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언어의 살갗’으로 도피했다 만난 동성애/김영민
금욕적 삶을 택한 비트겐슈타인 41살엔 21살 스키너에게
58살엔 19살의 의대생에게 빠져 ‘위대한 선물’을 어쩔줄 몰라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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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⑤ 비트겐슈타인의 애인들

지식인들은 종종 사랑의 직접성을 포기한다. 그 상태가 굳어지면서, 예를 들어 그들은 영영 강간을 못한다. 그들이 가끔 제도 속에서 벌이는 강간극은 실외의 환상이 빚은 문화(文禍)의 불능을 반증할 뿐이다. 어쨌든 강-간을 못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며, 주류 인류학의 일반적 설명처럼 그들은 그 문명의 비용을 치른 뒤 언어에(그것도, ‘심오하게’) 탐닉한다.

일부 지식인들이 언어에 탐닉하는 것은 연인의 살에 탐닉하는 것을 방불케 한다. 가령, 체색을 바꾸면서 구애와 교미의 신호를 보내는 오징어들은 살이 곧 언어인 셈인데, 이와 대조적으로 살과 말을 기능적으로 분화시킨 지식인들의 이중성은 그 자체로 문명의 정화(精華)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오징어의 변색에서부터 <춘향전>의 염언색담(艶言色談)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도르노는 자신의 독서 체험을 통해 간결하게 정리한다: “외국어로 포르노 책을 읽는 사람은 섹스와 언어가 얼마나 내밀하게 서로 교차하는지를 배우게 된다”(<미니마 모랄리아>). 아도르노가 독서체험 속에 언어와 에로티즘이 교차하는 지점을 짚어 주었고, 오징어는 살이 곧 말이라는 점을 원형적으로 일러주었다면, 바르트는 거꾸로 말이 곧 살이라는 사실을 보인다: “언어는 살갗이! 다…나는 그 사람(연인)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사랑의 단상>).

거꾸로, 말은 살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가령 바르트는 사랑의 상처를 피하여 심오하고 추상적인 학문 속으로 도피하는 지식인을 말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축축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건조하고 추상적인 학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신의 지적 정체성을 간신히 건사하는 지식인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마치 ‘파리에게 파리병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비트겐슈타인) 같은 심사로 그들은 연애를 향해 ‘외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자인 말콤(N. Malcolm)의 회상에 따르면, 강의를 마친 비트겐슈타인은 즐겨 영화관의 좌석 맨 앞줄에 앉아 스크린 속에 시선과 정신을 온통 쏟으며 당일의 지적 긴장을 잊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그였지만 여가 시간이면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탐닉했다고도 한다.

그를 좋아했던 이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결벽의 천재에게 고양이의 방울을 달려고 했던 이는 핑크(Barry Pink)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달 전, 비트겐슈타인의 각별한 호의와 나이(61세) 탓에 조금은 물러진 그의 성벽에 기대 핑크는 그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당신의 연구, 혹은 당신이 철학자의 삶을 사는 것이 당신의 동성애와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물론 핑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성깔머리를 과소평가했고, 그 질문은 혐오스레 무시되었으며, 그 누구도 다시 묻거나 거론하기를 꺼렸다.

핑크의 질문은, 특히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본성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경향에 대한 토론 속에서 우연히 나온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 혹은 사랑이 희랍의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엄정한 그의 상징적-철학적 가면을 폭로하는 지점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호사가적 폭로심리는 불모의 것이다. 우리네 삶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946년, 분단의 조짐이 역력했던 한반도에서 몽양과 우사 등이 좌우합작에 분투하고 있던 때, 58세의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의대 학부생이었던 벤 리처드(Ben Richards)와 생애 마지막 사랑의 합작에 열심이었다. 스스로 벤과의 사랑을 ‘위대하고 희귀한 선물’이며,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조만간 그를 잃게 될 것이라는 번민에 빠지곤 했다: “아, 도착하지도 않는 편지를 계속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당시 벤은 19세, 둘의 나이 차이는 거의 40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벤과 간헐적으로 동거에 들어가는 등, 그 마지막 염화(艶火)에 제법 열정적이었고, 이것은 1951년까지 큰 곡절없이 계속된다. 1951년 3월 1일, 벤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안스콤(E. Anscombe), 스마이시스(Y. Smythies), 드루리(M. Drury) 등도 합석했다. 그것은! 철학사의 뒤안길에서 엿볼 수 있는 참으로 묘한 자리였을 것이다.

