 소비문화의 광풍이, 풍요와 빈곤, 이 둘로 딱 쪼개진 한국의 경제가, 양심과 도덕을 제멋대로 조롱하는 타락한 한국 사회가 모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교 안에 자리잡고 있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더니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굉음을 내며 분출합니다. 가까이는 작년 연말의 대규모 수능 부정행위 사건과 우리 지역 아이들의 성폭행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만성질환자가 되어 잠시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새 제 자리로 주저앉습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가 거기 있고 성장기 아이들이 12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다가 스무살이 되어 빠져나오는 것만이 분명할 따름, 이제 우리 교육의 장에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3.

선생님. 최시한 선생의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겠지요. 저도 그 소설의 주인공 선재처럼 전교조가 결성되던 1989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해직된 선생님이 나오진 않았지만, 한동안 온 학교를 팽팽하게 감돌던 그 긴장된 공기와, 몇몇 젊은 선생님들의 긴장된 결연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사회의식이란 전혀 없는 촌무지랭이였지만, 저는 그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선배들이 저희들을 ‘전교조 세대’라고 불러주더군요. 눈물이 흔한 편이기도 하지만, 저는 학교 민주광장에서 전교조 결성 전후를 기록한 사진전을 둘러볼 때마다, 거리 집회 와중에 대오 한편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뛰어나오는 해직교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가르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면, 싸우는 것도 가르치는 것이리라’던 백무산 시인의 싯구절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때 선생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하고 약한 자들의 번민과 그것을 뚫고 나온 용기는 늘 보기 애처로웠습니다만 그것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전교조 교사! 나도 저런 존재가 되리라, 마음 속 깊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도종환 선생님의 시가 있었습니다. ‘나뭇잎 냄새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밖 햇살이 교실에도 가득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것’. 돌이켜보면, 전교조 선생님들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은 20대 초반의 제 위태로운 자의식을 지탱해준 최선의 도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또한 전교조 교사로 살아갑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여전히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밀양지회에서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선생님들은 건강하고 부지런하며, 또한 정의롭습니다. 올해 초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내내 발을 동동구르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던 것에서 보듯, 전교조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순수한 조직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립니다. 과연, ‘지난 16년간 전교조는 아이들의 영혼의 성장과 자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혹은, ‘전교조는 지난 16년간 이 땅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크기를 얼마만큼 줄여주었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자명하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전교조는 10만의 조합원에 전임 상근 활동가들의 인건비로만 연 50억원을 지출하는, 시민사회의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집단이 되었지만, 교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갑니다. 두 분 선생님이 대담에서 거듭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 교육운동은 지난 십수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다만 방황했을 따름입니다. 그 방황의 뚜렷한 증거는 작년 전교조 위원장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거에서 대립했던 주장은 평범하게 요약하자면 전교조를 ‘아래로부터 복원하자’는 입장과 ‘강력한 투쟁을 통해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당혹스러웠던 것은 이 주장들이 모두 ‘교실 바깥’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을 뿐, 정작 ‘교실 안’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두 입장은 제겐 한 사물의 다른 두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두 입장은 모두 ‘전교조 복원’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의 차이를 지나서 결국 같은 결론-교육공공성 수호-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전교조 조직 복원을 통해 교육공공성을 둘러싼 참호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이것이 ‘교실 안 아이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때 어느 책에서 읽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아마 선생님들도 아시겠지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곳은 거친 땅이고, 반대편은 좋은 땅입니다. 결국 누군가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넙니다. 그런데 그는 뗏목이 너무나 소중한지라 강을 건너 산길을 가면서도 뗏목을 이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뗏목을 이고 가지요?”라고.


