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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이다희 옮김 / 달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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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와 정말 친해지고 싶었다.

번역가 이윤기님처럼 셰익스피어가 위대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무지 내게는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책에서 마주치는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의 찬사 속에 나는 외톨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이윤기님이 번역한 <한 여름 밤의 꿈>과 <겨울 이야기>가 나온 걸 보고 우선 <한 여름 밤의 꿈>을 구입했다.

당시에는 오역에 대한 차이에 민감할 때라서 오로지 이윤기님의 번역 하나만 믿고 모험을 강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번역의 세계에서 이윤기님의 명성은 자자했고 이윤기님이 번역한 몇몇의 작품을 읽어 보니 나쁘지 않아 익숙해진 이름이였다.

그렇게 마주한 <한 여름 밤의 꿈>은 예상 외로 많은 것을 던져 주었다.

셰익스피어는 위대하지만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깸과 동시에 왜 위대한지 그 이유를 직접 보여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디어화 시킨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재미는 알고 있지만 문학 작품으로 마주한 셰익스피어는 시대적 배경을 뚫지 못했고 정서적 낯섬까지 미디어화 시킨 작품들처럼 재미를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오역의 문제였다.

수 없이 번역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서 어찌 그렇게 죄다 재미없게 번역했는지 셰익스피어 작품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음에도 이윤기님의 번역 앞에서 분개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고등학교때 읽은 4대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 등은 셰익스피어가 너무 유명해서 읽은게 전부였지 재미 있어서 읽었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여름 밤의 꿈>은 달랐다.

우선 재미있었고 셰익스피어와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겨울 이야기>를 구입해서 읽었는데 나도 셰익스피어에 매료되어 셰익스피어 작품을 다 번역하겠다던 이윤기님의 다음 번역판을 마치 셰익스피어의 신간을 기다리듯이 기다렸다.

2005년 7월의 일이였다.

 

2005년부터 그렇게 줄곧 기다렸건만 결국 2006년에는 책이 나오지 않아 슬슬 포기하고 있을 때쯤 올 초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온 것이다.

마냥 기뻤다. 2005년 여름에 만끽했던 그 희열을 또 느낄 수 있을 것을 생각하니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마주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번에도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재미있게 읽었고 다음 번역을 또 목메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압축 파일 풀기의 경험'을 겪어본 터라 푹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동경과 찬사는 전 작품을 읽은 후 만큼은 아니였지만(이미 경험을 했기에...) <한 여름 밤의 꿈>이나 <겨울 이야기>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영화나 책을 통해 신물이 날 정도로 봐온 터라 기존의 작품들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미디어의 영향에 익숙해져 있는지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미미한 비교의 다름은 묘한 흥분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실제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마주한 시간적 공간적인 짧음에서 느껴지는 충동적이고 철부지 같은 사랑은 미성숙화 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이제 막 14살이 되려는 줄리엣의 결단력과 그들의 대화는 굉장히 성숙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비극적인 결말을 봤을때는 사랑에 눈이 멀어 불꽃 같은 사랑을 했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사랑이 절절하면서도 미성숙하다는 말을 뱉을 수 있는 것은 미디어에서 보았던 그들의 애절한 눈빛과 몸짓을 포함해 그들에게 할애된 시간이 책에서는 너무나 짧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오래오래 기억되는 것은 비극적인 면이 있어 안타까운 것도 있겠지만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며 불꽃같은 희열을 맛보기를 갈망하기에 부족한 면을 감싸주며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시각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있을 사랑의 환상을 꺼내줌으로써 그러한 각색에 익숙해져서 그들의 사랑의 속삭임에서 재빨리 시간적 공간적인 짧은 만남을 건너 뛰어야 하는 애로 사항도 있었찌만 어찌 되었든 그들의 사랑은 애절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의 희생이 사랑의 안타까움과 집안의 평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만남, 대화에서 충동적이였다는 발언을 하였지만 책의 곳곳에서 그들의 사랑의 진실을 충분히 느낄 수도 있기에 미디어의 멜로적인 각색에 대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마치 셰익스피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작가라고 알고 있었지만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그들이 쓴 작품에 정통했고 그들의 작품을 탐독했기에 훌륭한 작품을 썼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배경을 알고자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사놓았지만 결국 아직까지 읽지 못했고 여전히 셰익스피어에 무지 하듯이 앞으로 번역될 셰익스피어 작품을 비교하며 읽고 그 번역 기간이 길어진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세계 뿐만이 아니라 한층 더 깊이 있는 문학으로의 탐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행복을 만끽 할 수 있다는 건 감히 문학의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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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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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중의 '황진이'를 읽었었다.

