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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정세랑 작가의 작품은 <보건교사 안은영> 만 읽어보았고 이 번이 두번째라고 생각했다. 작가 소개를 보니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고 쓰여있다. 판타스틱을 창간호부터 3년 정기구독을 했으므로,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세 번째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시선으로부터,>는 비교적 현실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여전히 어느 면에서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50년대에 20대의 나이였을 주인공 심시선, 교육을 받고 예술가였지만 글이 더 유명했던 사람. 70-90년대 한국에서 여성의 글이 누구나 다 알만큼 그렇게 널리 다뤄지고 유명했나? 이 인물의 모델이 될만한 실존인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인물의 행보 말고도 가정에서 모계사회를 구현했다는 점에서도 판타지적 요소가 있다. (이 가족에서 남성 인물은 누구 하나 비중있게 다뤄지질 않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그랬듯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참 많이 담고 있다. (사실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페미니즘. 이분법적 성별 구분, 폭력 (성범죄, 학대, 가스라이팅, 디지털 범죄 등), 한국전쟁 중의 양민학살, 한국 부모의 자식에 대한 집착, 한국의 외국인 혐오, 환경 (생물종변화, 해양쓰레기 등) 등에 대한 문제의식. 이렇게 많은 주제가 이야기속에 매끄럽게 들어가 있는게 참 신기하다. 아주 진지하게 깊이 다루어 지루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면서, 나름 독특한 언어로 표현하고, 그게 또 바르고 산뜻하다.
지인은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시선으로부터,>를 읽으면 실망할 것이라 했다. <보건교사 안은영>과 같은 B급 장르의 재미는 없지만 나는 이 두 소설이 참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정세랑을 어디까지 읽어야 할 것인가, 조금 더 읽으면 질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은 좀더 읽어도 될 것 같다. 다음엔 뭘 읽을까. <피프티 피플>? 그것도 엄청 여러가지 이야기를 짧게 다루고 있을 것 같은데.
베이직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고 봅니다. 안쪽에 찌그러지고 뾰족한 철사가 있는 사람들, 배우자로든 비즈니스 파트너로든 아무데도 못 갖다 써요. 꼭 누군가를 해치니까. … (남편들이)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 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 이십 년 후에 스스로도 놀랄 다음 단계를 맞닥뜨리게 되면 오늘 이날을 떠올려주십시오. 제 어설픈 말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있는 동료들을 기억하고 성취를 서로 알아봐주십시오. 불꽃놀이 같은 기쁨을 느끼십시오. … 같은 일을 이십 년쯤 하면 계단 턱 같은 것을 만나게 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성취감이 있었다. 꼭 예술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그렇지 않을까? … 촉이란 건 작고 뾰족한 것일 텐데, 그게 이십 년이나 걸쳐 돋다니 참 비효율적인 일이구나 싶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20세기 여자들이 교육의 기회라는 말에 따라나섰던 수많은 길들은 정말 교육에 닿기도 했고, 위험한 나락에 닿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육과 기회를 원했던 여자들을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 탁월한 재능이 엿보인다고, 좋은 기회를 주겠다고, 나에게 관심 있어할 사람들을 소개해주겠다고 후하게 제시하는 사람을 그냥 믿어서는 안 되었다.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길들여지지 않는 괴물 늑대와 같아서, 여차하면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물 것이었다. 몸을 아프게 하고 인생을 망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조금만 사랑하자니, 유순하게 길들여진 작은 것만 골라 키우라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소소한 행복에서 의미를 찾자, 바깥의 평가보다 내면이 충실한 삶을 택하자는 요즘의 경향에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동의하는지 궁금했다. 내면이 충실한 삶은 분명 중요한데, 그것이 여성에게서 세속의 성취를 빼앗아가려는 책략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성취를 하려니 생활이 망가지고, 일만 하다가 죽을 것 같고…… … 가끔 명은이 부러웠다. 남매를 낳은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벼운 삶이. 무엇에든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경아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다른 온갖 수행 능력도 사실 산산조각난 채 십수 년을 살아왔다. … 경아가 여전히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 거짓 희망에 가까웠다. 거짓은 적나라하게 부정적인 어휘로 느껴져서 속으로는 ‘대충 희망’이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업계의 대충 희망이 되고 싶었다. 진짜 희망이 나타나기 전의 대타 같은 희망 말이다. 레드오션 업계에서 무난한 자질을 가지고도 오래 견디는 여자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힘을 얻겠지 싶어서.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 "할머니는 그 정도의 악의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야.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지. 21세기 사람들이니까.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걸 알지." …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 … "요즘 여자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걸 모조리 경제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평생 공격성이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공격성이 발현되든 말든 살밑에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가 천박한 시장 바닥이 되는 걸 막으려는 사람들은, 착취적이지 않은 진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모두 로컬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 한국의 로컬도 그런 개념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공동체에 누가 속할 수 있을지 넓게 열어두고 끌어안을 필요가 분명 있었다. 한국 사회도 이민자의 수가 계속 늘고 있고, 더 다양한 집단을 포용해야 할 때 로컬 개념에 괜찮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현지인이라고 번역하면 되려나? 지금의 ‘한국인’은 확장형이 아닌 것만 같아서…… 아니면 말은 그대로 두고 인식만 확장될 수도 있으려나?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한 게 없었다. … 읽고 읽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책 탑을 쌓았다. … 노안도 있는데 글씨 크기를 조절해가며 읽으면 좋을 테지만, 평소 난정은 정글 같은 서재에서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책을 우연히 고르는 것을 좋아해 별로 사용하지 않았었다. 포장 겉면에는 천 권도 넘게 들어간다고 쓰여 있었다. 천 권과 함께라면 시누이들과의 여행도 견딜 수 있을 터였다. … 세상엔 온갖 주제에 대한 책이 있다는 게 늘 안심이었다. 다 좋은 책은 아니지만 형편없는 책은 형편없는 책대로 기묘한 웃음을 주기도 하고 말이다.
주차장도, 매점도, 화장실도, 샤워실도, 구조원도 없었다. 긴 해변에 상업시설을 들이지 않고 근처에 사는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게 개발하지 않은 것이다. 관광객에게는 불편할 수 있지만 관광보다 우선해야 하는 게 있다는 걸 일찍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 결과로 모래는 깨끗했다. 쓰레기 한 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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