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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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펼치면 안 됐을 책이었다. 깊은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꺼낸 책이었는데, 낮보다 감성이 말랑말랑해지는 밤에 펼친 이 책은 그야말로 눈물이 마를 틈을 주질 않았다. 16년 전, 25살에 읽었을 때와 43살 엄마가 된 뒤에 읽는 책은 완전 달랐다. 빌리 조 – 죽은 남동생 - 남동생을 낳다 돌아가신 빌리 조의 엄마 이야기가 나올 때면, 우리 엄마 - 나 - 내 아이들 이런 식의 엉킴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뭉쳐진 휴지가 자꾸만 쌓여갔다.


극심한 가뭄과 황사, 대공황은 1930년대 미국의 팬핸들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버려진 땅에 외지인이 들어와 과도한 경작으로 숲과 초지가 훼손되어 발생한 황사가 삶을 터전을 일구고 싶은 누군가에게 엄청난 시련으로 다가온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10대 소녀가 그려낸 시선이 더 참담했던 건 너무나 덤덤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사랑하지만 칠 수 없는 상황과 빌리 조의 연주까지 썩 내켜 하지 않는 엄마. 그런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빌리 조를 지켜보는 것도 최악의 자연환경 속에서 밀 농사를 포기하지 않는 아빠에게 놓여진 환경이 너무나 처절했다. 내가 손을 내밀 수 있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음식과 모래가 들어올 틈이 없는 집,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빌리 조의 화상, 그리고 엄마와 남동생의 죽음. 16년 전 읽은 판본에서 빌리 조가 고통을 당하고 헤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너무 처연하고 가슴 아파서 작가마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고쳐서 쓰고 싶었다고 하니 고통은 비단 빌리 조에게만 오는 게 아니었다.


그건 사고였다. 난로 옆에 기름통을 놓아 둔 아빠, 그걸 물로 착각하고 부어버린 엄마, 불붙은 기름통을 빌리 조가 문밖으로 던졌을 때 아빠를 부르러 간 엄마에게 쏟아진 건 사고였다. 그 사고로 결국 엄마와 남동생이 죽었고, 사람들은 빌리 조가 기름통을 던진 이야기만 했다. 나중에 빌리 조가 가출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기름통을 놓아둔 아빠도, 불붙은 기름통을 던진 자신도 용서했을 때 그 과정을 낱낱이 지켜봤기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를 화상으로 붙어버린 손가락 때문에 칠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알아갈 때, 엄마가 있었다면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신도 엄마를 사랑해주었을 거라는 속 마음을 들을 때 너무 힘들었다. 나와 내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상상보다,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힘들었다고 생각되는 과정들이 스치면서 미안해졌다. ‘내가 빌리 조 보다 상황이 낫구나’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족 구성원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안정감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겪는 일이다. 기쁨 속에서 감춰진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는 감춰진 기쁨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아픔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둘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 아픔을 통해서 성숙하는 길을 찾고, 변화를 모색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아픔을 넘어서게 될 것인가이다. 283쪽 _뉴베리상 수상 연설


빌리 조의 시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나빠질 일도 없었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빠가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 루이즈가 서서히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아빠와도 조금씩 마음을 터놓게 되는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빌리 조가 황사를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리 조는 황사에서도 벗어나고, 자신에게 처한 시련에서도 벗어나려고 가출을 했다.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빌리 조는 달라져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황사도, 자신이 환경도 모두 받아들였다. 팬핸들에 황사가 걷힌 것이 아니라 빌리 조의 마음속 황사가 걷혔다. 빌리 조의 ‘추수감사절 기원 목록’처럼 촉촉한 대지의 팬핸들, 아빠의 미소와 루이즈, 엄마의 피아노를 돌보는 아빠, 손이 전혀 아프지 않는 상황, 엄마와 동생의 무덤에 피어난 양귀비꽃, 그리고 이 집에 산다는 확신이 모두 이뤄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제 집 안에서 행복한 피아노 연주가 가득하길, 엄마와 남동생에 대한 기억이 더 이상 슬픔으로만 간직되지 않길,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더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내 눈물이 증거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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