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cat in Paris 파리의 스노우캣
권윤주 지음 / 안그라픽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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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리'라는 단어를 보면 설레임이 드는 것보다 먼저 피하고 싶어진다. 너무나 유명한 도시이기에,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갈망보다 가보지 못한 질투심이 먼저 인다.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유명한 도시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 밑바탕에는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크겠지만, 질투심에 눈이 먼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을 살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스노우캣의 다른 버전을 즐겁게 읽었지만 '파리'라는 제목 때문에 경계심이 인 것이다. 결국 스노우캣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구입했는데 참 잘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곱지 못한 마음을 철저히 부숴준 파리의 스노우캣은 멋졌다. 거기다 대리만족도 최고였다.
 

  '파리'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여기저기서 들은 풍월밖에 없지만, 그 거리를 누벼보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하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선뜻 가볼 수 없는 곳이 어디 파리 뿐이겠냐만은, 약 4개월 동안 파리에 머문 저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계획에 없던 일정을 늘려 버리는 바람에 금전적인 부담감이 상당했다는 저자 앞에서도 부러움은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유명 도시에 대한 여행책을 보면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많은 것을 알리기 위해 꼼꼼하게 기록해가지 못한 글과 시각을 현혹하는 시각 때문이었다. 단기적인 체류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조건으로 보자면 스노우캣의 여행도 그런 면이 다분하다. 이 책을 여행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진이 실린 것도 아니고, 세세한 글이 실린 것도 아닌 그림으로 채워지고 짧막한 글이 실린 책. 그러나 지금껏 만난 어떤 여행책들보다 훨씬 좋았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파리의 무엇이 그토록 좋았을까. 더군다나 다른 책에서 보아온 파리의 모습을 통해 많은 장소는 낯이 익었는데. 아무래도 파리의 모습을 독특하게 그려낸 저자의 시선이 아니였을까. 사진의 생생함도, 파리의 적나라함도 없었지만 저자가 보고 있는 파리의 모습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소소함.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파리와,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의 조화가 적절했다. 파리의 많은 곳을 겉핥기보다 적지만 몇몇 곳에 정을 담뿍 뿌려놓은 저자의 동선이 좋았다. 카페 이름이나 거리의 이름을 말해주어도 어차피 기억을 못하니 그림과 짧은 글을 통해 드러나는 소소함이 대리만족을 시켜주었다. 카페의 나라라고 할만큼 넘쳐나는 카페는 분위기 좋은 곳이 많았으므로, 그곳에 앉아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저자만 바라봐도 행복했다. 파리의 유명한 곳을 구경하는 것보다 자신의 흔적을 조금씩 흘려놓는 모습이 더 아련하게 다가왔다.

 

  파리라는 도시의 특징 때문일까. 저자가 경험한 것들을 글과 그림으로 풀어낼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예술적인 감각이 철철 넘친다는 것이었다. 카페에만 앉아만 있어도 보이는 풍경이 그랬고, 거리 곳곳마다 사람들의 퍼포먼스가 그랬다. 예술의 도시답게 즐비한 예술적 공간들은 거리에도 넘쳐났다. 거대한 미술관안의 그림들도 좋았지만,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름없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만날때마다 도시가 뿜어내는 열기가 벅찼다. 그 거리를 배회하는 저자가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내가 혼자서 저런 거리를 걷는다면 느꼈을 고뇌와 걱정들까지도 유쾌하게 보여주었기에 되려 위로가 되기도 했다. 직접 가보지 않고도 마냥 부러워하는 마음만 들지 않는 과정이 소중했다. 거리의 작은 구석을 누빈 발품이 느껴졌고, 그랬기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꿈꾸는 일상이 파리에서 그대로 드러났기에, 저자의 많은 고충은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꿈을 직접 꿔보고 싶었다.

