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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줄리
웬들린 밴 드라닌 지음, 이지선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느낌, 이런 감정 참으로 오랜만이다.
분위기에 홀려 앉은 자리에서 책을 순식간에 읽어 버린 것도 오랜만이고 이 느낌을 잊어 버리기 싫어 늦은 밤 펜을 들고 있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다.
책을 읽는 순간이 마치 꿈결처럼 지나갔고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어서 책을 읽는 짜릿함 또한 느낄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은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줄리가 아닌 내가 된 느낌이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며 줄리와 브라이스를 통해 순수를 배워 가고 있다.
이 책의 형식은 독특하다.
편지로만 되어 있는 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를 읽는 적이 있어 낯설지는 않았지만 줄리와 브라이스의 각각 입장에서 쓴 글의 반복이 더욱 더 재미났다. 둘의 만남과 대화는 각자의 시각에서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러면서 색다른 느낌이 배어 있었고 공통된 둘의 모습보다 하나의 개체로 중점을 둔 시선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이 둘을 동떨어지게 한다기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점점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6년동안 옆집에 살며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줄리는 브라이스를 좋아하지만 브라이스는 첫 만남부터 줄리를 싫어하며 많은 상처를 주엇다.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서 본 풍경을 같이 보고 싶었던 사람도 브라이스였을 테고 그 나무가 잘려 나갔을 때도 브라이스에게 위로 받고 싶었었을 텐데 브라이스는 줄리의 주위만 멤돈다.
그리고 계란 사건으로 인해 브라이스의 있는 그대로의 면모를 줄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 겁쟁이 브라이스는 줄리네 삼촌을 비난하는 친구한테 아무말 못하고 동조해버린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리는 브라이스를 좋아할 자신이 없어진다.
이러한 감정의 반복을 보며 중학교 2학년의 삶이 왜이리 팍팍하며 상처 투성이일까 한탄하면서도 줄리의 밝은 모습이 좋았다.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 순수하게 브라이스를 좋아하는 모습까지 나무 위의 줄리가 본 아름다운 세상은 줄리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피어난다.
하나 하나 삶을 헤쳐가고 배워가는 가운데 잃지 말아야 할 모습과 진통을 한꺼번에 떠 안으며 충실히 살아가는 줄리는 내면이 아름다운 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줄리를 싫어하던 브라이스도 그러한 줄리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가며 줄리를 좋아하게 된다.
그 마음이 뒤늦지 않도록 줄리네 앞마당에 스스로 플라타너스 묘목을 심어놓고 자신의 변화를 줄리에게 보여주며 집으로 돌아간다.
마지막은 참으로 감동적이였다. 하도 나를 울고 웃기기에 줄리와 브라이스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내가 서둘렀다는 걸 알면서 부끄러웠다.
나의 바램은 외적인 결합이 중점이였을 뿐 내적인 결합은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줄리가 내적인 브라이스의 면모를 발견해서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말이다.
브라이스가 심어놓은 줄리네 앞마당의 나무가 커서 꼭대기의 풍경을 누가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풍경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나는 줄리를 통해서 보았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흉하게 변한 나무였지만 줄리가 그 나무였고 꼭대기의 풍경은 누구도 뺏어갈 수 없었다.
그것은 줄리의 희망이였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성장소설, 사랑얘기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들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이 너무 다양하다. 아름답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상처 받을 때도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그들의 희망을 꿈꾸어 보게 되었다.
'내가 줄리의 나이였으면' 이라는 막연한 연민이 아닌 순수함을 닮아가고 찾으려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아물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풍경으 줄리만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