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체육'선택이다. 활달하고 명랑쾌활 왕 목소리 큰 소녀들이다.

지난 4월 중순, 어느 날 무슨 이야기 끝엔가 아이들이 걱정하는 소릴 들었다. "샘 올해는 체육대회 안 한다면서요?" "엉? 무슨 소린공?"  "꼭 해야되는데... 왜 안해요??"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기저기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질문들....그 질문과 항의에 일일이 답을 해줄 기력이 부족할 정도다. "응? 글쎄 몰라. 설마 안하겠나? 체육대회용으로 반장 부반장 뽑은 우리는 우짜라꼬?" "푸하하하~ 맞다 맞다 "(이어지는 왁자지껄... --;) 사실 속으로는 '뭐 체육대회 따위...' 하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러/나/그/랬/다 우리 반 아이들은 반장 부반장을 뽑을 때부터 '체육대회'를 염두에 둔 듯하다. 우리반 반장 부반장은 작년 체육대회 때 피구, 팔씨름, 줄다리기 등등을 휩쓸었던 바로 그 주역들이다. 게다가 얼핏 평범해 보이는 아이들도 각자 주종목이 있다. 당/연/하/지 100% 체육선택인데! 반장 부반장뿐만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체육대회용'이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반 아이들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바로 그 체육대회가 있었다. 어제 흠씬 두들겨주던 비의 여파가 오늘 아침까지 남아 꿀꿀한 날씨였지만 끝내 비는 오지 않았고 적당한 바람이 쌀랑쌀랑 불어주었다. 체육대회 하기 딱인 날씨! 흠~ 예감 좋다. 승리를 예감하는 자의 여유로움으로 아이들에게 "져도 상관없어. 우리가 다 같이 즐거우면 되잖아? 다치지 않게 살~살~해라 알았쩨?"라고 누차 이야기해두었지만 아무래도 최고로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이 놈들을 뭘 좀 먹이나?'하며 빵집이며 과일가게며 학교 앞 슈퍼를 기웃기웃하며 학교로 갔다.

조례시간, '樂'이라 쓰여진 문제의 반티(주1)를 입고 교실로 살랑살랑 올라갔다. 왕 에너제틱한 녀석들을 겨우겨우 자리에 앉히고 열심히 오늘 일정을 칠판에 쓰고 있는데... 부반장 말이 줄다리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미끄러지지 않는 특수한 장비- 목장갑이 필요하단다. 다른 반도 그 장비를 구입했다면서.그래? 근데 지금 어떻게 구하지? 매점에 판단다. 목장갑을!! 매점아저씨 정말 발 빠르시다. 샘 이름대고 가져와라. 겨우 스무켤레 정도 남았더란다. 흠.. 한짝씩 껴야지뭐.

"애들아~ 9시 반부터 시작이거덩~ 너무 애쓰지 말고 살살해라. 져도 된다. 그냥 우리끼리 즐거우면 된데이" 자만스러운 멘트 한 방. 그리고 "샘이 11시부터 회의있는데 샘 없어도 잘 할 수 있쩨?" "그러믄요~ ㅋㅎㅎㅎ" --; 흠흠...

교무실에서 중간고사 성적 관련 업무를 좀 보고나니 회의 전에 30분 정도 시간이 있다. 벤취에 올망졸망 앉아있는 녀석들을 나의 낡은 삼성케녹스 필름카메라로 몇방 찍어주고..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아아 이런... 유일하게 우리 반보다 숫자가 많은 43명에 또한 전원 체육선택인, 12반과 4강에서 겨루다니.. 아이들 말이 이건 거의 결승 수준이란다. 그러나 이/겼/다. 펄쩍펄쩍 좋아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며 바로 회의실로.. 학운위 회의가 있다. 안건은? '스승의 날 일정-오전 수업 or 휴업'을 결정해야한다.

회의 후, 점심 먹고 담임회의 하고... 물병에 찬 물을 챙겨서 운동장에 나갔더니 12반과 피구 결승 중이다. 우리 반 아이들 눈에서 빛이 난다. "샘반 아이들 무서운데요" "글쎄 말이다. 저 눈 좀 봐라... " "황ㅇㅂ이 신들린 것 같지요?" "그래... 우와 저 공잡는 거 좀 봐라. 내가 저것들 담임이라니.. 나도 무섭다" 2:0 바로 이겨버렸다. 한덩어리가 되어 좋아한다..

