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샬럿 브론테의 <교수>를 출퇴근 길에 듣고 있다. 이 소설은 1846년 완성된 샬럿 브론테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 (원제: <수전>) 처럼 생전에는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사후 출판되었다. 두 작가 모두 첫 장편을 완성한 후 인생의 쓴맛(?)을 보고 이후에는 출판사에게 좀더 어필할 수 있는, 대중친화적인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노생거 수도원에서는 상상이긴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감금하고 학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설 역시 읽는 사람이 조금 불편할 수 있을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주인공 윌리엄은 귀족 출신 어머니와 상인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적 아버지는 파산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차남인 윌리엄은 어머니 집안에 장남인 에드워드는 아버지 집안에 맡겨져 성장하게 되는데, 그래서 윌리엄은 이튼에서 10년 동안 교육을 받고 에드워드는 젊은 사업가가 된다. 졸업한 윌리엄에게는 제인 오스틴 소설에 자주 나오는 '귀족이 알선해줄 수 있는 목사직' 과 사촌과의 결혼 제안이 들어오지만 윌리엄은 그동안의 도움도 굴욕적이었다고 생각하는지라 뿌리치고 형에게 가서 장사를 하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어릴 적 보고 만난 적 없는 형은 둘의 관계를 숨기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만 대하고 구박하는 등 도와주지 않는다.
몇 달 애쓰던 윌리엄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 관심과 호감을 보이는 헌스던 씨의 도움으로 브뤼셀로 가서 남학생 기숙학교의 영어 선생이 된다. 대륙 그리고 플랑드르 사람들을 관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옆의 여학생 기숙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게 되는데, 그 기숙학교의 여교장에게 끌림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녀의 얕은 속임수를 알아보고 멀리하려고 한다. 한편 학교의 바느질 강사이자 자신의 수업을 청강하는 프랜시스라는 아가씨를 처음에는 도와주다가 그녀에게는 좀더 정신적인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또 누군가와 누군가는 결혼을 하는데...
요즘 제인 오스틴을 한참 읽다보니 이 결혼 이야기 너무 지겹다. 사실 교수를 절반쯤 읽었을 때까지는 이 소설에서는 결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당시로서는) 센세이션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 품었지만 곧 사랑과 결혼 이야기가 나오더라...
초반 내가 좀 거슬렸던 것은 영국인인 화자가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벨기에인이자 구교도(가톨릭 교도)에 대해 갖고있는 편견 (나도 그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화자도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것으로 보이므로 편견이라고 판단했다) 이었는데, 나중에는 영국인조차 무참히 씹어버리길래.. 그냥 샬럿 브론테의 신랄함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오늘 아침 출근하며 들은 내용이 나름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정도는 아니지만)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 반가웠던 나머지 서둘러 옮겨본다. 작가마다 성향이란 게 있긴 하지만 제인 오스틴이 변덕은 여성의 특성이 아니며, 남성보다 여성의 마음이 더 오래간다- 며 나름의 목소리를 낸 <설득>이 1816년에 쓰여진 것인데, 이 소설이 쓰여진게 1846년임을 생각하면 30년 동안 꽤 발전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냥 샬럿 브론테가 좀더 센(!) 작가이거나.
당시로서 꽤 과감하다고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란 이런 것이다.
(청혼을 하고, 그에 동의한 상황이다)
- 선생님은 합리적인 분이시죠?
- 그래요, ... 그런데 그런 걸 왜 묻지? ...
- 저는 그저 제 교사직을 당연히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선생님도 계속 가르치실 거지요?
- 아, 그래요! 그게 내 유일한 생계 수단이지.
- 좋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되는 셈이네요. 맘에 들어요. 당신처럼 그 일을 계속하려는 제 노력은 그럼 당신과 마찬가지로 걸림이 없는거죠, 선생님?
- 내게서 독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구먼.
- 네, 선생님. 방해가 되어서는 안 돼요. 어떤 식으로든 짐은 안 될 거예요.
- 하지만, .... 그러니까 당신이 수업을 하러 가서 녹초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지. 6천 프랑이면 당신과 내가 살아갈 수 있고, 그것도 아주 잘 살 수 있어요. .... 당신에게는 완전한 휴식이 필요해요. 당신이 버는 1천2백 프랑은 우리 수입에 그다지 중요한 보탬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벌기 위해 얼마나 희생을 해야 하는가 말야! 이제 수고하지 않아도 돼, 당신은 분명 지쳐 버릴 거야. 그리고 당신을 쉬게 해줄 수 있는 행복을 내가 갖게 해줘요.
