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산사태처럼 온다
박관용 지음 / KD Books(케이디북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세계가 들끓었었다.

나 또한 '북한이 왜 저럴까.' 그런 생각만 했었고 '설마 남한을 향해 쏘겠어?' 라며 안일함으로 대충 넘어갔던게 사실이다.

따져보면 가장 가까운 남한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태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게 어쩔땐 낯설다라는 느낌이 든다.

순간 긴장했다가도 금새 잊어먹기 일쑤다.

이러한 태도가 비단 나뿐만이 아닌 많은 국민들 그리고 지식층과 정치인들까지 퍼져있어 저자는 안타까움과 한심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외친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무엇이 안된다는 것일까. 우리를 떠나서라도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 북한을 파악을 해봐야 한다.

늘 북한이 터트리는 이슈에 뒷북을 치는 우리가 아닌 북한이 어떻게 흘러가며 우리는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까.

저자는 북한이 곧 붕괴될거라고 말하고 있다.

통일이 산사태처럼 오듯이 북한은 이미 무너졌고 최악의 상태에서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김정일 주석이 사망할 당시 북한이 무너질거라는 무수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더 기고만장해진 북한을 향해 무턱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북은 지금 핵실험에 초안이 되어 난리인데?

그러나 그 핵실험 부터가 문제이고 최악의 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북한의 경제와 사상은 상당 부분 폭발하고 있고 겨우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문제는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탈북자들과 식량난으로 인한 굶주림을 진작부터 보아왔기에 낯설지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목적은 다 제쳐두고라도 가장 큰 잘못은 어린아이라도 다 알 수 있듯이 드러난다.

자기의 백성들은 제쳐둔채 오로지 핵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한 내부 문제가 오래전부터 불거졌음에도 과연 북한은 어떠한 자금으로 핵을 만들려고 하고 어떠한 정책으로 북한의 국민들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계속 비난한다. 6.15 공동성명을 전제로 5억달라라는 거금을 건네주며 햇볕정책을 논하였지만 결국 북한은 지하에서 핵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폐쇠된 정책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인권은 생소함으로 만들어서 최대한 가두어 놓았다고.

또한 대한민국은 '우리끼리'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여 북한의 의도대로 가고 있고 상당부분 그렇게 움직여 주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북한이 해달라는 대로 하면 분단이라는 벽은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의 힘만으로 통일을 이룩하기가 쉽자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오히려 통일에 대한 환상만 그득할뿐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두려워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처럼 통일은 무의식 중에 뿌리 박혀 있고 현실은 인지하고 있지 못한 탓이리라.

 

여러가지의 통일 시나리오와 가설들을 내놓지만 현실은 끔찍스럽고 충격적이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한민족으로 뭉쳐 통일을 이룬후 세계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나라 북한이고 한반도는 각자의 길을 너무 많이 가버린 후다.

 

통일의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이 빠지지 않는다. 미국을 옹호하고 있다는 느낌도 많이 들었고 북한의 한없는 비난과(나의 감상적인 느낌이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한심함이 자주 드러나 불쾌했던게 사실이다.

그만큼 무지했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심어주자는 것인지 인지하지 못할때도 있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북한과 세계 정세, 대한민국의 대책등이 낯설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어도 저자가 하는 말은 상당부분 현실을 직시하고 옳은 발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거부감 속에서도 'no'라고 반박할 수 없음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통일에 대해서 북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멀게만 느끼고 무한한 감상에만 빠져 있었던게 사실이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라는 미련함 속에서 북한은 코웃음 친다. 언제든지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한을 이용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해왔다고.

다시 미련한 감상에 빠지고 싶다.

씁쓸한 현실을 알아버렸으니 그것을 피하고 싶고 한민족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워 우리는 하나라고 구시대적 산물을 꺼내어 보고 싶을 정도다.

현실은 급박하다. 그리고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

북한의 고립을 우리가 닮아가고 있고 그렇다고 북한의 신뢰를 받는 것도 아닌 세계의 왕따가 되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 하나 변화한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라는 잔물결에도 미치지 못한 희망이 솟구치지만 변화만이 살길이다.

