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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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자극성에 홀린 기분이다. 또한 강렬한 붉은 표지와 수상작이라는 이력은 더더욱 나를 옹졸아 들게 만들었다.

분명, 카지노라는 몽롱한 열기와 옛 여자친구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묘함은 번잡하고 우울할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시선을 두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따라가는 관심은 결국 나의 의지를 꺽지 못하고 내 나름대로 상상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발의 들여놓음이 카지노에 처음 가는 주인공처럼 흥분되는 것보다 또 다른 일상을 만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리둥절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만큼 흩어져 버리는 것들이 아닌, 잔상으로 남아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0억을 카지노에서 써버리자고 이혼한 옛 여자친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무작정 따라나선 주인공을 봤을 때 옛 여자친구(수진)은 분명 괴로움으로 삶을 낭비해 버리고 싶을 거라고(혹은 수중에 있는 돈을...) 생각했었다.

굳이 그 돈을 카지노에서 쓰겠다는 것은 잃을 걸 뻔히 알면서도 간다는 의미였기에 주인공에게 연락을 한 것은 이미 나의 의중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으리라.

그 의중이 단순히 이혼 후의 상실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정확히 그 의중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작 수진이 주인공을 데리고 카지노로 왔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보다 그들을 겉도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은 헤어진 연인이라는데에 의미를 둘법하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고 다시 만났다 하더라도 깨진 접시가 새것이 될 수 없듯, 그들에게는 남녀의 감정이 이미 떠난 후이다.

추억이 있고 서로에 대한 느낌이 있지만 새로운 사랑, 만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마치 잃고도 한 탕을 위해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풍기는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이임에도 주인공은 왜 수진을 따라온 것일까.

자신을 버리고 대학 선배와 결혼한 후 이혼을 했다는 수진의 연락이 설레임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수진의 요구에 거리낌 없이 따라온 것부터 주인공은 초지일관 우유부단 하며 결단력이 없고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에도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다.

답답해 보이는 주인공,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주인공.

그러나 그 주인공에게 다른 여자는 쉽게 접근해 온다. 여자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좀 모호하지만(7살의 명혜, 20대 초반의 윤미, 명혜의 엄마) 그녀들의 접근에는 무언가 주인공이 남달리 보였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카지노의 세계처럼 그 안에서 게임을 하며 그 세계를 들여다 보며 잠시 그곳을 벗어나기도 하는 만남이 있었지만 그 끌림은 내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지노의 세계를 깊이 파고 들었거나 끝나 버린 수진과의 관계에 대해 지지부진하게 끌고 갔더라면 분명 지루함을 느꼈을 테지만 적절히 흐름을 타고 방향을 바꿔가며 충동적인 욕구에 빠지지 않는 점은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이미지를 벗겨주어 안심이 되었다.

무작정 수진을 따라나선 주인공의 행동을 높이 살만한 것은 아니지만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하는 것보다 어쩜 그러한 경험이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활력이 될지도 모르겠다(그 댓가는 좀 치뤄야 겠지만..).

분명 그가 간 곳은 카지노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와는 다른 곳이고, 그 곳에서 느낀 인상은 유쾌할 수만은 없는 것이기에 그의 돌아감은 자연스러웠다.

수진이 주인공을 카지노에 데리고 온 의중이 전 남편앞에 모습 드러내기든, 게임을 하는 윤미의 모습이 상처로 인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든, 주인공과 수진이 했던 도박처럼 큰 의미로 자리 잡지 않는다.

그게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처사이고 주인공의 스타일이지만 수진과의 헤어짐이 아쉬운 것도 아니고 윤미와의 재회가 기대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에게 특별히 변화된 것은 없다.

확률을 믿고 카지노를 찾는 사람들에게 대박이 터지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인생은 때로 무상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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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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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움은 모든 것이 변한 후에 찾아 온다는 말처럼 어쩜 우리가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가 변해버린 나를 아쉬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변했든 상대방으로 인해서 변해버렸든 이유는 상관없이.

그래서 미쓰코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어쩜 그리워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할머니(유리)에게 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인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클터이지만 유리네 가서 살고 그 집 옥상에다 만다라를 만드는 것이라든지 부인이 좋아한 돌고래 비석을 만드는 모습은 자신을 변화 시켜서 부인을 그리워 하려는 것이 아니였을까.

그러나 유리의 집에 들어가 산다고 했을때까지 그 둘을 남녀의 관계로 보기 힘들었다.