21세의 남학생 프란시스 스키너(Francis Skinner)와 사랑에 빠진 것은 1930년, 비트겐슈타인의 나이 41세 되던 해였다. 아카데미아의 속물주의를 염오했던 그는 젊은 프란시스에게서 어린애 같은 순박함과 예리한 두뇌 그리고 맹목적인 헌신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그의 전기철학으로 대변되는 지적 염결주의와 쾌락불안의 대체물을 희구했다. 스키너와의 성관계를 언급한 유일한 경우에서 그 행위의 자괴감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성벽과 기질, 취향과 철학적 태도로부터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그에게 여성혐오가 보다 노골화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노릇이겠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고, 수도자와 같은 여건 속에서 신비주의자의 아우라를 달고 다녔으며, 20세기의 볼테르였고 자유연애주의자였던 스승 러셀에게 종교를 권유하기조차 했던 비트겐슈타인이 금욕주의적 외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그렇기에, 그의 인종(‘음탕한 유대인’이라는 스캔들)과 함께 그의 동성애적 취향은 그에게 자가당착의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이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의 일상언어분석적 후기철학마저 당대의 정치성을 비켜갔던 것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솔직하고 까탈스러웠던 천재는 솔직할 수 없었던 삶의 부분을 힘들게 억압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철학적 언설을 뱉어놓았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의 애인들이 겪었던 그 분열의 후유증은?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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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성공회대학교

‘별’들이 번쩍거리는 대학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 치른 이들을 교수로 대거 임용… 오히려 가산점 줘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다른 대학들이 ‘성향’과 ‘과거’를 문제 삼으며 교수 임용에서 삐딱한 시선을 보낼 때, 성공회대는 반대로 ‘삐딱이’들에게 가산점을 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성공회대를 이끌어가는 교수들 중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별’을 단 이들이 여럿이다.


△ '별'을 단 성공회대 교수들. 박성준, 이영환, 조희연, 이종구, 권진관, 임규찬 교수(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성공회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복역을 한 양심수는 신영복 교수(사회과학부·민주사회교육원장). 그는 1968년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지금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이기도 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이 고난의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 신영복 교수 외에도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이던 통혁당 사건으로 당시 4·19 세대 및 진보적 인사들이 많이 잡혀들어갔는데, 한명숙 의원의 남편이기도 한 박성준 교수(NGO학과)도 이때 구속됐다.

이후엔 1970년대 초기 대학에 입학한 ‘민청학련 세대’가 있다. 이종구 교수(51·사회학과)와 권진관 교수(52·신학과)는 1974년 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돼 1년 가까이 옥살이했다. 권 교수는 이후 1979년엔 명동 YWCA 위장결혼 사건을 기획한 혐의로 다시 투옥돼 1년 이상 형을 살았다. ‘민청학련 세대’에 이어 1970년대 후반 학번들은 긴급조치 세대, 곧 ‘긴조세대’라고 불린다. 조희연 교수(48·사회과학부)와 이영환 교수(47·사회복지학과)는 1979년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돼 ‘긴조세대’ 동지가 됐다.

1990년 10월 국가안전기획부는 6·25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사노맹)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으로 백태웅·박노해 등 50명이 줄줄이 걸려들었는데, 이 와중에 카프 및 프로문학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임규찬 교수(47·교양학부)도 이에 얽혀 구속됐다.

성공회대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서울에서 없는 게 가장 많은 대학교, 그러나 골리앗 대학들이 부럽지 않은 그들만의 비밀


성공회대는 작다. 서울에서 없는 게 가장 많은 대학교이다. 하지만 서울의 골리앗 대학들이 부럽지 않은 점들이 많다. 왜 그럴까. 성공회대가 잘나가는 비밀을 알아보았다.


▣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 대학엔 없는 게 많다. 교문, 담, 교수식당, 총장 판공비.

일부러 없앤 게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것도 많다. 가령 욕심 없기로 이름난 총장조차도 이것만은 꼭 갖고 싶다 했다. 샤워실이 딸린 체육관.


△ 사제간 친밀감의 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성공회대 총장인 김성수 대주교가 학교 대동제 기간 동안 학생들과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격의 없이 어울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장 작은 종합대학교. 13개 학과에 학생 수 2천여명, 교수 72명에 직원(정규직)은 20여명에 불과하다. 재정과 조직 면에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정말, 규모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근 이 학교의 활동을 눈여겨 들여다보면 진짜 그렇다.

외부평가, 몇년새 알짜배기 성적

종합대학교로 출범한 지 올해 10돌을 맞은 성공회대학교는 외부평가에서 몇년새 내리 알짜배기 성적표를 받고 있다. 특히 성공회대의 강점 분야인 사회복지·사회학과는 전국에서 수위를 다툰다. 지난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2002년도 학문분야평가’ 결과 성공회대는 서울대·이화여대와 함께 사회복지 분야에서 ‘최우수’(100점 만점에 90점 이상)를 받았다. 사회학과도 교수 1인당 연간 3.13권의 단행본을 단독·공동으로 출간해 저서 실적에서 1위에 올랐고 해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 수(2위), 2000~2002년 기준 교수 1인당 외부 지원 연구비(3위), 학술발표(6위), 등록금 대비 장학금 환원율(5위·17%로 1위는 서울시립대 26%임)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강세를 보였다. “교수 수만 더 늘어난다면 연구·강의 면에서 아시아 최고의 사회학과가 될 것”이라는 이 학교 김동춘 교수의 자신감도 괜한 것이 아니다.