저는 이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이 바로 지금 전교조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교조 운동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커다란 덩치의 조합 대중조직 ‘전교조’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전교조는 아이들의 변화를 교육적 성과로 이어가는 일보다는 스스로의 존립과 유지에 더 큰 동력을 쏟아부어야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자면 이런 이야기겠지요. 전교조는 아이들에 대한 교사의 사랑에 기초한 조직입니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힘과 싸우기 위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조직(시스템)에 자신의 교육적 열정과 사랑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면이 없는 물질이므로, 물질은 자신의 운동법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전교조가 구축한 교육운동 시스템은 그 속에 담긴 교사들의 교육적 양심, 사랑과 뒤섞여 존재하지만, 물질이 정신을 밀어내는 인간사회의 법칙 속에서 시스템은 결국 어느 순간 자기 존재를 위해 운동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전교조는 지금 교육운동의 한 뗏목이 되어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요. 전교조는 교육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그래서 대개의 양심적인 교사들은 전교조에 기대는 것 이상의 교육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정작 이 조직은 자기 존립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 말입니다. 결국 전교조는 모든 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틀로 ‘교육 공공성’을 설정했지만, 실제 이것은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으로 결과한다는 김진경 선생님의 주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 빙자해서 교장하고 월급 타먹는 운동’으로.


4.
선생님. 교육운동의 경험이 일천한 제가 운동조직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다만 ‘가난’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 정신이 가장 온전하게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이라고 믿습니다.


이 땅의 아이들은 ‘가난’했던 시절에 가장 아이다웠고 아름다웠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사회의 경제 성장 이후로부터 아이다움을 잃었습니다. 교육운동은 ‘힘’은 없었으되 열정과 사랑만으로 존재했던 시절 가장 강력했고, 그 ‘힘’을 갖춘 지금 가장 무기력합니다.


아이들은 왜 변했는가. 학교는 왜 붕괴되어 가는가. 왜 교육운동진영은 방황하고 있는가. 저는 결국 이 모든 현실을 ‘경제 성장’이라는 물질 환경의 변화의 산물로 여깁니다. 아이들의 변화는 김진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디지털 문화의 확산으로) ‘이성의 의지’가 약해지고 ‘몸의 의지’가 강해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만 경제적인 풍요가 낳은 정신의 타락을 흡수한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요즘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사유의 깊이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를 가능케하는 ‘결핍’의 요소가 덜해졌기 때문에 그러할 뿐, 아이들은 지금도 스스로 결핍을 느끼는 요소-우정,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맹렬하게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낍니다)


전교조의 성장은 물론 그간 치열했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단체교섭 등을 통한 교사 집단의 물질적 환경 개선이 더 크게 작용했고, 이는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이 정치적 상부구조의 개선을 추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경제 성장 자체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리고 ‘빈곤’이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있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즉 ‘빈곤’을 ‘가난’으로 풀어가야 하는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가난’ ‘결핍’ 혹은 ‘힘없음’에 대해 성찰하고 연민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교육 이전에 삶이 붕괴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뚜렷한 경향에 대해 집중하는 길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육>이나 매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안학교나, 혹은 매우 합리적인 질서가 정착된 공교육 속의 학교들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안 학교는 100억원이나 되는 자금과 비판적인 교양인 양성이라는 이념까지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교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비교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미학적 고려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건물에서부터, 속물적인 교육관, 비평준화 지역의 맹렬한 경쟁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청춘을 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이 학교에 대해 회의를 느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학교의 아이들이 학교에 오는 이유가 그저 ‘친구들 만나고 급식먹는 것’ 뿐이라 할지라도, 입시 교육에 짓눌려 기계적인 교수․학습을 반복할지라도, 그 속에 가난한 아이들끼리의 평등과 우정의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반면교사처럼 이 억압적인 삶에 대한 성찰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면, 자신들의 ‘빈곤’이 배려되고 보듬어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교육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적 성장’을 위시하여 개인 단위의 ‘성장’ 개념에 대해 갈수록 회의하게 됩니다. 교사는 다만 ‘우정’을 위해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육운동의 생산적인 담론은 무엇일까요? 우선 저는 전교조를 위시한 교육운동 진영이 ‘가난’과 ‘결핍’ 그리고 ‘힘없음’을 스스로 선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라는 고추상적인 담론, ‘교육공공성’이라는 현재로서는 중산층의 가치에 기울어진 논리보다는 그저 우리 사회의 가장 가난한 현실을 부여안는 것이라 믿습니다. 가난에 대한 성찰, ‘빈곤’을 ‘가난’으로 보듬어안는 교육, 중산층의 자기 한계를 넘어 가난한 자들과 연대했을 때 우리 교육운동이 그 아름다움을 회복할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박복선 선생님이 대담 가운데서, 그리고 ‘하자작업장’ 소개 등을 통해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교육관에 대해 부담을 느낍니다. 이것은 결국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부 중산층의 교육관을 실현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요. 그런 교육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과 어떤 연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너무 편협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를 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아이들의 분방하고도 거침없는 자기 표현보다는 무엇에든 서툴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이웃에 대한 고운 연민이 제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5.

