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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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 행위 자체에 위로를 받았다. 때론 책을 읽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읽는 목적을 정확히 알려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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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직업 - 독자, 저자, 그리고 편집자의 삶
이은혜 지음 / 마음산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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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 년 동안 독서에 변화가 있었다. 읽은 책의 양이 늘어나면서 소소하게 남기던 리뷰가 현저히 줄었고, 늘 갈망했던 인문 책이 독서 목록에 꽤 많이 채워졌다. 나의 독서는 해외문학에 치우쳐져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이면에는 인문학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아쉬움을 채우고자 나름대로 책장에 읽고 싶은 인문학 책을 꽤 꾸려놓았는데(저자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 어떻게 이런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두었을까.’하는 감탄할 일이 잦은 요즘이다.), 만날 계기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다 독서모임을 만들었고 나처럼 책을 좋아하면서 인문 책도 즐겨 읽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함께 읽고 얘기하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인문 책의 매력을 통해 나름대로 독서의 균형이 맞춰졌다.

 

그러니 사회과학에도 더 많은 역사학과 문학이 침투해 전문 분야(전공)가 지닌 편향성을 보충해주고, 문학도에게는 더 많은 역사와 철학, 사회학 등이 읽을거리로 주어져 먼 훗날 사람들이 자기 탓을 하며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이 역시 개인이 스스로 깨닫고 균형추를 맞춰야 할 몫이 더 크긴 하지만 말이다. 183쪽

 

코로나 바이러스가 절정에 달해 모든 게 정지되고 아이들과 집에만 있었던 지난 3월에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건 독서였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깊은 밤 칼 세이건의『코스모스』를 한 챕터씩 읽었고, 이 책을 함께 읽던 이들과 마스크를 끼고 만나 얘기를 나눴던 시간들이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었다. ‘편집자의 이력서’에서 저자는 밀란 쿤데라와 헤르만 브로흐의 말을 빌려 소설은 ‘자신만의 도덕’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20대의 대부분을 문학 위주로 읽어 온 나에게는 엄청난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책 읽는 거 외에 한 게 뭐가 있느냐’라는 말까지 들어본 터라 소설이 주는 내 나름대로의 ‘도덕’ 관념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울컥할 뻔 했다. 편집자의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인문, 사회, 과학서, 문학’을 두루두루 읽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 평범한 독자로서 ‘편집자’에 ‘독자’를 대입하고 싶은 이유는 아마 동일할 것이다.

 

보통의 독자들은 책을 읽으려면 삶의 일부를 잘라내야 하고, 스스로 책 읽는 훈련을 해야 하며, 돈까지 지불해야 한다. 물론 책의 가격은 책이 담고 있는 가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여타의 욕구는 언제나 지적 욕구를 쉽게 이긴다. 30쪽

 

한 온라인 서점에서는 매년 도서 구매 이력 통계를 내준다. 매년 책값으로 100만원~130만원을 지출하고 있는 나는 가격보다 그 책들이 나에게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더 생각해본다. 때론 보여주기 독서, 욕심이 앞선 소장에 집중할지라도 기꺼이 ‘삶의 일부를 잘라내’고, ‘책 읽는 훈련을’ 하며 ‘돈까지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그저 좋다. 그런 의미에서 15년 간 ‘독자, 저자, 편집자의 삶’을 살아온 저자가 풀어내는 시선과 사유는 다양한 의미에서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 편집자라는 직업이 주는 생경한 세계, 독자로서의 고민, 저자로 한 발짝 내디딘 과정이 얽히고설켜 독자에게 벽을 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가온다. 변변찮은 내 삶의 궤적을 그 동안 읽어 온 책들로 되짚어 보고, 팍팍한 현실을 만나고 싶은 책과 앞으로 만날 책들로 채우며 조금의 기대를 덧입혀본다.

