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아주 조그마한 서점이 하나 있었다. 비디오가게와 치킨집과 옷집 사이에 끼어서 간판도 잘 안 보이기 때문에, 창문에 덕지덕지 붙은 여성잡지 포스터들을 봐야만 겨우 '아, 여기 서점이 있었구나' 할 정도로 존재감 없는 서점.

게다가 이 서점의 주인 아저씨는 장사를 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뎅강뎅강 종소리가 울리는 문을 밀치면서 손님이 들어서도 카운터 뒤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저씨는 절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손님이 혼자 알아서 책을 둘러보고 골라서 카운터 위에 올려놔도 여전히 모른 척.. 책 뒷표지를 보고 알아서 책값을 내든가 아니면 "얼마예요?"라고 굳이 물어봐야 그제서야 느지럭느지럭 책을 집어들어 계산을 해준다. 계산만 해준다. 그래서 봉투를 찾는 것도 거기에 책을 넣는 것도 손님이 알아서 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떤 손님이 이 서점을 즐겨 찾겠는가. 그렇다고 주인 취향이 매우 고상하여 일반 서점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진열되어 있는 책들이라야 베스트셀러 약간과 잡지, 그리고 애들이 많은 동네 특성상 아이들 참고서가 주류를 이룰 뿐이다. 내 동생은 그 아저씨랑 거의 싸울 뻔한 적도 있어서 아예 가려 들지 않고 나도 잡지나 사러 몇 번 드나들었을 뿐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번화가까지는 버스로 약 5~6정거장 정도는 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는 이 서점을 제외하고 단 하나의 서점도 없다. 근처의 대형마트 안에 책을 파는 코너가 있긴 하지만 난 거기를 '서점'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거기에서 책은 수많은 판매용 아이템 중의 하나 또는 엄마들이 쇼핑하는 동안 아이들을 봐주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나는 실제로 그곳에서 진지하게 책을 보고 있는 성인독자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 판국이니 우리 동네 조그만 서점은 근방 몇 킬로미터 안의 유일한 '문화공간'이 될 만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무성의와 출판계 불황, 사람들의 무심함 등 모든 악조건이 겹치고 겹쳐 그저 그렇게 쇠락해가고만 있었다. 그리고 지지난주, 드디어 그 서점이 헐려버렸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어 입지가 좋은 편이었던 그 가게가 온데간데 없이 뜯겨나가고 먼지만 풀풀 날리고 있었다. 결국 그냥 그렇게 사라져 버린 거다. (동생 말로는 그 전 주말에 재고처분이 있었다고 한다. 권당 1000~2000원에 팔았다는데 구경이나 할 걸.. 아쉽다)

그리고 며칠 동안 뚝딱뚝딱 새로운 뭔가를 위한 공사가 진행되더니 드디어 새 간판이 내걸렸다.
<소금구이>라고.
그래, 결국 그렇게 되는 거다. 팔리지도 않는 책들을 전시해놓던 초라한 공간은 사라지고, 오직 사람들의 뱃속을 기름기로 번드르르하게 만들어줄 고기집들만 줄줄이 성업하는 동네. 주말인 오늘 저녁도 그 집은 손님들로 꽉 차, 가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까지 테이블을 내놓고 먹고 마시며 거나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주인 아저씨의 불친절을 불평하며 겨우 잡지나 사던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만은.. 그래도.. 많이 우울했다. (그 집에 손님 많은 거 보니까 맛있나 보다며 먹으러 가자던 동생의 말에 더 우울해져 버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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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6-13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동네에도 있던 조그만 서점.
작년엔가....부동산중개업소가 되었더만요 ...
힘빠지는 현실이지요.