 

  저자가 파리에서 경험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키스 자렛과 팻 매쓰니의 공연 후기였다. 공연관람을 특히 좋아하는 나로써는 눈이 확 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한공연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나에게 파리에서 본 그들의 공연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키스자렛의 음반이 달랑 두장 밖에 없지만, 킐른 콘서트 음반은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그의 공연을 직접 보다니, 너무너무 부러웠다. 팻 매쓰니의 공연은 좀더 특별했다. 그의 공연 때문에 여행 일정을 연장한 것이나, 표를 구입할 때 그 사실을 들먹이며 좋은 자리를 찾아낸 것이나 그의 공연을 보고 사인을 받았던 일들. 저자가 느꼈을 뿌듯함이 어땠을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파리에서 그런 좋은 공연을 두 번이나 보다니. 정말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책을 덮고나니 파리의 거리거리의 생생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 짓눌림은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무작정의 욕망이 아닌, 한 사람이 체험한 파리의 경험담이 이렇게 가슴 벅차게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한 기쁨이었다. 책을 안고 자면 행복한 꿈을 꿀 것 같은 뿌듯함이 나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왔던 팻 매쓰니의 공연을 되새기다보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를 잘 모르지만, 낯이 익다는 느낌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순간 내 음반꽃이에 그의 음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음반꽂이를 정신없이 뒤져보니 그의 음반이 한 장 나왔다. 맙소사! 예전에 재즈를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음반이었다. 한 두번 듣고 그대로 음반꽃이에 넣어 두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환기시킨 것이다. 그런 연결이 너무 뜻밖이기도 했지만, 짜릿했기에 음반을 꺼내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들을 때는 별 감흥이 없더니, 누군가의 경험이 곁들어 지니 음악이 다르게 들렸다. 헤드폰으로 듣는 음악이지만, 눈을 감으면 파리의 공연장이 떠오를 듯한 기분. 팻 매쓰니의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는 무척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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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양피지 - 캅베드
헤르메스 김 지음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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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문득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원하게 될까. 물질? 명예? 아름다움? 아니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소망이나 꿈을 가지려 할까. 그런 상상보다는 그런게 세상에 어디 있냐는 의심부터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려는 소망은 철저히 현실에 가려져 있기도 하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노력없인 대가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사람들은 현혹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정말 쉬운 방법으로 비밀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의심을 하게 될 것이고, 비밀에 또 다른 노력이 숨겨 있다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지나쳐 버릴 것이 뻔하다.
 

  성지순례 중이던 터키 이즈미르 항에서 한 노인을 만난 중년 사내를 보는 시선은이 진부할 수 밖에 없었다. 대뜸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노인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행색도 이상하고, 자식을 잃어버린 사실에 넋을 놓은 노인에게 그런 비밀이 있다고 믿기가 힘들었다. 해변에서 위기에 처한 노인(아리)을 도와줬지만, 그 댓가로 큰 비밀을 알려주려 하는 노인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노인은 자신이 세계적인 억만장자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라고 했다. 그런 인물이 초라한 행색으로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리는 자신의 삶을 모두 이야기 하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50년 전 한 랍비로부터 받은 양피지 때문이라고 했다. 그 양피지에는 성공의 비밀이 담겨 있었고, 양피지에 적힌 내용대로 한다면 어느 누구도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아리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전쟁 중에 헤메던 17살의 소년이 세계의 거부가 되어가는 얘기는 흥미진진했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따른(일일이 행동을 가르쳤단 말이 아니다. 아리 자신의 노력이 분명 있어야 했다.) 그에게 많은 성공이 따라왔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로 성장했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그리스인 기질을 그대로 닮은 아리의 인생은 그의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리스 신화적인 면모도 띄었다. 저자는 아리의 등장부터 양피지의 내용까지 철학과 신학, 역사의 꿰어맞춤이 뒤섞인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아리의 인생과 버무러진 다양한 이야기는 사실적이면서 신비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자기계발, 성공처세, 경제경영 등 다양한 장르로 이 책을 분류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편의 소설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의 흡인력을 뿜어냈다. 그만큼 아리가 지나온 삶은 범상치 않았고, 양피지의 비밀이 그대로 드러고 있었다.