(이 비슷한 대화가 몇 백년 동안 계속되고 있겠지. 6천 프랑이 집에 하인도 넉넉히 고용해줄 수 있을만한 금액인지 잘 모르겠다. 완전한 휴식이라니. 집안일은 어쩌고!)
- 선생님, 제 일을 그만두라고 하셨나요? 아, 안 돼요! 전 그 일을 놓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보호를 받자고 결혼한다고요, 선생님! 그럴 수는 없어요. 사는 게 얼마나 지겨워지겠어요!
그러면 분명히 우울해지고 뚱해질 거고, 당신도 금세 날 지겨워하게 될 거예요.
- 당신은 책을 읽고 공부하면 되잖아,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두 가지 일 말이야.
- 선생님,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사색적인 활동은 좋아하지만 활동적인 생활은 더 좋아요. 저는 어떤 식으로든 활동을 해야 하고 또 당신과 같이 활동해야 해요. 선생님, 저는, 놀기 위해서만 모이는 사람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고통받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정말로 아주 좋아하거나 서로를 아주 높이 존경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나는 일 안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싶기도 하고,
놀기 위해서만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를 정말로 아주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존경은 잘 모르겠다.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많이 존경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의존해서 그러고 싶지는 않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유산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해 봤다 ...)
어쨌든 이런 대화가 1846년에 쓰여진 소설에 나온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요즘 제인 오스틴 소설들을 읽으며 제인 오스틴이 열심히 숨겨두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여성들도 그 소설을 그저 재미로만 읽으며 (나도 그랬었고) 여성은 이래야 행복해지는구나- 를 내면화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제인 에어>도 제인 오스틴 소설보단 좀더 급진(?)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로체스터에게 돌아가서 나를 실망시켰었는데) 오늘 <교수>를 읽고 어린 아가씨들에게 제인 오스틴보다는 샬럿 브론테를 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다만 위의 대화에서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선생님과 제자로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서도 여자가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 계속 '선생님' 이 될 것 같다. 나는 한때 부부였던 띠동갑의 남녀를 알고 있는데 이들의 호칭은 결혼을 하고서도 항상 '선생님' 이었다. 꼭 선생님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빠' 호칭도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언어는 그리고 호칭은 사용하는 사람을 정의하고 영향을 주게 되어 있으니까.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나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나이 차이가 조금 나서 처음 만났을 때는 '아저씨' 라고 (놀림의 의미를 포함해서) 불렀는데 어느날 그게 싫다면서 오빠라고 불러줬으면 바라길래 그 다음부터는 오빠라고 불러줬는데... 나는 친오빠가 있고 남편도 여동생이 있기 때문에 가끔 가족들 사이에서 '지금 어떤 오빠 이야기하는거냐' 라는 말이 나오곤 한다.
매실 (신나리) 님의 책 <여자, 아내, 엄마 지금 트러블을 일으키다>에는 이 오빠 호칭에 관한 따끔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부간의 동등한 대화를 위해 바꿔야 한다고. 그 전에도 항상 좀 꺼림직하다 생각을 했었고 나이가 드니까 오빠 소리도 민망하고, 하여 이 대목을 읽고서 바꿔보려 했으나... '여보' 라는 호칭은 내 입에서 당최 잘 나오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에는 잘 '부르지' 않고 있다 -_-;; 사실 무슨 호칭이든 입에 익기 나름이긴 하겠지만, 뭐 좀 덜 어색한 호칭이란 건 없으려나. 주변의 기혼자분들은 배우자를 어떻게 부르시는지 궁금합니다...
(북토크도 신청해서 들었는데, 책을 다 읽지 못해 ㅠㅠ 아직도 후기를 못쓰고 있다. 매실님 죄송해요..)
어쨌든, (전자책으로 듣고 있는데) 587 페이지 중 462 페이지까지의 내용이 이러하다. 이렇게 센세이셔널한 내용이 앞으로 더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마저 들어 보겠다. <교수>.
+ 이 '교수'는 선생을 지시하는 말이라서 내가 아는 현대의 '교수' 와 그닥 공통점은 없는 것 같다. 중간에 학생을 어떻게 휘어잡느냐 혹은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나오긴 한다. 샬럿 브론테가 가정교사를 했으며 기숙학교를 시도했던 것에서 나온 경험이 반영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