 

독자는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시점에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 그리하여 한 때 정신의 귀족이라 불렸던 작가들조차 독자로서는 ‘지적 평민’으로 남아 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즉 아무리 천재적인 독자일지라도 드넓은 책의 바다에서 지적 평민이란 꼬리표가 언제든 자신한테도 붙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76쪽

 

독서를 하면서 나는 꽤 일찍 ‘무지’를 인정할 시점을 만났다. ‘천재적인 독자’인 적이 없었기에 ‘지적 평민’이란 단어도 과분할 정도로 선인들이 남겨 놓은 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찰 때가 많다. 그럼에도 궁금하면 책을 구입하고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언급된 책을 검색하고, 검색하던 책이 내 책장에 있는 것을 보며 기뻐하느라 나름 분주했다. 이제 그 분주함을 독서로 전환하려 한다. 발터 벤야민의『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를 구비해 두었고,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조르주 페렉『인생사용법』, 아달베르트 슈티프터『늦여름』을 책장에서 꺼냈다. 이제 ‘책의 바다’를 기꺼이 유영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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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 발터 벤야민

 

<읽는 직업>을 읽는데 이 책이 언급이 되어서 바로 주문했다.

배송이 늦어져서 어제야 도착한 책!

정말 궁금하다.

 

 

 

 

알다시피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은 벤야민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그는 이 원고를 출간하기 위해 처음 탈고한 1933년 이후 1939년까지 수정을 거듭해 분량을 3분의 1 이상 줄였고, 의미심장한 서론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세 군데 넘는 출판사에서 하나같이 "글이 어렵다"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다행히 벤야민은 사후 한나 아렌트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고, 책은 20세기 산문의 고전이 되었다.


『읽는 직업』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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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팀 켈러의 인생 베이직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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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가 이토록 죽음을 숨긴다는 것은 모든 문화 중에서 우리야말로 임박한 죽음의 불가피성을 부정하며 산다는 뜻이다. 17쪽

 

죽음은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한 끗 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되도록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언젠가는 닥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미루고 있는 듯하다.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이 최후의 상태라는 사실이 삶을 부조리하게 만들며,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쾌락과 성취에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역설’했듯이 죽음이 곧 닥칠 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죽음이 오는 시기를 알 수 없다면,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는 어떤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T. S. 엘리엇은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곧 끝이 아닐까 봐 그게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32~33쪽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과거 어느 때 못지않게 도덕주의로 흐르면서 타인에 대한 비판을 일삼는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고, 벌하고 추방하는 방식은 종교의 정결 의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했다. 즉 ‘인간은 도덕적 반사(절대도덕, 죄와 심판, 죄책감과 수치심의 벌 등에 대한 신념)’를 버릴 수 없다고 했는데,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존의 기본 신념을 버렸고, 회개하거나 은혜와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유구한 자원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마치 레이더망에 걸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도덕주의에 어긋난 행동을 보이면 신랄하게 비난하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 같다. 하지만 회개와 은혜,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유구한 자원을 알고 있는 나에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자는 죽든 살든 결과와 무관하게 늘 죽음을 이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에 이제 죽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리를 지금까지보다도 더 행복하고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뿐이다. 42쪽

 

그렇다고 태연하게 늘 죽음을 이길 수는 없다. ‘죽음은 본연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비정상적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울라고 할 뿐만 아니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알면서도 그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고 노하시기까지 하셨다고 말한다. 바울도 슬픔 뒤에 ‘소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소망이 바로 예수님이 정복하신 ‘죽음’이라는 사실을 믿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되 깊은 소망을 품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죽음’을 우리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되거든 당신을 거기로 인도하신 분이 목자이신 예수님임을 잊지 말라.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시며,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을 힘과 깊이와 성장을 여러모로 더해주신다. 그러니 그분의 임재를 감사하고, 자기연민을 물리치고, 기도로 그분을 구하라. 110쪽

 