미쓰코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도 그렇고 아르헨티나 할머니로 불리우는 유리는 그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자라서 탱고 스페인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유리가 사는 집부터도 소문이 무성했고 외모도 독특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미쓰코의 아빠가 갔다니 그리고 거기서 잘 지내고 있다니.

미쓰코는 엄마가 죽던 날 자리를 지키지 못한 아빠를 원망했지만 유리네 집에서 태연히 엄마가 좋아하는 돌고래로 비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용서한다.

그리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유리네 집에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미쓰코도 유리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아빠와 유리 사이에 사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유리의 나이가 쉰살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 채.

그러나 6년뒤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유리는 죽고 거기서 아빠는 끝까지 남아 아들을 키운다. 이제껏 죽은 사람들을 위한 비석을 만드는 석공이였으니까 앞으로는 산 사람들을 위해 만들고 싶다라는 신념을 가진 채.

 

어떻게 보면 이 얇은 책에 굉장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유리와 아빠 사이의 일은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가 그 이야기를 전할라치면 굉장히 말을 많이 하게 만든다. 묘하다.

그러나 더 묘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미쓰코는 받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동새의 존재를 감사히 생각하며.

이런 미쓰코를 의아하게 생각 하는 것은 유리가 미쓰코에게 말했던 엄마를 가슴 속에서 죽게 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못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서의 차이지만 그런 면에서 일본은 우리네 사고보다 좀 더 자유분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긍정적인 사고일 수도 있고 환경이 그렇게 만들 수도 있고 미쓰코와 유리만의 교류로 인해 그들의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미쓰코 엄마에 대한 죽음, 추억 그리고 유리에 대한 것들, 아빠와의 관계 등에 구차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마치 유리네 빌딩의 오래되고 케케묵은 가구와 먼지와 공기처럼 그냥 그렇게 늘 존재했던 것처럼 군다. 상처가 될만한 것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바탕 꿈을 꾸는 느낌이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러면서 어쩜 바나나의 책이니까, 나라의 삽화가 들어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명성이 있으니 나의 느낌도 어느정도 부응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별 느낌이 없는대도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당당히 이게 뭐야! 라고 외치지 못하고 바나나와 나라라는 유명세 앞에 나는 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에피소드로 끝날 분위기임에도 그들 덕분에 부각 되어지는 것들에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럽다.

그러나 아쉬웠다고 말하고 싶다. 독자와 책과 저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이고, 작가는 작가이고 그 낯섬이 조금은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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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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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먼저 책 겉표지에 대해서 얘기를 꺼내보고 싶다. 겉표지로 인한 책의 판단이 완전히 빗나간 나의 사례가 뻘쭘하기도 하고 조금은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이다.

나는 이 책 제목과 겉표지만 보고 인생에 대한 에세이나 수필 뭐 이런걸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마 '무덤'이 주는 뉘앙스 때문이였을 것이다.

삶의 마감을 드러내는 무덤. 그것도 나의 무덤이니 무언가를 아쉬워하며 독자들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의 겉표지는 이런 생각을 이끌듯이 조금은 딱딱해 보였고 어떠한 문구도 없다.

처음 보여지는 이미지가 이러하기에 책의 장르를 전혀 유추하지 못했다. 그래서 막상 책을 맞이했을 때에 흥미로운 전개와 청소년이라는 내 관심 분야의 소설이라서 속은 기분도 들고(나 혼자서 속고 속이고...) 아쉬운 기분도 들고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읽어 나갔지만 역시 이런 나의 마음을 보상이라도 하듯 잡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버리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2%의 아쉬움을 남긴채 로빈슨과 배리의 이별을 인정해야 했다.

 

처음 이 책이 시선을 끌었던 것은 독특한 구성이였다.

자신이 글을 써가면서 수시로 수정을 하며 다른 각도에서 같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도 하고 또 이야기와 상관없는 사건 보고서가 중간 중간 드러나기도 한다. 그 사건 보고서가 결국에는 이 책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사실을 알아서인지 마지막에 가서는 조금 맥이 빠졌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배리의 죽음 때문이거나 그들의 다툼 때문이거나 조금은 방식이 다른 사랑 때문이거나.

