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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문득 그리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움은 모든 것이 변한 후에 찾아 온다는 말처럼 어쩜 우리가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가 변해버린 나를 아쉬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변했든 상대방으로 인해서 변해버렸든 이유는 상관없이.
그래서 미쓰코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어쩜 그리워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할머니(유리)에게 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인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클터이지만 유리네 가서 살고 그 집 옥상에다 만다라를 만드는 것이라든지 부인이 좋아한 돌고래 비석을 만드는 모습은 자신을 변화 시켜서 부인을 그리워 하려는 것이 아니였을까.
그러나 유리의 집에 들어가 산다고 했을때까지 그 둘을 남녀의 관계로 보기 힘들었다.
미쓰코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도 그렇고 아르헨티나 할머니로 불리우는 유리는 그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에서 자라서 탱고 스페인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유리가 사는 집부터도 소문이 무성했고 외모도 독특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미쓰코의 아빠가 갔다니 그리고 거기서 잘 지내고 있다니.
미쓰코는 엄마가 죽던 날 자리를 지키지 못한 아빠를 원망했지만 유리네 집에서 태연히 엄마가 좋아하는 돌고래로 비석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용서한다.
그리고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유리네 집에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미쓰코도 유리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아빠와 유리 사이에 사내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유리의 나이가 쉰살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 채.
그러나 6년뒤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유리는 죽고 거기서 아빠는 끝까지 남아 아들을 키운다. 이제껏 죽은 사람들을 위한 비석을 만드는 석공이였으니까 앞으로는 산 사람들을 위해 만들고 싶다라는 신념을 가진 채.
어떻게 보면 이 얇은 책에 굉장한 줄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유리와 아빠 사이의 일은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가 그 이야기를 전할라치면 굉장히 말을 많이 하게 만든다. 묘하다.
그러나 더 묘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미쓰코는 받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동새의 존재를 감사히 생각하며.
이런 미쓰코를 의아하게 생각 하는 것은 유리가 미쓰코에게 말했던 엄마를 가슴 속에서 죽게 하지 말라는 말을 나는 못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서의 차이지만 그런 면에서 일본은 우리네 사고보다 좀 더 자유분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긍정적인 사고일 수도 있고 환경이 그렇게 만들 수도 있고 미쓰코와 유리만의 교류로 인해 그들의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미쓰코 엄마에 대한 죽음, 추억 그리고 유리에 대한 것들, 아빠와의 관계 등에 구차한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마치 유리네 빌딩의 오래되고 케케묵은 가구와 먼지와 공기처럼 그냥 그렇게 늘 존재했던 것처럼 군다. 상처가 될만한 것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바탕 꿈을 꾸는 느낌이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러면서 어쩜 바나나의 책이니까, 나라의 삽화가 들어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명성이 있으니 나의 느낌도 어느정도 부응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별 느낌이 없는대도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당당히 이게 뭐야! 라고 외치지 못하고 바나나와 나라라는 유명세 앞에 나는 기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한바탕 에피소드로 끝날 분위기임에도 그들 덕분에 부각 되어지는 것들에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럽다.
그러나 아쉬웠다고 말하고 싶다. 독자와 책과 저자와의 공감대 형성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이고, 작가는 작가이고 그 낯섬이 조금은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