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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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편 「바빌론의 탑」을 읽고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미쳤다!”였다. 좀 격한 표현이긴 해도 당연 ‘놀랍다’라는 뜻이었다. ‘이 작가는 천재구나!’를 첫 단편으로 경험하는 책을 만난 게 얼마 만인지! 지금은 새로운 개정판이 나왔지만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정확하게 13년 전에 선물 받았다. 출판사에 입사해서 맞은 첫 생일에 팀장님이 선물해 준 책이다. 그때도 엄청난 책이라고 말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에 순수고전문학을 읽던 나에게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제목과 표지는 영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묵혀둔 게 13년이 지나버렸고, 오히려 차기작인 『숨』을 읽는 중에도 이 책은 꺼낼 엄두도 내지 않고 있다가 첫 단편을 읽었는데 정말 엄청난 책을 묵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완독하고 났을 때 느낌은 13년 동안 잘 묵혔다는 것이었다. 물리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저자가 그려낸 과학 SF를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면 질색하던 내가 『코스모스』를 읽고 어설프게나마 이런저런 과학책을 읽어둔 덕분에 이 책에 나오는 이론들과 세계를 거부감없이 받아 들이다 보니 저자가 더 천재라고 느꼈다. 그리고 저자가 한 작품을 쓸 때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과학적인 이론을 내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더라도 어떤 작품이든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바빌론의 탑」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바빌론의 탑」의 하늘의 천장이 있다는 상상력과 무거운 층이면서도 그 무엇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며, 천장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데도 탑을 쌓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게 여러 의미로 낯설지 않았다. 당연히 성경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데 하늘의 천장을 파고들어 갈 고용된 광부 힐라룸의 시선에서 보여주고 있어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자가 만들어 놓은 탑의 내부를 내가 또 다른 상상력을 덧대어 새로운 탑을 만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폐쇄공포증과 고소공포증을 경험하는 것 같은데도 그 안에서 태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탑이 나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또 다른 공포도 있었다. 신비감과 기괴함이 한 데 섞인 탑의 내부를 타고 올라갈 때 결국 하늘의 천장은 무너졌고 홍수가 일었다. 그리고 힐라룸은 극적으로 천장에서 위로 헤엄쳐와서 하계(下界)의 동굴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가 바깥으로 나와 깨달은 건 부드러운 점토판 위에서 그림이 조각된 원통형의 인장을 대고 굴리면 원통이 남긴 자국이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는 원통 인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야웨의 창조는 밝혀짐과 동시에 숨겨져 있으며, ‘인간은 우주에서의 자기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자는 원통 인장이란 표현이 이 작품의 우주가 양의 곡률(positive curvature)를 가지는 4차원 시공연속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라고 했는데 힐라룸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의 결말이 얼마나 정교한지, 얼마나 흥미롭고 저자가 대단한지 그저 소름이 돋았다.


「이해」라는 작품은 뇌손상을 입은 레온이라는 남자가 임상실험에 참여하는 데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지능이 올라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치열한 두뇌 싸움 끝에 ‘나는 <말>을 이해하고 그것이 작용하는 수단을 이해한다. 고로, 나는 붕괴한다.’라는 끝맺음 또한 엄청났다. 용두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재로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는지 경이로웠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를 통해 ‘헵타포드(칠족 생물이라는 뜻)’와 언어를 교환하면서 루이즈는 선물을 받는다. 헵타포드가 루이즈에게 미래를 보여주면서 태어날 아이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와 딸과의 추억이 함께 전개되어 처음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딸과의 일상은 헵타포드가 보여주는 미래였고, 아이의 성장의 끝도 보여준다. 끝을 알기에 과연 루이즈가 자기가 본 미래를 선택할지 안 할지 무척 궁금했는데, 루이즈는 딸을 만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딸을 만나는 시작점에서 비로소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건 루이즈이 인생이자 딸의 인생이다. 


세종대왕 님을 만났으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을 저자가 펼쳐놓은 언어학도 완벽하지만 고통을 알면서도 똑같은 선택을 하는 루이즈를 보는 내내 찡했다. 그 이유를 나는 모성애라고 보았다. 아이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스킨십을 통해 모든 걸 느꼈는데, 그 아이를 잊을 수 있을까? 어떤 힘든 과정이 있더라도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나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조금 더 도움이 필요한 내 아이를 키우면서 이 아이가 내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성장과정 중에 놓여 있기에 힘들지 않은 순간이 없다. 그럼에도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를 엄마로 만들어 준 것이 신기하다. 이런 감정은 어쩌면 ‘언어라는 정의 속에는 기회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 사이의 관계는 임의적이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아이를 통해 얻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비언어적인 사실에 더 깊은 감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이즈에게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주역이라는 역할에 기꺼이 감사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루이즈는 기꺼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삶을 선택하고 자신의 인생을 펼쳤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도 ‘나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도 시작될 수 있다.


이 작품은 SF의 매력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완벽함을 설명할 재간이 없지만 앞서 언급했던 비언어적인 사실이 주는 감동을 충분히 느꼈다. 그걸 언어로 표현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탄생시킨 저자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비언어적인 공감이 크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지만 그걸 잘하는 저자가 있으니 만끽하면 된다. 문학작품에는 인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 같은 감정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때론 문학이 불편하고, 반대로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 더 먼 곳으로 확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과학과 인간의 삶을 수준 높게 엮어 문학의 시야를 한층 끌어올렸으며, 독자 또한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우리가 하계에 살고 있다면 저자는 마치 하계와 우주를 넘나드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깊게 관여하며 많이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학과 문학, 인간과 우주의 경계를 나누기보다 우리의 사고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음을 이렇듯 증명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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