돈과 조직과 권위를 갖춘 골리앗 학교들 가운데 ‘틈새’를 노리는 게릴라 전략은 작고 힘없는 학교가 선택한 최선이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를 움직여온 시민사회단체의 눈부신 성장을 눈여겨본 성공회대는 1998년 국내 처음으로 NGO대학원을 설립해 활동가들이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2004년엔 서울연극제 등 굵직한 행사를 꾸려온 기획자 강준혁씨를 초빙해 예술경영·문화기획 등을 가르치는 문화대학원이 문을 열었다. 2002년 개설된 신생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는 국내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뒤 할리우드에서 게임 및 그래픽업계의 독보적 지위에 오른 윤용기씨를 교수로 임용하는 파격 인사를 하기도 했다.

국내 유수의 대학들이 돈을 주고라도 미국의 대학들과 교류하고자 분주할 때 학생들의 해외진출을 지원하는 성공회대 글로컬센터는 중국·일본을 비롯해 인도·러시아 등에서 공부하며 학점을 따고 어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교수들의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이 빚어낸 결과일 텐데, 민주화운동자료관·사이버NGO자료관·인권평화센터·민주사회정책연구소·민주사회교육원 등은 우리 사회 인권·평화·민주화와 관련한 자료조사·연구·교육·정책생산의 거점 기지다. 교수들은 “조직이 작은 만큼 의사결정도 빨라서 교수가 원하는 강의와 필요한 프로그램 등을 신속하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 '신영복 함께 읽기' 강의 장면. 신영복 교수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외부 청강생도 많다.

일꾼들이 모이는 학교로 자리잡다

김성수 총장은 10년 전엔 “(학교 성적이 시원치 않은) 우리 아이는 성공회대나 보내야겠어요”라던 학부모들이 이제는 “성공회대를 어떻게 해야 보낼 수 있을까요?”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학교 평판이 높아진 것은 학교가 잘해서만은 아니다.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우리 학교의 막강한 교수님들이 그동안 언론을 휘어잡았다”며 껄껄 웃는다.

‘참여정부, 잘하고 있나’ ‘8:2 사회, 이대로 문제없나’ ‘군 징병제 대안은 없나’ ‘미디어 긴급진단’ 같은 TV토론·신문지상토론·칼럼 같은 꼭지엔 성공회대 교수들이 단골 출연하는 일이 잦다. 조희연·김동춘·정해구(이상 사회과학부)·조효제(NGO대학원장)·이영환(사회복지학과)·권혁태(일어일본학과)·이남주(중어중국학과)·김창남·김서중(이상 신문방송학과) 교수 등 언론이 반기는 교수들이 많다. 성공회대 교수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들이 유독 언론과 ‘코드’가 잘 맞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 또는 이슈가 터질 때마다 내놓는 제언이 ‘유의미한 기삿거리’가 될 수밖에 없도록, 그만큼 우리 사회의 정치 지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간극에서 ‘진보적 시민운동’라는 이름을 걸고 태어난 시민사회단체들은 성공회대 교수들이 강단 밖에서 활동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런 공간에서 발을 딛고 ‘현실참여’ 활동을 하는 교수들이 어느 대학보다도 많은 곳이 성공회대다. ‘주류’ 시민운동단체로 자리잡은 참여연대만 보더라도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조희연),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이영환) 정책위원장(김동춘) 등 중요한 위치의 전·현직을 성공회대 교수들이 맡고 있다. 특히 참여연대뿐 아니라 학술단체협의회·한국산업사회연구회 등 각종 학술단체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조희연 교수는 학교에 아침 일찍 출근해 늘 뛰어다닌다고 하는데, 그는 신영복 교수로부터 좀 쉬라는 뜻으로 ‘善事不如省事’(일을 잘하는 것이 일을 살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라는 고사성어를 받기도 했다. 이 밖에도 <아웃사이더>(김동춘), ‘베트남전진실위원회’(한홍구) 등에서 일하며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내는 교수도 여럿이다. 단 아직까지 ‘현실정치 참여’는 이재정 전 총장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성공회대는 이런 일꾼들을 어떻게 모았을까? 이들은 대학 안에선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들 사이에 유행했던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가끔씩 교수들이 모이면 성공회가 예전엔 부동산이 많았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요즘 그 땅이 있다면 학교가 참 발전했을 텐데’라고 누군가가 아쉬워하자 그 옆의 교수가 냉큼 받아쳤죠. ‘그러면 넌 안 뽑았어.’” 그의 설명에 따르면, 70~80년대 암울한 시대를 거치며, 젊고 유능한 사회과학도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됐는데 다른 대학에선 이들의 비판적 학문 태도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때 성공회대가 앞장서 이들을 받아줌으로써 자연스럽게 동질적 성향의 학자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있을 뿐이지 뭘”이라며 ‘쿨’하게 말했으나 사실 우리나라 대학에선 딴 목소리 낸다고 간섭받거나 왕따당하는 일이 잦다.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TV토론회에 한홍구 교수가 출연하고 난 다음날, 해병전우회 소속이라고 밝히며 “거 양심 운운하는 얼굴 넓적한 놈이 누구야?”라고 학교 당국에 막말 전화를 걸어와도 초연할 수 있는 학교란 흔치 않다.