선생님. 글을 써 놓고 보니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제 스스로 막연한 느낌으로만 가두어두었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펼쳐놓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펼쳐놓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대담에서 던진 이야기들이 실마리를 던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우리 교육이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즉 전교조 결성 초기의 선한 열기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그 시절 제가 보낸 고교 3년을 회상하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몇몇 젊은 선생님들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일생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나중에 여쭈어보았더니 그 무렵이 교협에서 전교조로 넘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전 영어 수업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거의 않던 분께서 흑판에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는 시를 쓰고 고요히 우리들에게 이 시의 속뜻을 물으셨을 때, 아이들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서 수학 문제를 못 풀면 엄격하게 체벌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날 수업시간에 1970년대와 전태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때, 우리 학교에서 평교사 협의회의 핵심으로 소문난 어느 선생님이 빈 수업 시간 교정 스탠드에서 골똘히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이 그 3년의 모든 암울한 기억에 값할 만큼 소중한 가르침으로 남았습니다. 그 시절 그분들은 아무 힘도 없었고, 학교는 말할 수 없이 억압적이었으며, 우리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넘어서는 귀한 배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과 ‘결핍’, '힘없음'이 빚은 진실한 아름다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힘’과 ‘시스템’이, 혹은 탈근대적인 담론으로 정연하게 완비된 어떤 틀도 결코 좋은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교육은 그저 땀이자 숨결이고 사랑일 뿐, 그 정신의 가난함 외의 어떤 완숙한 물적 조건도 부차적이며, 오히려 해악일 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한 선배 선생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 겸연쩍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들의 생각의 핵심을 잘못 짚고 이야기한 것이라면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목말라했던 사람은 아마 저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고민이 우리 교육의 장에서 한 의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겁도 없이’ 이 무모한 글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 제게 던진 소중한 성찰을 내내 간직하겠습니다. 언제나 몇 발 앞선 자리에서 우리 교육의 길을 열어젖히고자 애태우시는 선생님들의 열정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두 분 선생님들께 반가움과 고마움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월간 우리교육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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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9-15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교육청 앞에서 '성과급 반납 결의대회'가 있었습니다. 약 200명 정도의 선생님들이 왜 성과급에 반납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0교시를 없애면 9교시가 생기고, 보충수업-특기적성교육활동-보충학습-방과후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수당이 올랐을 뿐, 나눠먹기식 아이들 의사와 관계없는 수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사의 월급이 너무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전교조가 참교육을 잃어버리고, 제 몸 추스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오지랖이 넓다는 비판은 일견 옳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정책과, 대북 정책과, 교육과, 월급은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교사 월급 낮추는 법은 방학때 월급을 안 주는 계약제로 전환하면 됩니다. 곧 할 것입니다. 성과급도 실시될 것입니다. 학교 자치도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아이들은 수능,논술,내신의 트라이앵글에 치이고 있는데, 학교란 틀이 어떻게 바뀌든 교사에 대한, 전교조에 대한 비판은 <국민>의 의사란 허울을 쓰고, <자본>의 의도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내 온 존재를 내걸고 참교육의 함성으로 만든 우리의 조직이 건강해 지기 위해서...
김진경씨의 비판도 들어야 합니다. 전교조는 겸허하게 듣고 투쟁의 날을 새로 갈아야 할 것입니다.
비판의 싹에서 건강한 조직이 살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