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 <제2의 성> 6장 '어머니' 를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읽고 싶지 않다고 썼다.
잠시 도망치고 싶어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를 읽었다.
노루 꼬리만큼 짧다는 겨울해
짐들 틈바구니에 서캐처럼 박혀 있던 우리
이런 생생한 비유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피해왔지만 여기에도 여성, 모성, 그리고 여성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천의 차이나 타운을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한국전쟁 이후 언젠가 시작되어 아홉 살의 여자아이가 6학년이 되기까지 계속된다. 인천으로 막 이사온 여자아이는 한국인들이 사는 적산가옥과 언덕 위 조금 더 큰 집들이 있는 중국인 거리의 경계에 산다. 이사온 지 얼마 안되어 중국인들의 집 중 하나에서 창문이 열리고 밖을 내다보는 남자를 본다.
이웃집에 세들어 사는 양공주 매기와 그녀의 딸인 백인 혼혈아 제니.
제니는 다섯 살이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음식도 혼자 먹지 못한다.
매기는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흑인 군인과 같이 살다가 국제 결혼을 한다고 했지만
어느날 바닥에 떨어져 죽었다. 군인은 술에 취해 있었다. 제니는 고아원에 갔다.
그 이웃집 주인집 딸, 계모에게 맞고 사는 치옥이, 치옥이는 매기 언니처럼 양공주가 되고 싶다고 한다.
난 커서 양갈보가 될테야.
할머니. 남편이 3개월만에 처제랑 바람이 나서 친척 조카딸 가족과 사는 할머니.
제니에게 '짐승의 새끼' 라고 말하는 할머니.
새끼 일곱 마리를 모조리 잡아먹고 대가리만 남겨둔 어미 고양이.
일곱번째 아이를 밴 어머니.
차라리 어머니가 의붓어머니여서 맘대로 나가버리고 싶은 나.
이제 제발 동생을 그만 낳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했다.
어머니의 구역질은 비통하고 처절했다.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
몇 개월 전에 예순다섯 걸음으로 걸어갔던 거리가 예순 걸음이 된 것을 보고 놀라는 나.
성장한 나는 창문으로 늘 내다보던 중국인이 손짓해 부르자 언덕 위로 올라가고
그 중국인은 대문으로 나와 나에게 빵이 든 종이 꾸러미를 건넨다.
(뒤라스의 <연인>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난산 끝에 출산하고, 나는 초조(초경)를 시작한다.
보부아르의, 나름 담담한 이야기를 피해왔더니, 더 생생한 여성의 삶을 보게 되었다.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출판한 것이 1949년. 당시 한국 여성들의 삶은 이러했구나.
<제2의 성> 6장 '어머니'는 낙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두말하면 입아픈 문장들이 많다. 밑줄을 그었지만 많이 옮기고 싶진 않다.
태아가 세례를 받지 않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낙태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박은 통쾌했다.
태아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세례도 받지 않고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때에 따라서 성인 남자의 살해를 허용한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전쟁이나 사형수의 경우가 그러한데, 태아에게는 대단히 인도주의적이다. 태아는 세례를 통해 정화되지 않았다. 이교도에 대항한 성전 시대에 이교도들 역시 정화되지 않았는데, 그들을 학살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장려되었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은 아마도 모두 죄가 없지 않았고, 오늘날 사형당하는 범죄자들과 전장에서 죽은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경우를 교회는 신의 은총에 맡긴다. 교회는 인간을 자기 수중에 있는 도구로, 한 영혼의 구제를 신과 교회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신이 태아를 하늘로 맞아들이는 것을 막는 것일까?
(보부아르의 이런 유머? 좋아한다)
<제2의 성> 1권을 읽을 때도 좀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2권을 읽으면서는 <제2의 성>의 대상 독자는 여성이 아니라 지식인 남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프랑스의 문맹율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식인 여성에게는 1권이면 충분했을테고, 지식인 남성에게도 그렇겠지만 2권은 특히 남성들을 위해(?) 썼다는 생각이다. 여성들은 굳이 읽지 않아도 아는 이야기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낙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산아제한과 합법적 낙태는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을 자유로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것이다.
라고 하며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피임과 낙태가 불법이라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에 있어 억압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이 출판된 게 1949년.
보부아르를 비롯한 '343인의 선언'이 1971년.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 이 1973년.
프랑스에서 '베유법'이 의회에서 가결된 것이 1975년.
한참 걸렸다.
그리고 보부아르가 책에서도 계속 말하고 있듯 미국은, 미국의 여성들은 '조금' 앞서가고 있었다.
어제 도서관에 책을 찾으러 갔다. 상호대차한 책들을 빌리고 신간 코너를 기웃거렸다. 얇은 책이 눈에 띈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었다. 며칠전 잠자냥님의 글에서 보았기에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더욱 반가웠다.
아니 에르노의 임신과 낙태 경험을 적은 이 책은 1963년 10월부터 1964년 1월 동안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여전히 낙태가 불법일 때다)
아니 에르노의 다른 책들처럼 짧지만 강렬했다. 중간중간 책을 덮고 싶었지만.. 아래에 옮긴 문장을 상기하며 직접 마주하겠다고 결심하고 계속 읽었다. 어떤 장면에선 덮을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기도 했다. (읽은 사람들은 어떤 장면인지 짐작하리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 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38쪽)
이제 다시 <제2의 성> 6장으로 돌아갈 차례이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사두었던 마거릿 생어의 이야기도 읽어야겠고, 시몬 베유도 궁금해졌다. 보부아르의 이야기도 더 알고 싶고.
어떤 책은 갖고 있고, 어떤 책은 안 갖고 있다.
적립금이 5300원 남았다. 뭔가를 사게 되겠지.
<좌파의 길> 이여. 그저께까지는 정말 잘 읽고 있었는데. 미안하다.
나는 좌파보단 여성에게 기우는 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