△ 성공회대 성당.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 무늬의 십자가가 타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상징한다.

부총장이 겨우 조교수?

한편으론, 교수들이 일을 안 할 수 없게 만드는 곳도 성공회대다. 학교가 작다 보니 교수로 임용된 뒤 5년 지나서 학과장은 물론이며 ‘처장’ 같은 보직을 안 받아본 사람이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양권석 교수는 부총장으로 임명됐을 때 ‘조교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학교가 꼭 일을 시켜서 바쁜 것만도 아니다. “사실은 다 자기가 하고 싶어 저지른 일”이라는 김동춘 교수의 말처럼, 교수들은 조용히 강의만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NGO학과 같은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거나 민주사회교육원·사회문화연구소 같은 부속연구기관을 만들어 외연을 넓혀가고자 하는 것이다. 학부생 강의 말고도 대학원과 각종 연구소 등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연구를 진행하다 보니 3명의 교수가 해야 할 일을 교수 1명이 도맡게 된다. 그래서 양권석 부총장은 “우리 학교는 돈으로 커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조직의 규모가 작으면 사람들 사이 친밀감의 농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학교에선 그 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성공회대를 한번쯤 방문한 사람들은 놀란다. 총장과 학생들이 서로를 너무나 스스럼없게 대하기 때문이다. 마침 대동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김성수 총장이 지나가자 한 학생이 파전을 부치던 부침개를 휘두르며 손짓한다. “총장님, 저희 장터에 와서 놀다 가세요.” 김 총장이 자리에 앉자 학생들은 곧장 막걸리잔을 채운다. 어떤 여학생은 총장님과 팔짱을 끼고 휴대전화로 찰칵~ 사진을 찍는다. 김 총장은 점심 때면 아예 식권 무더기를 들고 다니며 ‘밥 먹었냐’고 챙긴다. 교직원들은 “애들이 총장님을 ‘봉’으로 아는 것 같다”며 “지난 5월엔 판공비도 없는 총장이 학생들에게 밥을 너무 많이 사주다 카드가 구멍이 났다”고 속상해한다.


△ 성공회대 도서관 풍경. 성공회대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2002년도 학문분야평가’ 결과 서울대 · 이화여대와 함께 사회복지 분야에서 ‘최우수’를 받았다.

총장님이 아무리 학생들의 응석을 잘 받아준다고 해도, 교수들의 학사관리는 엄격한 편이다. 전공 과목은 물론 교양강의조차도 수강생이 50명 이하로 제한돼 교수와 학생은 “서로 눈을 맞추며” 공부를 한다. 다른 대학을 다니다 1년 전 이 학교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학한 4학년생 주명철씨는 “선생님들과 학생들간에 거리가 없어 공부가 즐겁지만 조별 발표를 비롯해 숙제는 훨씬 많다”고 말한다. 이 학교에서 몇년째 학생들의 강의 평가에서 1등을 한 김동춘 교수는 엄격하고도 자상한 선생으로 이름높다. “우리 학교는 민주노동당·학벌없는사회(*이름 정확히) 운동 등 바깥에서 활동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개중엔 수업에 충실한 애들도 있고 소홀한 애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결석 5번 하면 F를 준다. 하는 일과 관련된 공부인데 열심히 해야 할 책임이 있을뿐더러 요즘 운동이 예전처럼 목숨 걸고 하는 투사형 운동도 아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처럼 공부 잘하는 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태반이 고시공부하는 애들을 붙들고 ‘계급론’을 수업하는 것 역시 고역일 것”이라며 열의 있는 학생들을 키워나가는 것이 보람이라고 말했다. 이종구 교수(사회과학부)도 “보통 수능 등급으로 볼 때 3~4등급 학생들이 입학하는데, 고등학교 때 수능 등급 1, 2개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생들은 4년 동안 굉장히 많이 변한다. 유능한 학생들이 많이 가는 큰 대학에 투자해야 우리나라 대학이 산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론 작은 대학에서 학부 교육을 충실히 해서 개개인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1960년대 중반 미카엘신학원 시절. 3년 과정으로 성공회 사제를 길러내던 이 학교는 노동을 중요한 배움의 과정으로 강조했다.(사진/ 성공회대학교 제공)