우리의 인식부터 뜯어 나가고 하나 하나의 대안을 구축해 나가면 국민 하나 하나에 그 마음이 전달될때 통일은 급격하지만 혼란을 최소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을 파악하고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미국을 옹호해서 무엇할 것인가. 파악을 했음 대책을 세우고 비난을 했음 고치고 옹호가 아닌 맞설것은 맞서야 할 것이다.

그 모든것이 대화로 평화롭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많은 시간과 인내와 물질이 필요할 것이다.

산사태로 인한 매몰이 아닌 방어를 해나가려면 손을 걷어부쳐야 할 것이다. 붕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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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피터팬
제랄딘 맥코린 지음, 조동섭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피터팬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무려 100년동안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이런 표현조차도 무의미할 정도일 것이다.

나 또한 피터팬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을 통한 약소한  앎이였기에 후속편 '돌아온 피터팬'을 만났을때는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피터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는데 후속편을 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초반의 이끔에 금새 빠져들었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서서히 드러났다.

나만의 문제일수도 있겠지만 후속편의 우려했던 의문들도 드러났기 때문이였다.

 

어쨌거나 피터팬을 전혀 모르는게 아니기에 읽기엔 무리가 없을거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내가 우려했던 전작의 충실은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설자도 말했듯이 전작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완벽한 피터팬의 이해와 재미 만끽에는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책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은 책속의 모든것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없듯이 내가 알고 있는 피터팬에 대한 정보는 소소한 것이였다는게 바로 드러났다.

네버랜드로의 출발 그리고 후크와 그의 친구들과 팅커벨의 존재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시 그 전의 세계로 돌아간 아이들이(이젠 어른이 되어버린..) 네버랜드로 다시 떠난다.

거기서 부터 어색함이 비져 나온다.

 

꿈속에서 늘 악몽을 꾸며 네버랜드에 문제가 생긴것을 알아차린 다커버린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옷을 입고 요정을 찾아서 네버랜드로 인도하는데에 성공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나 네버랜드는 그 전의 네버랜드가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피터팬도 그 전의 피터팬이 아니다.

그러한 의문은 아이들과 피터팬의 재회에서 부터 다시 시작된다.

떨어져 지낸 시간들이 오래이긴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일 텐데도 만남은 시큰둥 하다.

아니 피터팬은 기억조차 못하는 것 같다.

그때부터 우후죽순격으로 튀어나오는 매끄럽지 않은 언어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이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초반의 시작에서 나는 아직 이야기의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은대도 페이지 수는 절반을 향해 있었고, 단락이 나뉘어 질때마다의 연결성 속으로 빠져들 수가 없었다.

시큰둥한 만남인건 이해한다 치더라도 피터팬은 자라지 않은 어린이라는 순수성이 심하게 떨어졌다.

전작의 피터팬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내 기억속의 피터팬은 리더로서의 자질이 충분하면서도 의리가 있는 아이로 남아있다. 그러나 다시 만난 피터팬은 날카롭고 제멋대로이다.

그리고 중간 부분이 넘도록까지 아이들의 꿈속에 나타난 네버랜드의 위기를 파악할 수 없었는데 피터팬은 후크의 보물을 찾아서 무작정 떠난다. 왜 찾아가는지 그게 아이들과 네버랜드를 위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의 의문의 풀림은 조금씩 나의 식상함과 낯섬을 이해시켜 주었다. 아이들의 모험에 동참한 서커스 단장 '라벨로'가 후크선장이였던 것이다.

악어의 뱃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째서 후크 선장을 못 알이봤는지 또한 피터팬이 왜 그렇게 변해버렸는지 모든것이 풀렸다. 그때부터 '돌아온 피터팬'에 빠질 수 있었다.

겉돌던 읽기가 조금씩 집중이 되었고 단순히 내가 가지었던 책속의 의문들을 진지하게 진단해 볼 수 있었다.

후크 선장을 닮아가는 피터팬, 그리고 어른의 삶을 잊어버렸다고 해도 몇몇 아이들은 자란채로 네버랜드에 존재하고 그 어른들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한 네버랜드.