로렌초의시종 2004-06-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도 제가 10년 넘게 다녔던 단골 서점이 결국은 없어지고 옷파는 곳으로 바뀌었죠...... 뭐 나름대로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너무 아쉽고 처연하더라구요......

panda78 2004-06-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서점들은 요즘 힘들다더군요.. 전 집근처에 북스 리브로가 있어서 나갈 때마다 들러서 구경만 하고 오는데, 저 때문에 망할 일은 없을 듯.. 근처에 헌책방 하나만 생겨주면 원이 없을텐데.. ^^;;

starrysky 2004-06-1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정말 웬만한 동네에서는 서점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죠? 하긴 대학 앞에도 서점이 거의 없는 상황이나 뭘 바라겠어요.. 어느 님의 페이퍼에선가 대학교 안에 교보문고가 들어왔다고 해서 조금 놀랐었는데, 이젠 동네 상권들도 거대서점들이 차지하려나 봐요. 물론 그런 데가 책도 많고 볼거리도 많아 좋긴 하지만, 그래도 쓸쓸해요.. ㅠ_ㅜ

반딧불,, 2004-06-1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서점이 그래도 가까이 있는데요..
도대체가 찾는 책이 없을 적이 넘 많답니다.
왜 그리도 삐까뻔쩍한 책들만 잔뜩이고..실상 찾는 책은 안보이는건지^^;;

부리 2004-06-13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꿈이 서점 주인인데요, 로또만 되면 할 거에요. 저는 그렇게 불친절한 주인은 되지 않을 거예요. 참고로 대학로에 있던 레코드점 바로크는 설렁탕집이 되었지요. 판도 잘 안샀으면서 막상 헐리니까 아쉽기 그지없더라구요.

starrysky 2004-06-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은 무슨 책을 주로 찾으실까요?? ^^ 주문하면 갖다놔주지 않나요? 그래도 그런 서점이라도 없어지면 많이 슬플 거예요.
부리님, 저 그 서점에서 알바하면 안 될까요? 힘이 좋아서 책도 잘 나르고 사다리에도 잘 올라가는데.. ^^ 근데 대학로 바로크가 설렁탕집이 됐나요? 허걱.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몰랐었어요. 옛날에 자주 가던 덴데.. 하긴 그 동네는 완전히 먹자판으로 변한 지 꽤 됐으니까요..

갈대 2004-06-1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저희 동네에 있는 서점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가끔 들르는데 알라딘에서 찍어놨던 책은 없고 이상한 베스트셀러와 참고서만 가득합니다.
결국 대형서점만 살아남게 되겠지요. 씁쓸한 현실입니다.

불량 2004-06-14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졸업한 대학 구내서점이 교보문고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2만명정도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서점이라곤 구내서점을 포함해서 달랑 두개였다지요..허허.

starrysky 2004-06-1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 안녕하세요~ ^^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동네 서점들은 당장 팔릴 책들을 갖다놔야 하기에 베스트셀러 위주일 수밖에 없겠지만, 정말 사고자 하는 책들은 찾아볼 수 없죠.. 부디 갈대님 동네의 서점은 무사히,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
불량유전자님. 제가 본 페이퍼가 님의 페이퍼였었군요.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다들 대형서점이 들어와서 서비스도 좋아지고 하니까 기꺼워하나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요새는 커다란 대학가에도 서점은 단 하나도 없이 구내서점만이 겨우겨우 명목을 이어간다고 하더군요. 인간들, 정말 책 안 읽어요. -_-

starrysky 2004-06-14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동네 서점 아저씨 만쉐이!입니다. ^^ 서점 경영자들이 전부 그런 분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디부디 동네 주민들이 모두 그 아저씨의 정성을 알고 책을 많이 사셔서, 그 서점이 오래오래 번창하길 빕니다. ^-^

파란여우 2004-06-14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들이 있고, 책의 내용을 파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starrysky 2004-06-1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파란女宇님!!! 저 방금 님의 서재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시고 제 서재에 찾아와 주셨네요. 까르르르~ 신나라~~ ^-^ 저는요, 우리 알라디너들이 돈과 마음을 모아 근사한 오프라인 알라딘을 하나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종종 해요. 재미있겠죠?

치유 2004-06-1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서점 주인되는것이 소원인데 부리님처럼...
얼른 로또를 사 놔야 할듯...ㅎㅎㅎ
나는 새책방 주인보다는 헌 책방 하고 싶더라구요.....
우리집 책 다 모아서,,,,,,,,,그러면 나 같은 손님만 올꺼얌!!~~~~!

starrysky 2004-06-17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배꽃님네 헌책방에도 알바 예약이요~~ ^^
오후 3시까지는 마태님네 책방 가서 알바하고, 오후 10시까지는 또 배꽃님네 책방 가서 일하고.. 하루 종일 책 속에 파묻혀 일하면서 돈도 벌고.. 아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