학풍이 우리를 지켜주리라

그러나 성공회대의 앞날에 대해 모두가 낙관하는 것만은 아니다. 40~50대 초반의 교수들이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체력과 열정으로 버틸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70~80년대라는 특정 시대 속에서 성장한 지금의 교수진 이후에도 지금처럼 능력과 열정을 겸비한 학자들이 계속 성공회대로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다. 돈이 없다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결정적 단점이다. 학교에서 벌여놓은 각종 연구소와 부속기관들의 재정 지원이 충실해져야, 교수들의 학문적 성과와 활동이 학교를 구심점 삼아 안으로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14년 미카엘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지 90년, 종합대학교 승격 10년. 이제 성공회대학교는 다시 한번 투자와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수들은 이제껏 견지해온 학풍의 힘을 신뢰한다. “또 다른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게 하는 것이 진보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우리 대학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관점을 뒤흔들어 새로운 의미를 재발견하는 지식을 만들어왔다. 이것이 우리 대학의 학풍이다. 이 학풍이 우리를 지켜줄 때 우리는 계속 흥미진진한 도전을 할 수 있다.”(고병헌 교수·교양학부)

그 강의엔 독특한 향기가 난다

‘군대와 사회’ ‘한국생협의 이해’ 등 다채로운 커리큘럼… 노동운동가 · 가수도 강사로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1970~80년대 혹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점조직으로 구성된 지하서클에 숨어서 사회과학 세미나를 했던 ‘선생’들은 들끓은 지적 욕구를 ‘음지’에서 풀어놓던 그 세월을 잊지 못한다. 그래선지 ‘제도권 선생’이 되고 나서도 교수들은 학생들이 ‘양지’에서 원없이 공부하도록 멍석을 열심히 깔아놓았다. 수강편람을 펴보면 이 대학에서만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강의들이 가득하다.

한홍구 교수가 이끄는 ‘군대와 사회’는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강의다. 이제까지 쿠데타 같은 사건이나 장군 중심의 인물사 위주이던 군대사회학을 우리의 일상으로까지 지평을 넓혔다. 학생들은 자신의 군대 체험을 발표하고 사병 인권의 현실에 대해 토론한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문제, 양심적 병역거부 등 첨예한 이슈를 공부하며 군대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세밀하게 탐구한다. 또한 한홍구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주말마다 근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방문하는 ‘문화유산 탐방’도 인기 있는 강의다. 비무장지대(DMZ) 순례, 매향리 갯벌 탐사를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시위처럼 현재진행형 역사를 체험한다.

‘신영복과 함께 읽기’는 성공회대의 고전 강의다. 노자·장자 등 매 학기마다 텍스트를 바꿔가며 강의한다. 성공회대 학생들뿐 아니라 신영복 선생의 향기를 느끼려는 외부 청강생들도 북적이는 강좌다. 94학번으로 성공회대에 편입해 지금은 홍보 담당 직원으로 일하는 이세욱(34)씨처럼 자청해서 두세 학기를 내리 수강하는 마니아들도 적지 않다.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에 대해 주시하는 학교답게 비정부기구(NGO)와 관련한 특별 메뉴도 풍성하다. ‘NGO인턴십’ ‘NGO 이해 및 NGO 만들기’에선 이론과 함께 실질적인 경험을 수련한다. 자본주의적 질서와는 다른 대안적 생활이념을 뿌리내리기 위해선 구체적 실천이 중요한 법. ‘한국생협의 이해’는 대안유통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강좌다.

성공회대 또한 기독교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므로 기도모임(채플)도 빠질 순 없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양권석 부총장의 말에서도 짐작하듯, 일방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시간만은 아니다. 학생들은 교회음악·연극·영화·영어예배 등 13가지 다양한 선택권을 누리며 기독교 정신을 이해하게 된다.

졸업하기 전에 꼭 들어야 하는 기초·필수 과목들도 이 대학의 성격을 말해준다. 교양필수인 ‘인권과 평화’는 같은 이름의 여러 강좌가 개설돼 민족, 인종간 평화와 지구촌 사회와 인권, 인권과 사회복지, 여성과 인권 등 특정 주제를 선택해 들을 수 있다. 교양필수 2학점인 ‘사회봉사’도 건너뛰면 안 된다. 비영리 복지단체 또는 시민·사회·여성단체 등에서 반드시 10주 이상 총 30시간 봉사활동을 해야 졸업장이 나온다. 여름방학 중에 총학생회가 인솔하는 농활에 7일 이상 참가해도 1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전임교수가 미처 다룰 수 없는 영역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가 초빙된다. 노동운동가 박석운씨의 ‘일하는 삶의 세계’, 가수 이지상씨의 ‘노래로 보는 한국 사회’ 등은 현장의 경험이 생생한 목소리로 담겼다.

“우리의 이념은 기독교 사회주의”

성공회대학의 초석을 닦은 이재정 신부… “1명의 지도자가 아닌 10명의 동반자를 길러낸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민주화운동가 · 사제 · 정치인으로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아온 이재정 전 총장은 특유의 추진력과 결단으로 색다른 대학을 만들었다.(사진/ 박승화 기자)

성공회대학의 초석을 닦은 이재정 신부(60·열린우리당 전 의원)는 대학 재직 당시 모두 세 차례의 총장 취임식을 가졌다. 1988년 성공회신학원의 총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1993년엔 성공회신학대학의 총장, 1994년엔 종합대로 승격한 성공회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세가 적은 교단의 하나인 성공회교의 사제를 길러내는 작은 신학교를 오늘날의 튼실한 종합대학교로 가꿔내기까지 이재정 신부가 흘린 소금땀, 비지땀의 내역은 보통 사람의 머리와 가슴으로선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성공회대의 정주영!

