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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운 벗님 -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성석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왜, 좋잖아? 그 김에 얼굴도 보고."
(...)
"그럴까? 너, H가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어땠는지 기억나니?
H에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시스루 블라우스를 펼칠 때 왁자하게 터져나오던 웃음소리. 그리고 너나 없는 충고들. 어쩌면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기쁨을 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H에게 소중한 것을 뭉갰다는 생각 들지 않니? 그게 축하였을까. 별자리목걸이는 어떻고."
(...)
"그런 일들이 여러 번이었어.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들. 어떤 땐 별자리목걸이였고, 어떤 땐 <꿈풀이사전>을 갖추는 거였고, 어떤 땐 누구 한 사람의 사생활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거였고. 왜 우리는 O의 목이 비어 있는 것을 그냥 바라볼 하지 않았을까. O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목걸이를 걸어주려들었을까."
---------------이혜경 '문 밖에서' 중에서
콕콕, 내가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을 콕 집어 놓은 구절을 만났다. 이래서 글 쓰는 사람들이 예리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가끔씩 모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서로의 일들을 축하하고 걱정해주는 모임을 동경했었다. 그런데 그런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오면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아닌 듯한 느낌. 그게 이거였다. 사람들은 여럿이 모였을 땐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씩 한다. 그 분위기에선 나도 얼결에 쉽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곧바로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내가 없을 땐 내 얘길 이렇게 쉽게 내뱉지 않을까? 나에겐 소중한 어떤 일이 이렇게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악의로 그러는 건 아니다. 다만 군중이 되었을 때 쉽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암튼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했는데 그 심리를 알게 되니 시원하다.
김애란이라는 작가의 글을 읽고 싶어서 찾게 된 책이다. (장편이 아직 도서관에 없길래 단편을 맛보려고^^;) 그래서 김애란이 쓴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먼저 읽었던가? 현대인의 수퍼마켓인 편의점, 그곳을 늘 이용하는 한 고객의 입장에서 쓴 의미 있는 글이었다.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어 나를 빤히 알 것 같은 편의점이 정작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는 그 결정적인 순간이 압권이었다.
그 다음에 읽은 게 수상작인 성석제의 단편이었다. 이 작가가 정말 이야기꾼이구나 하는 건 전에 얼핏 느꼈는데 '내 고운 벗님' 읽고 정말 ㅎㅎ 제목이 참 예뻐서 책 빌릴 때부터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 고운 벗님은... 너무 어이 없고 기가 막히고 황당했다 ㅎㅎ 마지막 반전까지 몰아가는 이야기의 힘이 대단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양 긴장되고 안달이 났다니까.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 아버지와 아들 얘기라니 별로 시큰둥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도 재미지만 암튼 박수!!
그리고 이혜경의 '문 밖에서', 사실 나는 특이한 인물들 나오는 소설을 잘 못 읽는다. 공감이 안 돼서. 그래서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읽어도 인물이 좀 무난한 사람 얘기를 골라 읽는다. 이런 거^^ 사람들 이름이 L, S, P 등 영어 대문자로 나와 처음에 잠시 헤깔리며 읽었다. 내가 어렴풋하게 느낀 어떤 감정을 잘 묘사해서 좋았다. 재밌는 구절이 하나 더 있었다.
"전에 호주 원주민들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해마다 생일 축하를 하지 않는대. 자기 생각에 지난해보다 올해 더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하면, 그때서야 잔치를 연댄다. 축하해줄 거지?"
역시 무난해 뵈는 글을 하나 더 읽었다. 신경숙의 '화분이 있는 마당'. 재밌게 읽었다. 그런데 다 읽고 등골이 오싹해서 꿈에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며 잤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