 

  그러나 말년의 아리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는 불행하고 무언가 크게 후회하고 있다. 아리는 양피지의 비밀을 가르쳐준다는 말과 함께, 자기가 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었다. 양피지에는 성공의 비밀이 숨겨 있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단 뜻일까.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아리는 깊은 후회와 아픔이 서려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아리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깊은 슬픔과 회한을 토로했다. 그의 아들은 왜 죽었으며 양피지에 적힌 내용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어 순식간에 아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양피지의 내용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고, 아리의 성공가도를 달리는 인생에 빠져 중요한 메세지를 놓칠 정도였다.

 

  양피지의 주된 키워드는 공경이었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공경하고 귀기울이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의 소망을 이루게끔 도와 기쁨을 주면 그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아리가 어려움에 처할때마다 양피지 '캅베드'의 가르침은 시기적절하게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세계적인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사업가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캅베드 덕분이었다. 아리는 그런 캅베드의 뜻에 순종했고, 자신의 성공이 그 안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가 세계의 유명인물들과 얽히며, 역사의 한가운데 존재했던 순간들을 지켜보는 것이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그는 캅베드의 메세지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그가 캅베드의 격언중에서 꼭 하나 실천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을 공경하지 않은 것이었다.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그는 장애물을 느끼지 못했고, 마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신을 공경할 필성을 느끼지 못했다.

 

  또, 아리가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가정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가정에 대한 따뜻한 경험이 없었기에 아리는 하나의 사업체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호화 유람선에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이 줄 알았다. 사업상 하게 된 결혼이었기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끔찍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삐뚤어져갔다. 그리고 큰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죽어 버렸다. 아들을 잃고 나서야 아리는 캅베드를 얼마나 잘못 사용해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준 중년 남성에게  자신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리의 얘기를 통해 캅베드의 메세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룰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두 보아왔다. 자계서로 읽는다면 식상하게 줄줄이 늘어놓지 않아서 좋았고, 경영서로의 가르침도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저자가 갖춰놓은 아리의 인생은 문학적인 기질도 다분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꼼꼼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씌여진 내용이 그랬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은 당황스러웠다. 캅베드를 받은 인물은 누구이며, 그 이후로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을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중년의 사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빌 게이츠치의 아버지로 설정된다. 빌 게이츠는 아리가 밟았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캅베드의 지혜를 적절히 사용한 인물로 쓰이기에 충분했다. 아리가 하지 못했던 신을 기쁘게 하는 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줄 수 있는 교만을 키우지 않는 일을 한 모델이었다.

 