무언가 후련하지 않은 껄끄러움이 남아 버렸다. 아니면 동성애에 대한 보수적인 나의 성향 때문이였을까. 아마 그것 보다는 로빈슨의 행동, 마음상태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정곡을 찌르며 정리해 주었던 카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호함을 즐길 겨를 없이 카리로 인해 정의되어 버린 느낌. 그 느낌이 김빠진 콜라마냥 끝을 향해 갈수록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 여름 태양의 열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환희, 늦여름의 나른함처럼 보기 싫은 여름 그 자체. 사춘기 청소년들의 세계는 그렇게 전위되어가고 그들을 따라가기엔 나의 뒤쫓음이 너무 느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정지해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식어가는 청춘이기에.

 

실제 책의 배경이 되는 계절도 여름이였기에 나의 변덕이 더 자주 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배리와 핼(로빈슨의 애칭-로빈슨은 싫어 했지만)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바다 한가운데였고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은 7주. 그리고 핼과 다툰 후 핼을 찾아 나서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죽은 배리. 그 다툼의 원인은 카리와 하룻밤을 보낸 배리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였고 배리는 그걸 못 견뎌 했다. 그는 속박당하고 구속 되는게 싫었으니까. 그러나 핼에게 배리는 그냥 전부였으까.

그들이 동성이긴 하지만 어느 연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애틋함, 사랑이였다.

그들 안에는 그러한 사랑만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에 겪는 진로, 성, 자아발견등이 얽혀 중심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배리의 죽음으로 인해 핼과 배리의 추억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사그라들어 버렸고 그 단절이 복잡함을 끊어 주었더라도 아쉬웠다. 그들의 만남이 계속 되었다면 동성애에 대한 복잡함이 드러나 버리겠지만 요즘 동성애가 그리 낯선것만은 아님에도 역시 아직까지는 민감한 문제이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엔 이 소년들은 너무 어리다는 것. 그리고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을 배재할 수는 없었다.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기엔 너무 뻔하고 그들의 만남이 지속되는 것은 고통이며 배리의 죽으으로 인한 단절은 잔인하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미심쩍음이 남았으리라.

 

배리가 핼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 자기가 먼저 죽거든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는 말 때문에 핼은 본의 아니게 무덤을 훼손하고 춤을 추다 체포된다.

배리의 무덤에서 춤을 추는 배리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네가 죽어서 기쁘다는 은유적인 뜻이 담겨 있는 내 무덤에서 춤추기는 배리에게 반대의 기분이였으리라. 그렇게 죽어 버린 배리가 야속하기도 하고 죄책감으로 괴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그랬으리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한 몫 했을 테지만.

그들의 혼란, 그들의 상실감은 그렇게 분출 되었지만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배리와 핼을 보며 그들의 혼란을 겪을 때 이끌어 주는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에게 무기력감으로 다가가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p. 70

 

 사무엘 하 1장 16절에 있는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 앞에서 외친 아찔한 문장,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값졌거늘'

 

- 정말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무엘 하 1장 16절이 아니라 1장 26절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성경 구절이 약간 다른 것은 이해하나 구절이 차이가 나는 것은 잘못된 표기인지 아니면 원래 다른건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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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시집 - 체 게바라 서거 40주년 추모시집
체 게바라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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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서거한지 40주년을 기념하여 개정판 시집이 나왔다.

체 게바라의 평전, 자서전을 읽었기에 시집에서 오는 기대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되려 시집이라기 보다는 소책자 같은 분위기에 체 게바라의 명성에 힘입어 나온 분위기 같아서 경계하는 눈빛을 내 스스로가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시집의 서문에는 엮은이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열정에 힘입어 체 게바라를 느꼈던 기억을 조금 되살려 보기로 했다.

 

체 게바라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체 게바라 시집을 읽는다면 조금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시詩 라는 장르에서 오는 부담감을 마주하고 이 시집을 대했을 때 이게 시 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며 사색에 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일기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편지의 발췌문일지라도 그의 열정과 고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겐 오로지 혁명이 전부였고 혁명을 위해서 명예, 권력을 버리고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에서 전사 하기까지의 기록은 그래서 더 진솔하다.

시 라는 틀에 박힌 형식으로 자신을 가두지 말고 무엇이 체를 그토록 혁명의 한가운데 있게 하는지 그 시선을 보길 바란다.

 

그에겐 오로지 민중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득하다.

자신의 안위보다 평등과 혁명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유를 누리기를 열망한다.

한 취사병이 대원들보다 자신에게 음식을 더 주자 많은 사람들의 평등을 모욕했다며 쫓아낸 일화만 보더라도 그에게 혁명의 성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일궈내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랬기에 쿠바를 떠나는 그에게 씨를 뿌리고도 열매를 따 먹을지 모르는 어리석은 혁명가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그 열매는 내 열매가 아닐 뿐더러 씨를 뿌려야 할 곳이 많아서 행복하다며 유유히 사라진다.