그러한 문제들을 단순히 네버랜드의 문제만으로 돌려버릴 수 있었을까?

 

저자는 아이들만이 아닌 어른들의 읽힘을 고려하고 어른들의 언어, 생각 그리고 어른들의 문제까지도 중간 중간 넣었다고 했다.

전작에 충실했다던 저자는 단순히 전작의 묻어남이 아닌 교훈을 담고자 했다.

자라지 않는 피터팬이 후크 선장을 닮아갔던 것처럼 네버랜드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이들이 그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성격은 남아 있겠지만 그전의 네버랜드를 기대했던 내 생각 자체에도 무리가 있을 터이다.

단순히 아이들의 환상속으로의 모험이 아닌 이젠 어른의 세계를 경험한 아이들이 있기에 어른들의 세계를 나름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비난하는 모습들이 있다.

그 모습속에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책을 덮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또한 다시 어른으로 돌아간 아이를 경험하고 온 그들은 어떻게 네버랜드를 기억할 것인가.

 

내가 읽기에도 가벼움, 즐거움으로만 읽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과연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전작도 그러한 패턴이였다기에 전작을 독파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피터팬은, 책을 알린 영화나 동화책 속의 피터팬의 부분이였을 거라는 대에 동의하게 되었다.

후속편을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이 굳혀졌지만 피터팬에 대한 동경, 네버랜드에 대한 변함없는 불변은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 변함이 없지 않았나 싶다.

공식적인 후속편을 읽었음에도 피터팬의 이미지를 깨기가 쉽지 않을 것같다.

피터팬은 영원히 그 자리에 자라지 않는 아이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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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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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번 훑어 볼까?' 하고 꺼낸 책인데 너무나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해설까지 다 읽고 난 후지만 어안이 벙벙하며 갈피를 잡기가 힘들다.

뚜렷함 없이 두리뭉실하게 흘러가 버리는 것.

부산스럽고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상황.

이 책은 이런 느낌이였다.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의 대화에서 그런 느낌이 배어났고 '고도'라는 사람인 것 같지만(소년이 고도의 심부름을 받고 왔다고 했으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기다리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전에 읽은 '체인지링'의 '그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설며 정확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난해함이 꼭 닮아 있었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면서도 자주 망각한다.

그곳을 떠나려다가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며 늘 기다림을 번복한다. 그러나 끝내 고도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들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하루를 나무가 한그루 심어져 있는 언덕에서 보낸다.

그러나 언덕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의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틀간의 내용이지만 그들의 만난 50년전의 시점에서 고도를 기다렸는지 어쨌는지 모를일이고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간절함은 없다. 그냥 서로에게 각인시키며 고도를 억지로 대입시키고 있는 기분이였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실제로 두 주인공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고도를 기다릴 태세고 고도가 오지 않더라도 내일 또 기다리며 된다는 태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도는 정답이 없는 셈이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끝이였을 수도 있고 우리 같은 독자들에게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저자도 '내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고 하지만 그랬기에 저자의 고도는 평화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다.

각자의 느낌대로 고도를 생각하면 되는게 아닐까?

 

이 작품이 연극으로 무대화 되었을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주인공들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고도'라는 것을 각자가 상상할 수 있었기에 더 즐거워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형적이면서도 무형적인 것.

멀게만 느껴지는 가운데 늘 마음속에 존재하여 쉽게 맞이할 수 있는 것. 그런것이 우리에게 공통된 '고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고도는 주인공들처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그다지 추천할만한 기다림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어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가 목적이 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와 결과를 가져다줄지 전혀 모르는 상황처럼 고도는 그렇게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었다.

 

어제 만났던 소년,럭키,포조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듯 잊혀지는 존재라고 해도 고도는 꼭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의 목적은 무조건 고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여부와 가치보다 고도의 실재감이 더 중요했고 기다림을 통한 그들의 삶은 중요치 않았다.