전경린의 작품이 더 유명하였지만 북한 작가의 글이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더 끌려서 읽게 된 것이였는데 '놈이'라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내세워 이끌어간 황진이는 재미났었다.

현재 TV에서 하는 황진이의 원작이라고 하기에 홍석중의 황진이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에(tv를 안보니까...) 덜컥 읽었던 것인데 완전 다른 황진이를 만나고 말았다.

 

제목에서 '나'라는 주어의 등장은 문체의 복선을 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제 3자에 의해 씌여지는 황진이는 대단하면서도 수많은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그러나 김탁환의 황진이는 김훈의 이순신을 만났을때처럼 황진이의 내면 깊숙이 들어간다. 황진이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글 속에서는 우리가 쉽게 읽어가며 넘어가는 그런 황진이가 아니였다.

칼의 노래에서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순신과 황진이는 왠지 닮아 있었다. 자기 고백적이라는 것. 그리고 한 인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일테다.

이순신과 황진이라는 쌩뚱맞은 비교이긴 하나 새로운 문체 속에서 만나는 이순신과 황진이는 낯설지 않다.

 

우리가 오해하고 영웅화 시키는 가운데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것이 인간미였을 것이다. 김훈이 만들어낸 이순신은 낱낱했고 황진이 또한 그러했다. 이순신의 낱낱함이 두려움과의 맞섬이라면 황진이의 낱낱함은 고뇌였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황진이만 그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드러난게 이 책을 통해서였다.

저자도 말하였지만 너무 유명하지만 정작 황진이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에 이 책과의 대면은 낯설고 어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낯섬 가운데 당황하였지만 조선 중기의 황진이의 내면으로 들어 갔다 온 느낌이다.

조선 중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가장 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문체였다. 황진이의 고백도 그러하지만 그 말속에 드러나는 언어는 현대의 언어가 아닌 그 새대의 언어였다.

자칫 언어의 변화가 시대적 배경을 혼동하게 하며 단순한 재미로 끝나 버릴 수 있는데 나, 황진이는 철저히 황진이가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그랬기에 수많은 주석의 등장이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고 있었지만 주석이 걸리적 거리지 않았다면 시대의 혼동을 낳았을 터였다.

저자가 대중판, 주석판을 고집하여 책을 내놓은 의도는 고증과 문체미학의 추구를 위해서라고 했다.

읽기는 힘들었지만 고스란히 그러한 의도와 노력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문체에서의 그러한 변화를 시도하였다면 글 속의 황진이도 분명 달랐을 것이다. 처음 내가 만난 낯선 황진이는 이 두가지의 변화를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황진이의 고백이라고 하면 그 유명한 일화부터 기생으로의 황진이를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황진이를 조금 더 알아간다면 단순히 몸을 파는 기생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파악의 가장 기본적인 연유는 무엇일까. 춤, 노래, 연주의 뛰어남만이 아닌 시와 지식의 능함 때문이였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황진이를 더 업그레이드시켜 저자가 알리고자 했던 조선 중기의 문화지형을 말함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후기처럼 저자는 서경덕에 반해 조선중기를 알리고자 했다. 서경덕하면 황진이고 그 둘로 인해 나, 황진이는 단순히 황진이의 이야기가 아닌 시대적 산물을 안고 재탄생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읽기에는 조금 버거울 수 있으나 황진이의 새로운 면모를 봄으로써 몸파는 기생이라는 추파를 던질 수 없을 것이다.

요즘 시대로 말하자면 얼마나 뛰어난 지식층이였는지 실감하면서 새롭고도 친숙한 황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진이의 유명함에 늘상 등장하는 재미와 통쾌함을 기대했다면 조금은 답답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젠 황진이의 재해석이 필요하다.