  독자에게 좀더 현실성을 갖게 하기 위해서 미묘하게 이야기와 이야기를 엮은 것일지는 몰라도, 조금 더 결말이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캅베드의 가르침에 충실한 인물의 등장에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이라는 친숙함도 있었지만, 더 많은 가능성을 품기보다 한정된 시각에 갖히고 말았다. 독자들을 위해 남겨둔 또다른 가능성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예도 있으니, 더 멋진 꿈을 이뤄보라는 무언의 남겨짐 같은 것. 어쩌면 한 편의 실재같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얼마든지 내가 될 수 있다는 메세지 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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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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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따뜻한 침대에서 책을 읽다 스르르 잠드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면, 다시 책을 집어 들고 읽는 기쁨이야말로 애서가들이 좋아하는 일상이 아닐까. 그런 행복에 경계를 주는 일은 책이 너무 지루해서 잠이 든 경우다. 애석하게도 <죽음의 중지>가 그랬다.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단번에 각인된 저자였기에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냉큼 집어 들었지만, 이런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떠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 것인지 궁금했건만, 소설은 초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시작한 첫 문장은 강렬했지만, 딱딱한 문체와 대화를 구분하지 않은 경계는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였다. 새해를 알리는 종이 친 순간부터 죽음은 사람들에게 오지 않았다. 이 일은 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곧바로 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에게도 생명이 유지되었다. 전국에서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 했지만, 현실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되었다. 죽음이 오지 않은 것은 자연의 생리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원활함이 제약되는 것은 곧 혼란을 뜻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할 곳은 어디일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 병원과 장례협회였다. 병원은 공급이 넘쳤고, 장례협회에는 수요의 부족으로 생계를 위협당했다. 또한 교회의 입장도 편치 않았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고 신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지는데, 죽음이 없는 세상은 신이 존재하기에 거북스러운 곳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나라. 그 나라의 혼란을 짐작하지 못하다가 하나씩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내 머리속은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그 나라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린 상상의 나라는 책을 읽어감에 따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어지럽혀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병원과 교회, 장례협회의 혼란은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 외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저자는 일일이 기록하길 거부했다. 나라일을 맡고 있는 몇몇 인물들과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하고 있는 몇몇 기관의 대표자들의 심경으로도 충분한지, 제 멋대로 뻗어가는 상상의 나래를 잠시 차단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 차단이 유쾌할 리가 없다. 전국을 돌며 혼란을 목격할 필요도 없이 나라의 대표격들이 맞고 있는 현실만 바라봐도 참담함이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한 복병들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왜 죽음이 사람들에게 오지 않는지, 어떻게 손을 써야 다시 원활한 자연의 생리를 따를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죽음에서 비켜가 있는 혼란의 대국에 작지만 변화를 일이킬 만한 일이 일어난다. 죽음을 앞둔 한 노인은 이렇게 버티는 삶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판단하고, 자신을 국경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국경 너머는 여전히 죽음이 존재했고, 그 방법이야말로 작은 돌파구를 제시하는 일인 것 같았다. 노인의 가족은 아버지와 아픈 손자를 함께 국경에 묻고 돌아온다. 국경을 넘는 순간 생명은 꺼져버렸기에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 일은 순식간에 퍼졌고, 목숨만 붙이고 있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먼저 사람들의 양심을 찔러댔고, 주변 국가의 불만을 샀으며, 그 일을 처리해주는 마피아의 손길이 닿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그런 식으로 행해진 죽음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이전의 공급처럼 원활한 죽음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죽음이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과연 지속될 수 있을까. 혼란에 빠진 나라, 혼란에 빠진 독자를 구원(?)하듯 죽음은 이내 다시 찾아왔다. 몇 달간의 죽음의 중지에서 다시 죽음이 재계될 것이라는 경고장이 날아온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온지 알 수 없는 자주색 편지. 그 편지는 죽음을 전달하는 메신저였고, 편지를 받는 자는 일주일이 지난 후에 죽게 된다. 죽음이 다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찾아왔기에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죽음은 자주색 편지를 통해 랜덤으로 찾아왔고, 그 편지를 누가 보내는지 알 수 없었다. 저승사자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것일까?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고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걸까. '죽음(편지를 보낸 행위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시점에서, 소설은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탄다. 혼란스러운 나라를 잠시 뒤로한 채, '죽음'의 입장에서 죽음이 보여 진다.

 

  '죽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사람으로도, 저승사자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뼈로만 이루어진 존재. 죽음의 편지를 일일이 쓰고, 순식간에 편지를 보내는 인물로 생각해야 할까. '죽음'이 인간들에게 죽음을 주는 가운데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죽음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의 편지가 다시 되돌아 온 일.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편지로 인해 그 사람의 생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49살에 죽어야 했을 독신의 첼로리스트는 50번째의 생일을 맞이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은 첼로리스트를 관찰한다. 그가 어떠한 생활을 하는지, 그에게 죽음이 왜 비켜갔는지 뼈로 이루어졌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죽음'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인간으로 인해 급격한 혼란을 맞고 있었다.