고도가 나타난다해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은 그들.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왜 고도를 만나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왜 살아야 하며 왜 인생을 개척해가야 하는지 모른채 전진 혹은 시간 죽이기를 즐기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가끔은 무작정 고도를 기다려 보는 것도 마음 편할테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금껏 우리는 무작정 기다려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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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9-02-2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
 
브레이브 스토리 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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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

와타루가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요어문을 지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왔을때의 약간의 낯섬은 이런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와타루의 엄마가 꾸었던 꿈처럼 와타루의 여행을 분명 같이 목격했음에도 순식간에 현실로 튀어나온 이 느낌.

몽롱하다. 그리고 이 낯섬이 조금은 당황스럽다.

그래서 퇴마의 검의 힘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처럼 잠시 와타루의 여행으로 다시 돌아가보려 한다.

 

미쓰루는 결국 북쪽 제국으로 넘어가 다섯번째 보석을 손에 넣었다. 그의 목적은 보석을 채워 운명의 탑으로 올라가 여신을 만난 후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다섯번째 보석을 얻는 과정에서(그 전에도 그랬지만..) 커다란 혼란을 일으킨다.

결계로 봉인된 어둠의 거울을 부수고 자신은 보석을 얻었다.

그러나 어둠의 거울에서 나온 마족들로 북쪽도 남쪽도 전쟁터를 만들어 버리고 봉인을 푸는 과정에서 황제가 살고 있는 황도 소레브리아를 폐허로 만들지만 미쓰루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비전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의 최적의 결과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

미쓰루가 보석을 얻는 과정에서 비전의 사람들은 미쓰루가 보석을 얻는 과정에서 비전의 사람들은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인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미쓰루의 증오는 깊은 것이다.

현세에서 받은 상처가 벌어져 결국 자신을 망쳐 버리고 만다.

사람기둥의 가능성, 운명의 변화의 여부를 제쳐두고 운명의 탑을 눈앞에 두고 증오로 가득찬 자신의 또다른 모습과 싸우다 미쓰루는 패하고 만다. 그것은 죽음이다.

와타루 또한 증오로 가득찬 자신을 만나지만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증오였던 반면 미쓰루는 너무나 컸다.

 

와타루의 마지막 보석도 미쓰루와 동일한 것이기에 와타루는 운명의 탑으로 그리고 여신 앞으로 간다.

자신을 이용하고자 했던 목소리의 정체를 안 후 와타루는 운명의 탑으로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물음을 자연히 알게 될거라는 충고의 의미를 자연히 깨달아간다.

자신의 운명은 곧 자신의 비전인 지금의 비전이라는 것.

그 비전이 무사하지 못한다면 현세를 바꾼 듯 무슨 소용일까.

현세를 바꾼 듯 비전의 파괴와 앞으로 끊임없이 받고 살아야 할 상처와 분노, 질투 같은 감정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와타루는 비전의 평화를 소원한다.

그리고 그는 무사히 여행을 마쳤으므로 현세로 돌아온다.

사람기둥이 선발되는 하르네라도 끝났고 비전의 사람기둥으로 간택된 사람은 만나지만 여행자중의 한명인 사람기둥이 미쓰루일거라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은채 그는 비전을 나온다.

 

그리고 비전을 여행하기 직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비전은 잊어야 한다.

현세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자신의 상처받은 운명을 바꾼다는 것이 억지라고 생각했지만 이렇듯 자연스레 혹은 조금은 차분하면서도 당연하게 진행되어지는 결말에 한바탕 꿈을 꾼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와타루의 여행 목적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였지만 여행을 하면서 그 목적을 상실했다라기 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될 성숙미와 깨달음을 위한 여행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운명이기도 햇고 그 운명의 변화로 부모님의 운명도 바꾸고자 했던 것이였지만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이였다.

비전을 여행하면서 순리를 뛰어넘기 보다는 순리에 따르는 법을 배운 와타루였다.

그 순리의 정의를 명확하게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거스렸을때에 어떠한 결과가 오는지 미쓰루를 통해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결과를 예상했음에도 역시 비전의 평화를 자신의 평화와 연결 시키며 스스로 이겨내겠다는 결으로 현세로 돌아오는 와타루의 결심은 당연함직에도 허무감 또한 없지 않았다.

 

원래도 되돌려 놓는 것.

무형의 것으로 자신을 채우는 커다란 깨달음이지만 조금은 그 돌아봄이 너무 뻔한, 그러나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에 아쉬움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쉬운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역행 또한 인정하지 않음이다.