그리곤 바로 줄다리기 결승! 이번에 6반이다. '흠 이과반쯤이야' 그러나 우리반이 불리한 것이 좀전에 피구를 하느라 힘이 다 빠졌을텐데 쉬지도 못하고... 전원 29명인 6반에 맞추기 위해서 11명이나 빠져야했다. 반장ㄷ원이 말이 "힘 약한 아이들이 빠져줬으면 했는데요... 그냥 하고 싶은 사람 하자고 했어요. 사실... 좀 걱정이 되지만.." "잘했다, 진짜~ 잘했다. 지면 어때? 하고 싶은 사람이 해야지. 하면서 즐거우면 된다." 우리 반의 독주를 시기질투하게 된 다른 반 아이들의 일방적 상대편 응원 속에서도, 또 이/겼/다.

다른 반 아이들은 벤취에 앉아 음료수며 하드며 먹고 쉬는데 우리는 또 곧바로 '팔씨름'장으로 가야했다. 우리 반 '선수'들은 그저 담임이 부지런히 날라오는 '찬 물'로만 목을 축여야했고.. 그러나 팔/씨/름도 우리반이 이길 것이 뻔하다. 왜냐? 작년에 우승한 아이들, 다 우리반이다. 불법적인 장소-체육관 2층에서 몇몇 남학생들과 경기를 관람했다. ㅈ주만 6반 괴력의 신ㅁ경에게 버티다가 졌을뿐 나머지 세 명, ㅎ영, ㄷ원, ㅎ주는 가뿐하게 상대방을 넘겨버렸다. 사실 녀석들의 적수들은 이미 눈빛에서 전의를 상실한 듯 보였다. 아아~ 져도 되는데 자꾸 이긴다.

'이젠 좀 쉴 수 있으려나? 음료수를... ' 궁시렁거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시 운동장으로 내려간다.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 릴레이가 바로 시작된단다. 이거 안 볼 수 없지!  출전선수인 ㄷ비, ㅇ빈이, ㅇ정이, ㅈ화가 운동장에 보인다. 얼른 가서 다리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샘 너무 떨려요" 1번 주자인 ㄷㅂ가 울상이다. "맞제? 져도된다, 넘어져서 다치지 않게 살살 뛰어라. 다른 아이 넘어질 때 걸려 넘어질 것 같으면 마 천천히 뛰어라. 그게 낫다" 그런데 나의 이 이야기가 씨가 되었는지 우리 ㅇ정이가 넘어진 7반 아이에게 걸려 넘어졌다. 아이쿠.. 저를 어째... 괜찮다며 어깨를 감싸고 ㅇ정이를 반 아이들에게 데려가려니 녀석은 자꾸만 몸을 뺀다. 그러다가 보게 된 녀석의 무릎! 심하게 까졌다. 에구... 치료부터해야겠네 싶어서 양호실로 데려가 과산화수소수를 발라주는데 마사에 무릎이 생각보다 깊게 갈렸다. 쓰리고 따갑고 무지 아플텐데.. 녀석은 신음조차 없이 앉아있다. "우짜노, 우짜노..  마이 아프제? 참지말고... 울어도 된다." 분하거나 억울해서가 아니라 아파서 울어야하는데 녀석은 그저 앉아있다. "ㅇ정아, 니 내일 팍 생리해뿌라. 너무 힘들면 내일 생리공결 써도 된다" 반장인 ㄷ원이와 민주가 왔다. 소독하고 종합치료연고는 발랐는데 가제와 반창고가 없다. 양호샘도 안 계신다. 이ㅁ주샘 말대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마침 곁에 있던 친절한 우리 부담임샘이 도와주신단다. 샘 차에 타고 ㅇ정이는 ㄷ원이의 부축을 받아 병원으로 갔다.