 

  어째 소설의 흐름이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왔다갔다 하는 나라의 지루함을 지켜보다 꾸벅꾸벅 졸던 내게 '죽음'의 행동은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냈지만,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반전이었다. 책은 거의 끝나가는데, '죽음'은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주는 일에 직접 나서고 있었으니 결과에 주목하면서도 상반된 분위기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읽다 또 졸고 말았다. 상상력이 풍부한건지, 단순한건지 알 수 없지만 잠들기 전에 읽은 책 내용은 나의 꿈에서 연결되기 일쑤였고 나는 '죽음'과 첼로리스트의 꿈을 꿨다. 그리고 꿈에서 깨자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고, 나의 집중력은 최상의 상태를 발휘했으며 이전의 지루함은 떨쳐 버린 채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를 예상할 수 없지만 결코 순탄하게 흐르게 두지 않을 것을 짐작한 저자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처럼, 로멘스 소설을 읽는 듯 끝 부분을 읽어 나갔다.

 

   그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힘겹게 읽어간 소설은 모두 사라지고, 죽음을 주려는 '죽음'과 '죽음'을 사랑하게 된 첼로리스트의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꿈을 꾸고 나서야 무엇에 홀린 듯 읽어나갔던 일은 물론, 죽음이 사라졌다 다시 온 나라의 일은 현실과 혼동 되었다. 생뚱맞게 서로를 사랑하게 된 '죽음'과 죽음을 비켜간 첼로리스트라니. 혼란에 빠뜨렸던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의 유무를 뭉뚱그리는 것도 아닌 결말 앞에 망연자실 할 뿐이었다. '죽음'이 첼로리스트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고 그를 사랑하게 된 다음 날, 역시 책의 시작과 함께 '아무도 죽지 않았다'로 소설은 끝이 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이었지만, 개인적인 경험 앞에서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로 비춰졌다. 죽음은 '죽음'을 통해서 통제된다는 유무를 확인한 셈으로 치기엔 무언가가 석연치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듯한 '죽음'의 행동.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여전한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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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를 리뷰해주세요.
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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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를 간단히 보고,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두 명의 장애인 아들을 둔 아빠. 그가 쓴 글이 어쩐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한 동정심이 일었다. 단순하게 장애인 아빠를 향한 측은함이었기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참 많이 부끄러웠다. 멀리 갈것도 없이 내 주변의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이 많았기에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가진 것은 아니다. 장애인 아들을 둔 아빠의 심경을 뼈저리게 느낀 것도 아니다. 다만 두 아들과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었다.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동안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렇게 쓰는 것은 과하지 않냐는 편견이 들어 있었다. 그런 편견이 책을 읽는 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깨져 버렸는지,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책 속의 주인공만 살펴보더라도 그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장애 아이들을 가졌다고 막연한 측은함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군다나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 '이해한다'는 말이 아닐까. 동정심도, 이해도 아니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들을 대해야 할지 난감해 질 것이다. 아빠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을 그대로 좇는다고 하면 좀 도움이 될까. 아빠는 아이들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다 못해 익살을 부리고 있었다. 그 익살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배꼽을 잡으며 웃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익살의 뒤끝은 씁쓸하기도 했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아이들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음을 알기에 부렸던 익살이기 때문일까. 실컷 웃다가도 결국 울고 마는 아픔이 느껴졌다.

 

