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와연인] ‘언어의 살갗’으로 도피했다 만난 동성애/김영민
금욕적 삶을 택한 비트겐슈타인 41살엔 21살 스키너에게
58살엔 19살의 의대생에게 빠져 ‘위대한 선물’을 어쩔줄 몰라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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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와 연인/⑤ 비트겐슈타인의 애인들

지식인들은 종종 사랑의 직접성을 포기한다. 그 상태가 굳어지면서, 예를 들어 그들은 영영 강간을 못한다. 그들이 가끔 제도 속에서 벌이는 강간극은 실외의 환상이 빚은 문화(文禍)의 불능을 반증할 뿐이다. 어쨌든 강-간을 못하게 된 것은 좋은 일이며, 주류 인류학의 일반적 설명처럼 그들은 그 문명의 비용을 치른 뒤 언어에(그것도, ‘심오하게’) 탐닉한다.

일부 지식인들이 언어에 탐닉하는 것은 연인의 살에 탐닉하는 것을 방불케 한다. 가령, 체색을 바꾸면서 구애와 교미의 신호를 보내는 오징어들은 살이 곧 언어인 셈인데, 이와 대조적으로 살과 말을 기능적으로 분화시킨 지식인들의 이중성은 그 자체로 문명의 정화(精華)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오징어의 변색에서부터 <춘향전>의 염언색담(艶言色談)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도르노는 자신의 독서 체험을 통해 간결하게 정리한다: “외국어로 포르노 책을 읽는 사람은 섹스와 언어가 얼마나 내밀하게 서로 교차하는지를 배우게 된다”(<미니마 모랄리아>). 아도르노가 독서체험 속에 언어와 에로티즘이 교차하는 지점을 짚어 주었고, 오징어는 살이 곧 말이라는 점을 원형적으로 일러주었다면, 바르트는 거꾸로 말이 곧 살이라는 사실을 보인다: “언어는 살갗이! 다…나는 그 사람(연인)을 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사랑의 단상>).

거꾸로, 말은 살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다. 가령 바르트는 사랑의 상처를 피하여 심오하고 추상적인 학문 속으로 도피하는 지식인을 말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축축할 수밖에 없는 사랑과 건조하고 추상적인 학문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자신의 지적 정체성을 간신히 건사하는 지식인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마치 ‘파리에게 파리병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보여주는 것’(비트겐슈타인) 같은 심사로 그들은 연애를 향해 ‘외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자인 말콤(N. Malcolm)의 회상에 따르면, 강의를 마친 비트겐슈타인은 즐겨 영화관의 좌석 맨 앞줄에 앉아 스크린 속에 시선과 정신을 온통 쏟으며 당일의 지적 긴장을 잊어버리곤 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헤겔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그였지만 여가 시간이면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탐닉했다고도 한다.

그를 좋아했던 이들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 결벽의 천재에게 고양이의 방울을 달려고 했던 이는 핑크(Barry Pink)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몇달 전, 비트겐슈타인의 각별한 호의와 나이(61세) 탓에 조금은 물러진 그의 성벽에 기대 핑크는 그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당신의 연구, 혹은 당신이 철학자의 삶을 사는 것이 당신의 동성애와 무슨 관계가 있지요?” 물론 핑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성깔머리를 과소평가했고, 그 질문은 혐오스레 무시되었으며, 그 누구도 다시 묻거나 거론하기를 꺼렸다.

핑크의 질문은, 특히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본성을 감추고 가면을 쓰는 경향에 대한 토론 속에서 우연히 나온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동성애, 혹은 사랑이 희랍의 조각상처럼 매끈하고 엄정한 그의 상징적-철학적 가면을 폭로하는 지점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호사가적 폭로심리는 불모의 것이다. 우리네 삶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1946년, 분단의 조짐이 역력했던 한반도에서 몽양과 우사 등이 좌우합작에 분투하고 있던 때, 58세의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의대 학부생이었던 벤 리처드(Ben Richards)와 생애 마지막 사랑의 합작에 열심이었다. 스스로 벤과의 사랑을 ‘위대하고 희귀한 선물’이며,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조만간 그를 잃게 될 것이라는 번민에 빠지곤 했다: “아, 도착하지도 않는 편지를 계속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당시 벤은 19세, 둘의 나이 차이는 거의 40세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벤과 간헐적으로 동거에 들어가는 등, 그 마지막 염화(艶火)에 제법 열정적이었고, 이것은 1951년까지 큰 곡절없이 계속된다. 1951년 3월 1일, 벤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는 안스콤(E. Anscombe), 스마이시스(Y. Smythies), 드루리(M. Drury) 등도 합석했다. 그것은! 철학사의 뒤안길에서 엿볼 수 있는 참으로 묘한 자리였을 것이다.

21세의 남학생 프란시스 스키너(Francis Skinner)와 사랑에 빠진 것은 1930년, 비트겐슈타인의 나이 41세 되던 해였다. 아카데미아의 속물주의를 염오했던 그는 젊은 프란시스에게서 어린애 같은 순박함과 예리한 두뇌 그리고 맹목적인 헌신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그의 전기철학으로 대변되는 지적 염결주의와 쾌락불안의 대체물을 희구했다. 스키너와의 성관계를 언급한 유일한 경우에서 그 행위의 자괴감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성벽과 기질, 취향과 철학적 태도로부터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그에게 여성혐오가 보다 노골화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노릇이겠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심취했고, 수도자와 같은 여건 속에서 신비주의자의 아우라를 달고 다녔으며, 20세기의 볼테르였고 자유연애주의자였던 스승 러셀에게 종교를 권유하기조차 했던 비트겐슈타인이 금욕주의적 외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그렇기에, 그의 인종(‘음탕한 유대인’이라는 스캔들)과 함께 그의 동성애적 취향은 그에게 자가당착의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이와 더불어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보다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의 일상언어분석적 후기철학마저 당대의 정치성을 비켜갔던 것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솔직하고 까탈스러웠던 천재는 솔직할 수 없었던 삶의 부분을 힘들게 억압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철학적 언설을 뱉어놓았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의 애인들이 겪었던 그 분열의 후유증은?

김영민/전주 한일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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