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위가 아파서 에스프레소 계열의 커피를 자제하고 있다. 향도 좋고 너무 맛나지만 가장 연하게 만든 라떼라도 그 자극이 상당하니까.. 스타벅스나 커피빈 앞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려면 아픈 속이 더 쓰리다. 들어가서 아이스 라떼나 아이스 모카, 바닐라 라떼 한 사발만 원샷 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ㅠㅠ
1. 에스프레소
내가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됐다. 한 7~8년 남짓?
어렸을 때는 커피를 무진장 싫어했다. 비록 그 향은 유혹적일지 모르나 시커머죽죽한 색깔에 떨떠름한 맛, 그리고 입안에 남는 떫은 뒷맛.. 왜 사람들이 이런 이상한 물을 마시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워낙 커피를 좋아하셔서 인스턴트 커피에서부터 원두 커피까지 갖가지 종류의 커피와 커피 메이커, 커피 마실 때 필요한 온갖 도구들이 집안에 수두룩했지만 결코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카페인 민감증이 있어서 커피 한 모금만으로도 밤을 꼴딱 샐 수 있었고, 약간 많이 마시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면서 귓속에서 맥박 치는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였다. 가끔은 어지럽기도 하고..
물론 어렸을 때부터 밤을 하얗게 밝히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밀려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에 의존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의 커피는 좋아서 마시는 기호음료가 절대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약' 같은 것이었다. 눈을 찡그리고 코를 막고 단숨에 들이키는 사약 수준의..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에스프레소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한 10년쯤 전이던가.. 기존의 커피전문점들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에스프레소 기반의 새로운 커피전문점들이 하나둘씩 동네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가게는 '시애틀 에스프레소'. 주변에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 인간들이 많았던지라 이 가게가 생기자마자 다들 열광하며 몰려갔었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나는 그때까지 항상 고수하던 "커피는 싫어요. 차라리 콜라를 마실래요"를 포기하고 호기심에 까페 모카에 입을 댔다.
오, 그 놀라운 맛이라니~ 물론 연하게 내린 아메리칸도 싫어하던 내게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내 뱃속도 약간의 거부감을 표하긴 했지만, 까페 모카 특유의 진한 달콤함이 정신적 육체적 거부감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셔대던 까페 모카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종류의 커피를 거부감 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줄곧 '이 나이에 커피 마셨다고 죽기야 하겠어'라며 끝없이 커피와 커피향에 탐닉하다가 결국 오늘날 이렇게 쓰린 위를 부여잡고 울고 있다. ㅠ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보면 발자크가 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소설을 쓰고 사교생활을 하기 위해 거의 독약처럼 진하게 끓인 커피를 끊임없이 마셔대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그리고 그로 인한(이라고까지는 뭣하지만 어쨌든 큰 영향을 미쳤다) 심장기능 약화로 결국 그닥 많지 않은 나이에 죽었다.
나는 별로 그 정도로 마셔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조심은 해야 하겠다. 어흐, 내 커피들아..
2. 바리스타
'즉석에서 커피를 만들어주는 전문가'를 뜻하는 바리스타라는 말이 요새는 꽤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10년 전의 내가 그런 말 따위 알았을 리가 있나. 그저 언젠가 스치듯 보았던 이탈리아 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한 장면이 뇌리에 생생하게 박혔다.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 묵직한 나무로 간소하게 치장한 어둑한 까페 안. 역시 어두운 계열의 옷을 많이 입은 세련돼 보이는 남녀. 그 사이를 조용히 오가며 서빙하고 있는 하얗고 긴 앞치마 차림의 종업원들. 카운터 안에서는 종업원 치프쯤 돼보이는 이가 칙~칙~ 커다란 소리를 내며 증기를 내뿜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뽑아내고 있고..
종업원 한 명이 커피잔과 커피포트 등이 가득 놓인 쟁반을 들고 한 테이블로 걸어간다. 도기로 만든 약간은 투박해 보이는 커피잔을 여자 손님 앞에 놓은 그는, 크림이 든 은색 용기를 약간 높이 치켜들고 마술처럼 손을 움직여 진한 갈색의 커피 위에 크림으로 꽃을 그린다. 뜨거운 커피 속으로 차가운 크림이 서서히 퍼져나가면서 꽃은 더욱 만개하고 바라보는 여자 손님은 가만히 탄성을 지른다.
이 장면이 얼마나 얼마나 근사해 보였던지.. 그때부터 맛난 커피를 내려 멋진 크림꽃을 그릴 줄 아는 그 사람들은 내 동경하는 인물 리스트에 올랐다. 그리고 또 그 즈음 봤던 <꿈의 궁전 피콜로(당시 제목은 이것과 달랐음)>에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에스프레소 위에 크림으로 장식을 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나왔었다.
요새는 이렇게 크림꽃을 그려주는 전문가들이 서울에도 많아졌다. 가서 조금 친해지면 이것저것 그려달라는 모양은 다 그려준다. 마셔버리기가 아까워 사진도 찍고 후후 불어서 모양이 조금씩 변하는 것도 보고 하다 보면 그 아래의 커피는 크림으로 덮어준 공도 모르고 식어만 가고..
그렇게 커피로 노는 것도 무지 재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