  장애 아이들을 둘 씩이나 둔 아빠의 심정을 이해 하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아니었다. 책을 통해 토로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힘겨웠던 짐을 독자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수 있다면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년 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라고 했듯이, 소설이라고 하지만 책을 통해 알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고백이 아닌, 익살맞고 적절한 무게를 지녀야 했으니 또 한 번의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두 아들을 똥강아지라고 부르며, 평범한 일 하나조차 할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심정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까지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저자가 간직한 것이 고통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아마 그 두 감정이 버무려 졌으리라), 그런 감정을 무시한 채 웃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면 심각해지기 때문에 웃으면서 얘기해 보고 싶었다던 저자. 실재로 아이들이 많이 웃게 해주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조차 왜 그렇게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두 살 터울인 마튜와 토마를 보면서 저자는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런 아이들을 낳은 자신을 자책 하기도 하고, 아이들로 인해 받게 되는 어려움을 숨김 없이 털어 놓는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 감추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갖을 수 없는 꿈과 평범한 일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면에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 내제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막연한 사랑으로 둘러치지 않고, 눈물과 동정심을 호소하지 않는 저자의 글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두 아이들과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태어났을 때부터 드리워진 상당한 무게의 짐은 충분히 덜어내지 못했다. 덜어낼 수도 없고, 덜어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튜가 척추 수술을 받고 3일 만에 숨지자, 오히려 잘됐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태연해야 했던 저자. 그런 저자가 책을 통해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많은 짐이 덜어졌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두 아이들은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마튜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기에 더욱더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들의 이야기를 너무 빨리 읽어 버린 사실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세월을 지내왔고, 적절한 선을 유지하려 애쓰는 저자의 글을 다른 나라 얘기 인듯 읽어 버렸다. 그러나 마음이 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블랙유머를 읽는 거라면 좋았을 것을.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경험이 진득하게 녹아든 이야기들은 보통사람들이 무시하며 아무런 상관 없이 지나쳐가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이었다. 그런 보통 사람인 나를 덜 부끄럽게 만들어 준 저자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솔직하게 대면해준 저자의 노고가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메세지를 남겼을 거라 생각한다. 장애인을 보면 측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보통 사람과 좀 다를 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아이를 갖게 되더라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모든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유쾌할 수 있는 저자도 감사했고, 아빠를 웃겨줄 수 있는 마튜와 토마도 고마웠다. 장애 아이들을 두었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도 똑같은 인간이기에 많은 고뇌를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좀더 힘을 내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들보다 자신을 위해. 지금껏 잘해 왔다는 용기와 함께.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장애아이를 가진 부모의 솔직한 내면을 어김없이 보여주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장애인에 대한 무작정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어느 누구라도 읽어봐야 할 책이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장애아의 아빠는 웃을 자격도 없다. 장애아를 둘이나 가진 아빠는 곱빼기로 슬픈 모습을 보여야 한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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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터>를 리뷰해주세요.
스웨터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선물
글렌 벡 지음, 김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나약한 면을 안고 살아가기에 실수라는 것을 한다. 그리고 후회라는 것도 한다. 인생에서 관록이 생기는 것은 어쩜 그런 후회를 줄여온 단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젊은 날의 치기는 흔하디 흔하다. 열두 살 에디는 점점 후회가 깊어지는 행동과 말을 일삼으면서도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아이였다. 불러올 파장을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는 일을 줄일 수 있겠지만, 마음 속으론 브레이크를 당겨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에디는 멈추지 못했다. 에디도 처음부터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넉넉하지 않지만, 부족하지 않은 빵집 아들로 엄마 아빠와 행복하게 살았다. 아빠의 빵집을 돕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평범한 열두 살 소년 모습 그대로였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 모든 것이 행복이었음을 에디는 너무 빨리 깨달아 갔다.

 

  엄마가 아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생한다는 것은 에디는 충분히 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는 꼭 자신이 갖고 싶었던 자전거를 선물로 받고 싶었다. 일 년 동안 자전거를 받기 위해 살았다 할 정도로 착하고 유순하게 굴었다 자신한 에디는 꼭 그 자전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그러나 엄마가 에디에게 준 선물은 스웨터였다. 그것도 엄마가 손수 뜬 스웨터였다. 오로지 자전거만 기대하고 있었기에 스웨터를 받은 에디는 심통이 났다. 자전거를 사줄 수 없는 형편과, 그토록 자전거만을 바라며 지내온 시간이 분하고 억울했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외할아버지 댁에 가면서도 에디와 엄마의 공백은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가 다가가려 해도, 에디는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기에 더 심통을 부릴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댁에 가서도 아슬아슬하게 심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피곤한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할아버지도 지친 딸의 모습을 보면서도 에디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에디는 그제서야 괜한 심통을 부렸다고 후회하지만, 이미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에디가 탄 차는 사고가 난다.