길고 긴~ 시상식. 볼 것도 없이 우승! 변변한 간식도 없이 순전히 밥씸으로 오후 내내 땡볕에서 결승전을 치른 우리 반 아이들, 우승 발표하는 순간....  어라~ 덤덤하네? 사실 우리반 운동장 모임하는데 그렇게 조용한 거 처음봤다. 단상의 체육샘께서도 "오늘'은' 2학년 여학생들이 제일 안떠드네" 떠들 힘이 없거든요. ㅋㅋ

이것 저것 챙겨서 교실로 올라가니... 분주하게 옷만 갈아입을뿐 그다지 시끄럽진 않다. 그럼 그렇지 즈들도 사람인데... "샘, 배고파요. 뭐 빵같은 거 안줘요?" "맞제? 음... 지금 사주까? 사오고 먹고 치우고 그럴려면 시간이 좀 걸릴낀데... 다음에 느그가 원하는 때 사주까?" "에구... 다음에 사주세요." "그래, 지금 빨리 집에 가고 싶제? 내일 소풍이라 시간이랑 만날 장소랑 정해야하니까.. 이거만 전달하고 빨리 가자. 내일 느그 다 병결석할라"... "그라고 월요일-스승의 날, 4교시까지 정상수업하기로 결정됐다. 8시 10분까지 등교! "........."그라고 이 말하기 참 쭈글시럽다마는... 샘은 아무것도 안받는데이.. 다 되돌려보낼거니까 함부래 뭐 사올 생각하지 마라. 흠.. 편지 한 통씩은 받으께" "샘, 초코파이도 안되요?" "몽쉘통통은요?" "엥? 쵸코파이? 그래 마, 그까지는 받으께. 200원 이상은 절대 안되다. 알긋제? 그럼 빨랑 집에 가서 샤워하고 푹 쉬어라~ 오늘 진짜 수고많았다. "

담임 경력 6년만에 체육대회 우승, 처/음/이/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만두 2006-05-1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1등하세요^^

BRINY 2006-05-11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과는요? 저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체육대회에 시큰둥한 애들 맡았습니다. 뭐, 저도 체육하고는 담쌓고 사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그냥 참가에 의의를 두고 응원 열심히하면서 다함께 즐기는 시간 가지려구요.

해콩 2006-05-11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덧 잠이 달아나서.. 정신차리고 보니 저렇게 긴 글을... ^^;
만두님/ 결과는 위에... 담임경력 6년만에 처음으로 ㅠㅠ
브리니님/ 담임은 시큰둥한데 아이들끼리 신나하는 체육대회, 오늘 경험했답니다. 브리니님도 언젠가는!!! 사실 우리반은 응원준비도 못했는데, 준비했으면 억울할뻔했어요. 응원할 시간도 없었거든요. 모든 결승전 다 치르느라 벤취에 거의 앉아있지 못했다는... 그나저나 내일 소풍인데 오늘 온 몸을 던져 고갈한 아이들, 몸살없이 무사히 출석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

조선인 2006-05-12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가 져도 되는데~에요? 자랑이 뚝뚝 넘쳐나는구만. ㅎㅎㅎ

여울 2006-05-12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재미있네요^^. 한참을 웃었네요. ㅎㅎ.
정말 대단한 반인데요.......축하합니다.!!!

물만두 2006-05-1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읽을때보다 보강되었군요^^ 축하드려요^^

sooninara 2006-05-12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우승 축하드려요^^

해콩 2006-05-1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 그게 말이죠~ 참말 져도 되는데.. 아이들 덕분에 저도 다른 반 아이들에게 미움 받았다는... 근데 사실 우리반 아이들 팔뚝이 진~짜 굵어요. 담번에 우리반 아이들끼리 팔씨름 경기를 한 번 해보아야겠어요. 상품걸고! 1등부터 43등까지! 당근 담임도 같이!! 저도 힘 좀 쓰거든요.
만두님/ 감쏴~
수니나라님/ 방가방가 너무너무 간만예요.그쵸? 우리 반 애들, 진짜 웃겼는데.. 비됴로 찍어두기라도 할껄..

저 긴 글을 읽어주시고 아낌 없는 축하를 보내주신 님들께 모두 만땅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