단순히 뛰어난 사람 황진이가 아닌 그녀의 내면을 여행하며 그녀가 꿈꾸는 희망에도 동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때에 비로소 황진이를 제대로 알고 판단하며 그녀의 위대함을 근원없는 짜릿함이 아닌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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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다나다 군
후지타니 오사무 지음, 이은주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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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독특하구나 독특해' 라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나다가 호테이 호텔을 들어가면서 부터 펼쳐지는 세계를 무어라 단정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방향치에 센스 없는 다나다 군이 오히려 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곳이였다. 오로지 빛나는 여자 마바의 뒷모습을 보고 쫓아 들어간 호텔에서 그는 환상이라고도 칭할 수 있을 정도의 괴상한 경험을 한다. 그녀의 뒷모습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다나다.

그녀를 쫓아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는 입구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 다름아닌 호테이상을 청소하는그녀를 만나지만 털털한 그는 도둑으로 몰려 감옥 같은 게스트룸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녀에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라며 말하고 호텔 관계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지만 모두들 신뢰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30분전에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어느 누가 '네, 그러셨어요'라며 반기겠는가.

 

다나다는 지금껏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양상에서 한발짝 벗어나 진지하게 마바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 최선을 다한다.

전혀 티가 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진심이 느껴지도록 다다갈 수 있을 날은 언제일까.

호텔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은 너무나 많다. 다나다는 단지 마바시와 얘기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을 뿐인데.

그러나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다 하여도 과연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까.

온통 독특한 사람들로 넘치고 마바씨에게 다가가려 하면 할수록 그녀와 호텔의 정체는 드러나며 꼬여 간다.

그런 열정 속에서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기회가 와도 그는 센스가 박치였다. 그러나 호텔 회장에게서 그녀를 구해야 한다. 마바씨를 포기할 수가 없다. 다나다는.

 

이런 소설의 흐름은 많은 요소들을 제쳐두고라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일본 소설 답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과연 일본다움을 나는 알고 있으며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랬기에 이 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 그래야 수 많은 의문들이 스르르 풀리고 자연스레 호테이 호텔에 동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마바씨와 함께 손을 잡고 호텔에서 빠져나온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그녀가 있는 낯선 호텔은 다나다군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였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다나다군보다 내가 더 놀랬다.

괴상하기만한 호텔은 마바씨를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이였고 방향치인 다나다 군에게는 그지 없이 적합한 장소로까지 승격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손을 잡고 호텔에서 나와 자신의 집과의 거리를 가늠해보며 삶의 변화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운명은 때론 얼마나 장난이 심한지 실감하게 된다.

호텔을 벗어날 수 없는 마바씨를 구해(?)오는 멋지다고는 할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다나다였지만 현대판 기사도 같다고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깊은 사랑에 빠졌고 오로지 사랑의 힘으로 그녀에게 올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런 사랑을 꿈꾸지만 다나다군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결코 쉬운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은 문득 다가오고, 혹은 공상이 과하다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문득 나도 내가 사는 곳에서 가보지 않는 곳으로 30분정도 걸어가 볼까? 그러면 이러한 사랑이 내게도 펼쳐질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그의 열정,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다나다군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꾸며진 모습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호텔속의 캐릭터들이 있었지만 다나다군은 일반인인 우리와 가깝다. 너무 평범해 호텔 속에서 오히려 튀어 버리는 그지만 그랬기에 그의 사랑을 높이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나다와 호텔을 이해하기 전에 이 책 번역이 잘못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번역자도 자신이 글을 옮기면서 그러한 의심을 했었다고 한다.

저자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소설 단락에 등장하는 알 수 없는 대화가 들어있는 모리스 라벨의 오페라 감상을 첫번째로 꼽으며 번역을 했다던 노력을 보며, 감히 그런 생각은 품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다나다군만 붙잡고 있으면 될것 같다.