 

  거기까지가 에디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불행은 오지 않을 것이며, 에디의 고집이 사춘기를 맞이한 소년의 치기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가 편안히 책을 읽어나가도록 두지 않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란 추측을 무참히 깨트리며 에디의 엄마는 사고로 죽는다. 그때부터 긴장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 내용이 그저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은 뒤집혔고, 앞으로 에디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빠를 잃고, 그 상처도 치유되지 않았는데 엄마까지 잃어버리다니. 자신의 고집으로 차를 몰다 엄마가 돌아가시다니. 에디는 이제 세상을 믿지 않았고, 자기 곁의 사람들도 다 떠나갈 것이라며 더더욱 못된 아이로 성장해 갔다.

 

  할아버지 댁에서 살게 된 에디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자신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자책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엄마가 죽은 것을 할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막말을 일삼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친구를 부러워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에디를 변화시키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신의 상처 속에서, 세상을 향한 불신에서 도무지 돌아설 줄을 몰랐다. 올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키지 않았으므로 예전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엄마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온통 엇나가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어 더욱 심술을 부렸다. 언제든지 손을 내밀면 도와줄 사람이 있고,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무척 사랑한다고 할아버지가 아무리 말해도 에디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해주는 이웃집 농장의 러셀 할아버지가 더 편안했다.

 

  이상한 몰골을 하고 있는 러셀 할아버지는 에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단지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에디는 러셀 할아버지 앞에서 엉엉 울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할아버지의 말을 조금씩 귀담아 들었다. 에디가 할아버지댁에서 가출해 폭풍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자신을 도와주었던 사람은 러셀 할아버지였다. 아무도 자신에게 오지 못한 상황, 어떤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셀 할아버지는 에디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에디가 그 폭풍우를 뚫고 나올 수 있도록 에디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에디 자신 뿐이었다. 러셀 할아버지의 말들은 익숙한 충고였지만, 난관에 봉착한 에디에게 그런 에디를 바라보고 있는 독자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에디가 무엇을 회피해 왔는지, 두려움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여실히 보여주면서 에디의 부모님은 에디를 위해 그런 두려움을 극복해 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에디는 충분히 고통을 느꼈기에 갇혀진 내면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며, 삶을 좀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꾸 엇나가는 에디를 지켜보는 것도 슬슬 지쳐가던 차에 제대로 된 깨달음이 왔으니 마음 놓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안심까지 저자는 무참히 깨트려 주었다. 정말 다행일 수 밖에 없는 반전이었지만, 에디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어 눈물이 나도록 독자를 내버려 뒀다는 생각에 조금 심통이 났다. 심통이 나는 것을 보고, 에디가 깨달은 것을 진정 깨닫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긴장했던 마음이 스르를 풀리면서 허탈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에디에게 닥친 불행을 보며 마음 아파 하고, 실재로 그런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보다, 왜 똑바로 서지 못할까라고 질책할 때가 더 많았다. 에디가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나왔던 고통이 나의 폐부를 찔렀기에 다행스런 현실이 허탈하면서도 씁쓸했으리라. 에디의 고통이 나에게도 이미 존재하기에 마음이 더 아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고통의 벌판에서 잘 이겨냈으면 한다. 자꾸만 어긋나는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나 혼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하면서 동류의식을 갖었으면 한다. 에디를 도와주었던 러셀 할아버지의 존재를 생각해 보면서.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내면의 상처를 엇나가게 하다 치유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옵션)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자아를 찾기에 혼동스러운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인생이란 길을 걸어가면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일은 말이다, 그 여행을 이어갈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믿는 거란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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