그것은 단계를 거치지 않은 뛰어 넘음으로 얻음보다 역효과가 많이 날 것이므로.

그러나 가끔은 억지로라도 그것을 뒤집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현실의 대리만족을 책을 통해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통쾌하게 뒤집을 수 있다는 것.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 싶은 도전 의식.

그것이 와타루와 여행하면서 너무 깊숙히 박혀 있었나보다.

그러나 현실은 말한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만 너의 진실됨을 끌어 내라고 말이다.

그래, 나는 와타루를 통해 그 진실의 파편을 보았으므로 그것을 이제 내가 모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단지 자신이 좀 없을 뿐. 얼렁 뚱땅 해치우고 싶을 뿐.

대충은 없다. 또한 역시 쉬움도 없는 것이다.

자꾸 길 밖으로 걷고 있는 나를 이제 진실로 끌어 오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와타루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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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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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알게 된건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 때문이였다.

'랄랄라 하우스'안에 책 얘기가 많아서 그 계기로 많은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눈여겨 두었던 작품에 이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을 검색해 보니 절판된 상태였다.

절판이면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상황이 그러하였기에 이 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에도 무한한 애정이 쏠렸다.

절판 되어서 구할 수 없다라는 사실때문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도서관가서 빌려 보라고 하였지만 빌려보는 책과 사서 보는 책은 엄연해 다른 법.

그렇게 방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책이 다시 나왔다.

재발행이 된것이다.

아아.. 또다시 솟아오르는 소유욕과 읽고 싶은 욕망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욕구는 너무나 넘쳐 책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 책이 풍자의 성격을 뛴다는 것을 알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만 넘쳤다.

뭐 그런게 책 파도타기의 매력이 아니겠냐며 스스로 위로하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300페이지의 얇지 않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흡인력 강한 가벼움과 유머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재미있다라고만 생각하며 넘길 수 없는 풍자가 있었기에 많은 공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약간의 오버와 정서의 다름은 이질감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키득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동물 애호가인 '잘나신' 아내의 영향 때문인지 책 속의 사건 속에는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개, 고양이,쥐, 앵무새 등 동물들로 통한 에피소드와 은근한 비유는 때론 통쾌하게 때론 씁씁하게 그려진다.

 

에프라임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생활속의 사건 사고는 그렇게 그려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솔직하게 너무나 유쾌하게 그려나가는 그의 생활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걱정이 들기도 했다.

저러다가 가족간의 화합이 깨지는것은 아닌가(화합이 이루어지는 것같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특한 유대감으로 가족이라는 틀을 형성해간다.

살면서 느끼는 괴뇌들 회의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면서 점점 그들에게 빠져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의 독특한 감각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체의 영향이 컸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더 색다르고 재미나게 하는 센스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에프라임 키숀이였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면 평범한 얘기도 재미 있고 매력적이 되어서 독자들에게 더 큰 여운을 주는 것이다. 이국적인 면들이 흘러 넘침에도 이렇게 내가 공감하고 같이 웃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솔직함이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심경들을 너무나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못말린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동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고 있음에도 솔직함을 맛보았다는게 왠지 역설적으로 들릴테지만 솔직함은 풍자와 묘하게 어울린다.

 

때론 그러한 가족의 일상이 처절해 보일때도 있었기에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며 치부해 버리기도 했지만 반면 즐거워 보이기도 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여러가지였다.

그래서 막상 책을 읽고난 후의 잔상을 남기려고 해도 남길 것이 별로 없고 무어라 한마디로 일축하며 말하려 해도 나의 생각은 산산히 흩어지고 만다.

그랬기에 이 가족의 독특함, 유쾌함을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다.

나와 같은 시간을 갖고 느끼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나의 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많은 요소를 담고 있지만 저자가 가장 추구하는 것은 유머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지 우스운 얘기 가운데에서 풍자의 의의를 찾느라 헤메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은 유쾌하고 싶을때 혹은 현실을 비판하며 불평을 터트리고 싶을때 곁에 두고 읽으면 즐거워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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