다나다군과 친해지면 호테이 호텔에서의 모험이 신날(?)수 있으니까. 그러한 다나다군의 모습에서 나의 사랑의 열정의 농도를 체크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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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 1 - 북극성
조안 스파르 지음, 임미경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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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하루에 많아야 책 읽을 시간은 서너 시간 뿐이고 책에 치여 사는 생활이라지만 어쩔땐 책 읽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라는 생각이 든다.

노후가 되면 전원생활에서의 삶을 꿈꾸며 여유를 만끽하려 하지만 시간은 왠지 짧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 시간이 무의미한 숲속의 나무인간이 있다.

 

고전의 한귀절을 오랫동안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나무인간. 그는 여유롭고 그럭 저럭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나무라는 독특함 속에서도 느낄건 느끼며 그런 면에서는 나의 부러우을 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아우롸 그가 흙으로 빚은 골렘이 나무인간의 집을 찾아온다. 알리트라바이의 왕이 숲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아틀라스 떡갈나무로 피아노를 만들어 달라며 나무인간에게 명령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숲을 불에 태워 버린다며.

 

그러나 나무인간은 산 나무로 가구나 악기를 만들 마음이 없었다.

어떠한 결론을 못 내리고 떡갈나무를 보러 갔다가 땅도깨비 카카를 만난다. 카카와 나무인간, 엘리아우(곁에 있는 골렘까지..)는 떡갈나무에 대해 토론을 하던 중 골렘이 떡갈나무에 올라가 모두 뒤다라 올라간다.

알리트라바이의 왕이 왜 떡갈나무를 없애려고 하며 그렇게 공격을 해대는지 그들은 오랜시간에 걸쳐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야 알게된다. 아틀라스 떡갈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나무였다.

자신의 권위 보다 높다는 이유로 왕은 그 나무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무에서 내려왔을때 알리트라바이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무인간의 친구들을 다 잡아간 상태다.

늦게 내려온 나무인간만이 알리트라바이에게 겁을 주어 쫓을 수 있었지만 그는 친구들을 구해야만 했다. 떡갈나무는 계속해서 공격을 받고 있었고 그는 떠나야만 했다.

 

그때부터 나무 인간의 모험이 시작된다. 그 모험은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쳤음에도 그는 결국 감옥에 갇혀 2년동안 잠을 자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품에 감옥에 갇히었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잡히고 난 사흘 뒤 사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던 친구들 그리고 역시 갇히게 된 나무인간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걸까. 탈출을 하면 할수록 어둠은 짙어져가고 시체들, 괴물들을 만나며 암흑세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지상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끔찍하고 때론 눈쌀을 찌뿌리게 했다. 카카의 변화된 몸이라든가 싸움 장면이라든가 지하의 음습함을 닮아 점점 암울해져가고 있었다. 지하의 경험은 마치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처럼 괴이하면서도 눈 앞에 펼쳐지도록 독특한 세계를 자연스레 만들어가고 있었다.

 

끈끈하고 어두운 지하를 빠져나올 수 있을까. 골렘이 자구 흙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꿈꾸듯 그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야 했다. 자신들에게 그리고 바깥세상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바깥세상으로 나온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한 재앙과 마주하게 된다.

알리트라바이들이 쓰러트리려고 했던 떡갈나무가 쓰러졌고 그로인해 그들에겐 커다란 재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떡갈나무와 알리트라바이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나무인간과 친구들은 감옥에 갇힌 이유로 살 수 있었다.

이제 그들에겐 할일이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거 외에는.

그러나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그 가운데 카카는 목숨을 잃고 나무인간,골렘, 엘리아우만이 돌아오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1권은 끝이 난다. 모두들 극찬하는 것처럼 저자의 상상력은 끝이 없었다. 쉼없이 이어지는 독특함은 역량의 거대함과 연결의 헛점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력 속으로 빨려가다 보면 내 머릿속에서 상상력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공백이 없었다.

그러나 반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상상력은 매끄러운 연결을 이끌어 가기에 조금은 무리가 있었다.

완전 다른 세계이기에 만들어야 할 , 그리고 독자를 이해시켜야 할 요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역량으로 커버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환상의 세계를 어느정도 구축해 놓았고 그 세계에 어느정도 빠졌던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내게는 낯설었다.