죽음을 앞둔 이를 위해 기도할 때나, 추도 예배를 드릴 때 시편 23편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 말씀에는 ‘애통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가 총망라 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의미가 좀 더 가까이 와 닿는 것을 느낀다. ‘죽음’이 더 이상 추상적인 일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죽음과 같은 절망과 고난과 어려움은 산재해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임재를 기억하려 한다. ‘모두에게 버림받으신 채 홀로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늘 내 곁에 계신다는 사실처럼 든든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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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0주년 개정증보판)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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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을 마주할 때 대략 걸리는 시간을 예상하며 책을 읽었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랬던 독서가 요즘에는 흔들리고 있다. 기억력도 기억력이지만 엄청난 흡인력이 아니면 온전히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훌쩍 줄어들었다. 그만큼 독서집중력을 끌어올리기가 갈수록 힘이 들었는데, 이유를 나이탓으로 돌렸다.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집중력이 나이탓도 있겠지만 ‘뇌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과거 방식을 스스로 바꿔 스스로를 새롭게 정비하는 능력’ 즉 가소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식이 주로 대화를 통해 교환되던 구어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이동했으며, 쓰기가 생각을 표현하는 주된 매개체가 되었다. 이 변화로 인해 궁극적으로 지구상 모든 이들의 생활과 뇌가 바뀌었으므로 이는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97~98쪽

문자가 혁명적이었던 만큼 나의 뇌 구조를 바꿀 만큼 혁명적인 등장은 무엇일까?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변화를 모두 겪어본 나로서는 아무래도 스마트폰의 등장이 아닌가 싶다. 10년째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나와 처음 접해본 통신기기가 스마트 폰인 현재의 아이들과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이 가져온 변화는 엄청나다. 저자는 뇌의 가소성과 다양한 실험을 근거로 인터넷과 기술 발전으로 왜 장시간 집중할 수 없는지를 다양한 시선에서 접근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지식을 함양하는 존재에서 전자 데이터라는 숲의 사냥꾼이나 수집가로 진화하고 있다. 229쪽

이 책을 읽은 느낌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를 방해하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광고 메시지와 SNS 업데이트, 자질구레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쉼 없이 알람으로 울리고 있다. 그것에 정신이 팔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고, 그만큼 집중력은 떨어지고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하기 위해 준비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불필요한 일들이 끼어들면서 버려지는 시간들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꼈다.

‘독서는 깊은 사고의 형태로 자리 잡’은 만큼 ‘숙련된 독서가는 고요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지 소란스러운 사고를 지닌 이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독서의 매력을 알고 있기에 지금껏 종이책만을 고집했었다. 매리언 울프는 “온라인에서 무엇을 읽을 때 우리는 깊은 독서를 가능케 하는 기능을 희생시킨다고 한다. 우리는 정보의 단순한 해독기로 되돌아간다. 깊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읽을 때 형성되는, 풍요로운 정신적 연계 능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203쪽)” 라고 했다. 책보다 더 오래 붙들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읽는 뉴스 기사는 가독성과 판단력을 흩트렸고, 알고리즘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영상의 향연에 빠져있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 마련이다. 이런 습관에 익숙해져 있다 책을 펼쳤을 때 집중력이 떨어지고, 깊은 독서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더 나은 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뇌’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243쪽

저자는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사용으로 우리의 시각적 예리함, 스크린이라는 추상적 공간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또 다른 자극들을 재빠르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왔다고 말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더 나은 뇌가 아닌 다른 뇌를 지니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부모세대, 현재의 나, 그리고 자녀세대의 뇌 구조가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집중력을 자꾸 잃어가는 이유, 그리고 이미 영상세대인 자녀세대에게 나의 경험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의 기억이 온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조셉 드루는 “기억을 하는 뇌는 기억을 처음 형성하는 그 뇌가 아니다. 오래된 기억을 현재의 뇌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은 업데이트되어야 한다(309쪽)”고 말한다.

어쩌면 뇌는 자기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크게 인지하고 못하는 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나를 산만하게 하고 자꾸 어긋나게 한다면 다시 돌아갈 필요성도 있다. 저자가 이 긴 책에서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날로그라는 느낌이 들었다. 깊이 사고 할 수 있고, 집중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은 독서처럼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 혹은 공간이라고 말이다. 뇌는 이렇게 변해왔고, 변하고 있지만 훈련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듯이 정보의 홍수에 헤매며 생각을 차단시키는 게 아닌 생각하고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도 이미 경험했듯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지만 결국 이전의 나쁜 습관(알림 서비스, RSS 리더기)으로 돌아갔다고 고백했다. 미국인의 여가형 독서시간이 2018년에는 16분으로 하락했다고 하는데, ‘뇌의 소모’를 낳는 것으로부터 도피가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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