특유의 ‘더운피’ 때문이었을까, 비전 있는 총장이자 존경받는 성직자로 만족했을 법도 한데, 2000년 그는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교직원들을 뿌리치고 학교를 떠나 정치권으로 향했다. 민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해 16대 비례대표 의원을 지내며 2002년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도 앞장섰다. 그러더니 지난 1월엔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한화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3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진위야 어쨌든 신부로서 ‘검은돈’에 엮여 수사를 받고 창졸간에 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으니, 흡사 빠른 속도로 내리닫는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민주화·투명화 과정에서 겪는 개인의 고통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그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물론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마자 사제직을 반납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고통스러운 표정이 잠깐 스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대한성공회에 사표를 냈고 의원직도 그만뒀지만, 그에겐 여전히 사제와 정치인이란 두 가지 정체성이 겹쳐 있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할 사제로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사소한 허물이라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자금의 단순한 전달자가 영수증을 안 받았다고 해서 유죄라는 것은 현행 정치자금법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단호히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성공회 교단은 그가 낸 사표를 반려해 남양주 외국인노동자 샬롬의 집 사목을 맡겼다. 그는 사제직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곳에서 주일마다 미사를 집전하게 된다.)

이 신부와 함께 대학을 일구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뜨거운 열정을 떠올리면 혀를 내두른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등장하는 이재정 신부는 마치 현대의 정주영 회장 같은 ‘카리스마의 화신’이다. 학교에선 거의 작업복 차림이었고, 라틴아메리카에서 열리는 제3세계 신학포럼에 참가하느라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온 뒤에도 밤 11시에 학교에 들러 밀린 업무를 결재했다. 학교돈 쓰는 일이라면 10원 한장이라도 발발 떨며 아끼던 그는 따로 판공비를 받지 않고 강연·기고 활동으로 용돈을 벌어썼다. 입시철이면 “새 식구 맞는 일에 소홀할 수 없다”며 도시락을 열댓개씩 싸서 새벽 4시에 출근해 뒤이어 출근한 교직원들과 도시락을 나눠먹었다고 전한다.

1994년 성공회대를 종합대학으로 만들던 때가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신부가 처음에 종합대학안을 제안하자 이사회에서는 “돈이 없어 학교가 문 닫을 판인데 무슨 소리냐”며 뒤로 넘어갔더랬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해 ‘1만기도회원’을 모집해 ‘개미 후원부대’를 조직했고 이 돈으로 건물을 짓고 교수를 뽑았다. 본인 역시 전 재산을 털어 대학에 쏟아부었다. 그는 지금도 집이 없이 서울 잠실의 장모댁에서 함께 살고 있다.

“제가 88년 학교를 처음 맡았을 때 이 학교를 통해 신학적·교육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이념은 ‘기독교 사회주의’였습니다.”

그는 성공회교의 근본 이념은 평등과 관용에 기초한 ‘기독교 사회주의’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학교란 사회적 평등, 남북간 대화와 평화, 남녀간 인간 평등을 실천하는 곳이자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곳이어야 했다. “우리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역사를 변화시킨 주체는 일류 엘리트가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과 의식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다르게 태어나는데, ‘능력의 우열’이라는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성공회대의 역할이야말로 우수한 엘리트가 아니라 역사와 세상을 보는 판단력을 갖춘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길러내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1명의 지도자가 아닌, 10명의 동반자를 길러낸다는 이념은 구체적인 학교 운영에서 드러난다. 이 신부는 “수능 성적에선 절대로 서울대를 앞지를 수도 없고, 또 앞지르면 뭐하겠냐”며 “우리는 다른 대학과 다른 것을 실험하는 데서 살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우선 교수진을 뽑는 것이 달랐다. 유달리 ‘역사 의식’과 ‘자기 책임’을 강조하던 이 신부는 비슷한 학문적 성과를 갖추고 있을 경우엔 민주화운동의 경력에 가산점을 주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신영복씨를 과감하게 교수로 채용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우리가 그같은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를 먼저 생각했지요. 하고 싶은 강의는 무엇이든 좋으니 우리 학교에 오시라고 했어요.” 성공회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사회 지성의 뿌리이자 살아 있는 정신이 된 신영복 선생은 그렇게 해서 ‘교수님’이 됐다.