그런 그의 모습은 초라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아 보인다.

게릴라 전투를 이끌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대원들의 사기, 식량, 전략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행복을 잃지 않은 모습이 부러울 정도다.

자신의 가족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못해도 행복하고 혁명으로 죽어도 행복하지만 행복을 위해서 겨누었던 총구가 반대로 향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 절절하다.

 

샤르트르 말마따나 '20세기의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칭송을 떠나서 그는 젊은이들 마음에 무엇을 던져 주었기에 이토록 그를 열망하며 닮길 바라는 것일까.

그의 위대함, 통찰력, 뛰어남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똑바로 걸어가는 그 걸음일 것이다. 도저히 일기를 쓸 수 없는 상황, 책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들을 행하는 의연한 그의 소소한 모습이 혁명가의 날카로움에 감춰지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의 열정을 높이 사는 것이다.

 

기나긴 평전과 자서전에 맛 보았던 것들을 그의 짧은 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다양함에서 오는 멋을 더 부가시켜 줄 뿐이였지만 이 글 속에 체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혁명을 결심하기 전에 고뇌 가득한 젊은이였지만 혁명을 시작한 후에는 뚜렷한 확신과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그 길은 분명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었을텐데 그런 것보다는 안타까움, 이상을 품는 열정이 더 드러난다. 그래서 그를 보고 있어도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씁쓸한 것이 아니라 뿌듯한 희망이 차오른다.

그가 꿈꾸고 일궈내고 바라던 자유를 그로 인해 맛보고 있으니까.

그의 열정은 곳곳에 퍼져서 많은 이들 마음에 따뜻한 불을 당겨 주었으니까.

앞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그를 잠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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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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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로 시작된 러시아 문학의 세번째 작가 고골의 작품을 읽었다... 막심 고리끼, 뿌쉬낀, 고골.. 그 외에도 다른 러시아 작품들도 읽고 있는 중이다..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을 읽으면서 시작된 러시아 문학가들의 파도타기가 정말 정말 좋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고골의 외투를 보고 '러시아 문학은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말할 정도로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에서 '외투'의 내용이 많이 나왔다.. 읽을 당시에는 외투를 몰랐으니 궁금증만 더해졌고.. 읽고난 후에는 어느 부분에서 '외투'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골의 '외투'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의 모티바가 되었다는 건 알 것 같다..
분위기와 이야기의 흐름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가난으로 인한 삶의 묘사는 처절할 정도였다.. 거리사 특유의 생활방식과 시대성을 들여다 볼수 있는 작품이였다.. 러시아 문학을 여러번 접하다 보니...
19세기의 러시아를 만나면 나도 그 시대 사람 같다...
그들의 삶에 나도 녹아들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고골의 작품을 대했을때에 러시아의 특유성에 대한 의문과 낯설음은 없었다.. 그래서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는 작품의 깊이를 좀 더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에서는 총 다섯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실재로 20살무렵 관리가 되려는 꿈을 안고 뻬쩨르부르그에 상경했다가 낭패를 보고 그 배경으로 쓴 단편이 이책이다.
고골만의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고.. 억측스러우면서도 어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세계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다섯편의 단편 중 '외투','초상화','네프스끼 거리'에서의 주인공들은 허무할 정도로 죽음이 쉬웠다(?).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거나 멋있고 의미있게 때론 장황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결론에 익숙한 우리는.. 고골의 단 한마디 '죽어버렸다'라는 글 앞에서 잠시 허무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허무함 속에는 그들의 죽음이 끝이거나 간단한 것 같아도.. 그런 죽음 속에서도 세상은 잘 도아간다는 씁쓸함과 단 한번뿐인 허무함과 소중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골은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나간다. 고골만의 독특함으로..
괴기스러움과 우울 그리고 웃음이 있지만.. 그 요인들이 고골 단편 특징을 잘 살린 것 같았다..

도스또예프스끼.. 뿌쉬낀.. 톨스토이 등.. 너무 깊은 문학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러시아 특유의 재미와 풍자와 해학이 깃든 고골을 만나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쉬우면서도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고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느꼈던 이 느낌들을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나 보다. 특히나까지 붙여가며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고 하는거 보니.. 마음 마음이 모두 틀린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왜 이리 잔말이 많아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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