처음 나무인간에게 부러움을 느꼈던 양상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환상적인 부분들 때문에 세상의 취약점은 배제시켰던게 사실이였다.

내가 느꼈던 낯섬과 유쾌하지 못했던 감정의 정면에는 폭력성과 탐욕이 깃들어 있었다.

숲속의 모습은 인간세계와 만나면서 그러한 것들을 닮아가고 있었고 당연시 되고 있었다. 그랬기에 책을 덮고서도 나의 마음이 찜찜한 것이다. 자칫 상상력의 대향연 속에서 잊기 쉬운 것들이 읽고난 후 밀려와 결코 재미로만 넘길 수 없는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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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줄리
웬들린 밴 드라닌 지음, 이지선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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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 이런 감정 참으로 오랜만이다.

분위기에 홀려 앉은 자리에서 책을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도 오랜만이고 이 느낌을 잊어 버리기 싫어 늦은 밤 펜을 들고 있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책을 읽는 순간이 마치 꿈결처럼 지나갔고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어서 책을 읽는 짜릿함 또한 느낄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은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줄리가 아닌 내가 된 느낌이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며 줄리와 브라이스를 통해 순수를 배워 가고 있다.

 

이 책의 형식은 독특하다.

편지로만 되어 있는 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를 읽는 적이 있어 낯설지는 않았지만 줄리와 브라이스의 각각 입장에서 쓴 글의 반복이 더욱 더 재미났다. 둘의 만남과 대화는 각자의 시각에서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러면서 색다른 느낌이 배어 있었고 공통된 둘의 모습보다 하나의 개체로 중점을 둔 시선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이 둘을 동떨어지게 한다기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점점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6년동안 옆집에 살며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줄리는 브라이스를 좋아하지만 브라이스는 첫 만남부터 줄리를 싫어하며 많은 상처를 주엇다.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본 풍경을 같이 보고 싶었던 사람도 브라이스였을 테고 그 나무가 잘려 나갔을 때도 브라이스에게 위로 받고 싶었었을 텐데 브라이스는 줄리의 주위만 멤돈다.

그리고 계란 사건으로 인해 브라이스의 있는 그대로의 면모를 줄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 겁쟁이 브라이스는 줄리네 삼촌을 비난하는 친구한테 아무말 못하고 동조해버린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리는 브라이스를 좋아할 자신이 없어진다.

 

이러한 감정의 반복을 보며 중학교 2학년의 삶이 왜이리 팍팍하며 상처 투성이일까 한탄하면서도 줄리의 밝은 모습이 좋았다.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 순수하게 브라이스를 좋아하는 모습까지 나무 위의 줄리가 본 아름다운 세상은 줄리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피어난다.

하나 하나 삶을 헤쳐가고 배워가는 가운데 잃지 말아야 할 모습과 진통을 한꺼번에 떠 안으며 충실히 살아가는 줄리는 내면이 아름다운 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줄리를 싫어하던 브라이스도 그러한 줄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가며 줄리를 좋아하게 된다.

그 마음이 뒤늦지 않도록 줄리네 앞마당에 스스로 플라타너스 묘목을 심어놓고 자신의 변화를 줄리에게 보여주며 집으로 돌아간다.

 

마지막은 참으로 감동적이였다. 하도 나를 울고 웃기기에 줄리와 브라이스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내가 서둘렀다는 걸 알면서 부끄러웠다.

나의 바램은 외적인 결합이 중점이였을 뿐 내적인 결합은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가 내적인 브라이스의 면모를 발견해서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말이다.

 

브라이스가 심어놓은 줄리네 앞마당의 나무가 커서 꼭대기의 풍경을 누가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풍경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나는 줄리를 통해서 보았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흉하게 변한 나무였지만 줄리가 그 나무였고 꼭대기의 풍경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었다.

그것은 줄리의 희망이였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성장소설, 사랑얘기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들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이 너무 다양하다. 아름답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상처 받을 때도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그들의 희망을 꿈꾸어 보게 되었다.

'내가 줄리의 나이였으면' 이라는 막연한 연민이 아닌 순수함을 닮아가고 찾으려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아물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풍경으 줄리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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