‘100만원 일률 보너스’의 추억

이 신부는 영문학과의 진영종 교수를 채용할 때도 인상 깊었다고 기억한다. “지하철 즉석사진기에서 뽑아온 현상수배범 같은 얼굴 사진 밑에 ‘전국대학강사 노조위원장’이라는 이력이 첫 줄에 쓰여 있더군요. 강사노조 같은 걸 경력으로 쓰면 어느 대학에서 뽑아주겠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래도 제가 한 일인 걸요’라며 대답하더군요. 저는 그처럼 책임을 지는 태도가 우리 대학과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전쟁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브루스 커밍스의 연구를 뛰어넘는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이뤘으면서도, ‘성향’과 ‘과거’ 때문에 어느 대학에서도 뽑아주지 않아 ‘석좌급 시간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정해구 교수를 임용한 것도 이 신부였다.

학생 선발에서도 그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대안학교 출신이거나 두발 자유화·학벌 없는 사회 운동 등 고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한 ‘머리 큰 고등학생’들을 특별전형으로 모집한 것도 그의 구상에서 출발했다.

이 신부가 머릿속에 그린 이상적 대학의 모습은 ‘협동사회’, 곧 ‘공동체’였다. 그래서 대학 초창기 학생 수가 적을 때는 교수·직원·학생들이 모두 함께 수련회를 떠났다. 교직원들은 아직도 ‘100만원 일률 보너스’를 생생히 기억한다. 1990년대 후반 성공회대가 전국에서 가장 입학시험 경쟁률이 높던 해가 있었다. 입시 전형료를 많이 벌어들인 만큼 수고한 이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주기로 결심한 이 신부는 일용직 청소부 아줌마부터 교수까지 똑같이 100만원씩을 지급했다. 평생 이같은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던 청소 담당 직원들은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복도를 반들반들 닦았다고 한다.

종합대학으로서 성공회대의 출발은 기존 신학과에 영어과, 사회복지학과, 사회학과를 덧붙인 형태로 출발했다. 여기에 중어중국학과, 일어일본학과, 유통정보학과, 신문방송학과 등의 인문·사회 계열이 확대됐고 글로컬IT학과, 디지털컨텐츠학과 등 자연·공학 계열이 합쳐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NG0대학원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재교육기구로서 각광받고 있다. 이 신부는 이런 학과들을 만들며 다음과 같은 밑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종교적 말씀(canon)을 사회과학이란 텍스트(text)를 통해 아시아적 맥락(context)에서 시민사회단체 등 NGO들의 활동을 통해 구현(praxis)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공회대의 현실이 이 신부의 머릿속 그림처럼 정합적인 모습으로 전개돼온 것은 아니다. 조직과 권력, 돈을 갖춘 다른 대학이 세를 몰아 과감히 투자할 때, 이 대학은 가난한 게릴라전을 펼쳐야 했다. 그럼에도 가난의 부피와 달리, 이 대학의 업적과 무게는 빛난다. 그건 아마도 이 신부의 말마따나 “학교의 진짜 주인은 교수나 학생이나 직원이 아니라 학교에 깃든 가치와 이념, 곧 학풍이고 그것을 함께 지켜나가는 모두의 노력이 성공회대의 동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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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 2006-09-14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교수들이 자본에 포섭된 어용교수들보다 교수다운 교수인건 확실하다고 해도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아직도 많은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데 저런걸 보니 기분이 복잡합니다

지식채널은 이번 주말내로 다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해콩 2006-09-1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들르신 바람님~ 경기도 근처에만 살았어도 시도해봤을 거예요.. 멀어도 너무 멀어요~ 무슨 과가 있는지나 함 알아볼까요?

해콩 2006-09-1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나키님.. 님이 말하는 '현장'이란 반드시 '그 곳'이라야 하나요? 그렇다면 저 역시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요즘 님을 보는 제 마음 역시 복잡합니다. 그리고 지식채널은 인터넷으로도 잘 되요~ 건강하시고!!

해콩 2006-09-1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 다들 대단한 체력... 열정...
 
 전출처 : 글샘 > 고픈 배는 나중에 채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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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ㅎ샘 말이 옳다.

월요일 직원회의 시간.

1. 정보부장샘 "아이들 생리 공결을 결석 하루, 조퇴(지각/결과포함) 하루만 인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했다. '응~ 그렇구나. 악용하는 애들이 많아서 그런가 보지? 우리 반엔 조퇴 하루 이상 쓴 녀석 없으니 별 변동도 없겠네.' 생각하며 옆 자리 샘과 "12반 애들만 타격이 좀 크겠네 ㅋㅋ"라며 농담했다.

2. 학생부장샘 " 오늘은 폭력 추방의 날입니다. 하여 2학년들은 5교시에 경찰서에서 나와 관련 지도를 하겠다고 합니다. 담임샘들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못 들었다. 옆의 샘이랑 다른 이야기하는 사이에 발표하셨는데 정말 나는 전혀 못들었다. 당연히 아이들에게 전달도 못했고 5교시 전에 알았지만 아이들 수업결손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수업 빠지는 거야 아이들도 좋아하고 교과 담임들도 좋아하니까.

좀전에 학년실에 올라갔다가 혼자 계신 최병ㅎ샘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샘은 학교 오기도 싫고 회의도 들어오기 싫으시단다. 샘이 생각하기에는 생리공결 날짜를 부장회의에서 결정해서 일방적으로 줄인다고 통보하는 것이나 아이들 수업 결손을 당일날 전달하는 것이 모두 문제인데 샘들이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않아 답답하시단다. 혼자서 계속 이야기를 하다보니 미운털은 벌써 박혀있고 말빨도 안 먹힌단다.

정말 정신없이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쩌지? 생리조퇴날짜를 줄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해보나 어쩌나.. 샘께서 교육청 게시판에 질의는 해두셨다는데... "죄송해요, 샘~ 너무 생각 없이 살아서... " 부끄럽다.

12년 동안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살아온 나는 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날카롭지 못하다. 아니 보수적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변화를 싫어하고 누구못지 않게 '문제제기' 후 누군가에게 되돌아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견뎌내는 것이 부담스럽다. 겉으로는 아닌 척 행동하고 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그러하다. 날을 벼리지 않으면 일상에 정말 쉽게 안주해버리는 스타일이 '나'이다. 사실 요즘 너무 편안하다. 조합원샘들도 많고 또 활동가샘들도 다수라 믿고 빈둥거린다. 집회니 관련 강연에 다가본 지도 아득하다. 아무튼... 조금 예민해져야겠다.

최병ㅎ샘의 문제제기 하나 더] 1학년 문/이과 선택과정에 문과반 여학생들의 숫자가 너무 많단다. 47명. 그것도 담임샘들이 이과로 많이 유도한 결과란다. 올해 이과를 선택한 아이들이 적성에 맞지 않아 문과로 많이들 옮겼다. 아이는 괜한 미안함을 느껴야하고 담임도 괜히 부담스러워진다. 지금 이대로라면 지금 1학년이 2학년으로 진급하는 내년에는 더 많은 아이들과 샘들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교무부에서는 교육과정을 개편해야한고 교사수급에 문제가 있다고 그냥 덮을 모양이다. 거기엔 교장샘의 의지도 한 몫하는 것 같고. 최샘의 시선은 늘 아이들의 권리에 가 닿아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손해보는 건 누군데? 아이들이잖아!!" 한 마디가 오늘 아침 내 심장 위에 쿵하고 떨어져서 윙윙~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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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4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콩 2006-09-1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수요자 중심 교육입네 뭐네 이야기하면서 그건 보충수업이나 EBS감독비 등 학부모로부터 돈 걷을 일 있을 때만 꺼내드는 카드인지... 은밀하게 숨겨진 강요와 억압이 어찌나 많은지..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대 시스템' 자체의 문제일까요?
 

=333 2교시 내내 한 시간동안 쓴 아까운 걸 또 다 날렸다. 이번엔 로그인 시간이 오바되는 바람에. 흠... 오늘은... 일진이 영~ 조신하게 지내야겠다.

수요일 1교시. 2학년 1반이다. 8시 40분까지 자습감독하고 학년회의 마치고 서둘러 조례하고 허둥지둥 1교시 수업 들어가면 아이들은 아직도 담임샘께 조례 중 훈시를 듣거나 벌을 서거나 야단을 맞고 있다. 학년 초,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더니 (한 아이를 심하게 놀리길래 두어 번 야단을 쳤었다. 것두 심하게.) 한 학기 내내 아이들과 마음 맞추기가 힘들었다.

2학기 땐 잘 지내봐야지 하고 맘을 단단히 먹었지만 겨우 두어 시간 수업했을 뿐인데 1학기 때보다 더 힘이 든다. 대부분이 멍~한 채로 앉아있고 끊임없이 떠들거나 졸거나 자거나 아예 대놓고 장난치는 아이들. 무엇보다 힘이 드는 건 일 반 아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을 하며 나의 실패담을 들려주어도 조금 반응을 보이다가는 이내 무심해져 버리거나 냉소적인 눈빛을 보낼 뿐.

오늘은 '人一能之 己百之' 구절을 풀이하며 자기애와 자기신뢰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했지만 나와 아이들 사이의 거리를 재삼 확인했을 뿐이다. 다른 반 수업할 때와는 달리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고 가급적 '화'나 '짜증'을 자제하고 친절한 표정으로 수업하려고 꾹꾹 맘 다져 먹다가도 불쑥불쑥 무언가 치민다. 무심함을 넘어서는 싸한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찌해야할지... 이렇게 다시 한 학기를 살아야할까? 아이들이나 나나 할 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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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7 2006-09-1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힘드시겠어요..아이들의 무심한 눈빛...님 그래도 힘내셔요..언젠가 그 아이들이 알아줄날이 있을꺼에요..

해콩 2006-09-13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마음이 닿지 않는 것... 제 탓이죠. 가끔 안스럽고 안타까워요.
그렇다고 녀석들이 스스로를 줄창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겠지요? 공부보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고 학교생활이 점점 재미없어질까봐 걱정이죠. 1반 녀석들, 다른 샘들께도 늘 꾸지람 듣는다고 들었거든요. 어찌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