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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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 덮인 책장의 일이란 //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바람의 지문>

  이 시집이 처음 나왔을 때 책 속의 시들을 만났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시집을 꺼내 들었다. 어떤 기분으로 이 시집을 읽었을까 하는 마음 혹은 내가 메모지를 붙여놓은 시구에서 그때의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메모지를 붙여놓은 시구를 다시 읊어보니 공감 가는 부분보다 왜 이런 부분에서 멈칫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서 똑 같은 글을 읽으면 나의 상황에 따라, 나의 마음에 따라 글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하지만 시집을 다시 펼쳐 들면서 이 시집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건 시의 서정성 때문이었다는 기억을 떠올렸다. 시집을 대할 때마다 늘 나의 마음은 무거운데, 시는 늘 어렵고 내가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서정적으로 다가온 시들을 만나면 일단 반갑고 안심이 된다. 어려운 시를 해석해 낼 재간도 다른 시각으로 시를 만날 자신도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혹은(곡해할지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시를 읽는 시간에 안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시는 나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그의 모든 시를 마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를 읽는 내내 시라는 세계의 광활함을 맛보았고 내 마음에 들어온 몇몇 문장에 잠시 멈춰 음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궤도를 이탈한 별들에게 눈길을 주는 걸 몹시 염려해 평범한 게 좋은 거라고 주술을 멈추지 않지

<나는 발명해야 할까> 중

  어쩌면 시를 대하는 내 마음이 내게 익숙하지 않은 문학이라는 이유로 눈길 주기를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평범함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낯선 것을 대하는 두려움을 그대로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좀 더 열고 낯선 것을 대할 때 의도하지 않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나는 겁쟁이라 이렇게 시집 하나를 읽는데도 용기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에서의 동경보다 오독을 즐겨 할 것 <차갑게 타오르는>

  얼마나 매혹적인 시구인가! 이 시구에 용기를 얻어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내 멋대로, 그야말로 형편없는 오독의 시간을 즐겼다. 그 결과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지만 틀에 박힌 생각으로 제대로 읽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단 부담감은 적어도 이 시집을 읽는 동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맘껏 읽었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조강석 문학평론가는 그야말로 바람에 부치는 앨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바람에 대한 노래들로 넘쳐난다. (중략) 급히 오해를 막자면 이 시는 바람과 구름에 바치는 노래가 아니라 그들에게 부치는 노래라는 것이라고 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 노래들이 내 마음에 닿았다. 바람과 구름을 만날 때마다 시인의 시가 생각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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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3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문장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고, 다 읽으면 감정의 여운이 느껴지는 서정시가 좋아요. 생각날 때마다 자꾸 읽고 싶어져요. 그런데 가끔 서정시를 표방하는 시집 중에는 너무 유치하고, 시인의 명함을 내밀기 부끄러운 것도 있었어요.
 
외로울 때마다 너에게 소풍을 갔다 - 영국의 시골농장에서 보낸 천국 같은 날들
강은경 지음 / 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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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워킹 홀리데이를 꿈 꾼 적이 있었다. 낯선 곳으로 가면 나를 좀 더 제대로 들여다보고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는 나는 실행에 옮겨보지도 못했고 그렇게 하고 싶은 걸 상상만 하다 20대를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나의 20대를 되돌아보면 암흑의 시간 같다. 첫사랑과의 5년의 교재도 실패로 끝이 났고, 뭘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책 속으로 도피하다 20대를 보내버린 것 같다는 아쉬움은 아직도 남아있다. 좀 더 젊을 때(지금도 젊다고 생각하지만나를 만나는 방법을 알고 실행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왜 지금 밀려드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영국의 시골농장에서 보낸 저자의 글을 보면서 부러움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낯가림도 심하고 용기가 없어서 낯선 곳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결코 쉽게 영국으로 간 저자가 아님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뭔가를 실행에 옮기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환경이 바뀌는 것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기에 저자의 행보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정쩡해서 영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곳에서 좀 더 뭔가를 찾고 싶어 공부를 하면서 시골농장에서 일을 하게 된 저자. 농촌에서 자란 나는 농사를 짓는다는 게, 혹은 농가에서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고되고 일이 많은지 익히 잘 알고 있다. 농사는 끝이 없고 일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주말이나 방학 때 농사일에 투입이 될 때면 지루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고 그냥 게으름 피우며 놀고 싶어 힘든 부모님 앞에서 철딱서니 없게 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농장에서 일하게 된 저자를 보면서 나는 절대 저렇게 일할 수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나 일은 고됐지만 영국의 도시에서보다 시골에서의 삶이 훨씬 더 저자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농부의 삶에도 그리고 농사를 짓는 것에도, 빵 같은 필수불가결한 전제가 있다. 농부가 되고 싶다면, 노동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157)

  농장에서의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저자의 말처럼 노동을 피할 수도 없고 두려워할 틈 없이 밀려드는 일거리에 지레 겁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투성이가 되면서도 점점 농부의 모습을 보면서 제대로 농부의 삶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농사에 진정성을 부여하게 되면서 주변의 이웃이나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관심을 갖는 여유도 생겼고 피곤한 몸을 이끌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남겼다. 씨앗을 뿌려 수확을 하듯 저자는 영국의 농장에서 농부로써의 삶뿐만 아니라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일의 자양분을 꾸준히 일굴 수 있었다.

  저자를 보면서 워킹 홀리데이를 꿈꾸고 좀 더 나은 나를 만들며 내 자신을 더 들여다보고 싶었던 20대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저자도 어쩌면 영국으로 건너간 게 나와 비슷한 이유였겠지만 영국 농장에서 몇 개의 계절을 보내면서 내가 참으로 세상의 끝과 같이 먼 이곳에서 찾으려 했던, 특별한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결국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에(258)’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어쩜 나도 그걸 몰랐기에 그냥 낯선 곳으로 떠나고만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까란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좀 더 잘 알기 위한 시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귀를 기울이면>이란 애니메이션에서 언니는 왜 대학에 갔냐는 동생의 질문에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찾기 위해서 대학에 갔다는 대답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기회를 만들어가는 게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열정적으로, 때로는 무모하게 뛰어들 수 있는 게 20대라고 생각했기에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보낸 나의 20대에 미련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 나에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30대라고 해서 늦은 것도 아니며 내 마음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현실에 안주해버리지 않는 것. 지금은 때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 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걸 잊지 않는 마음.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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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톡, 톡툰
샤이보이 (Shyboy) 지음 / 애니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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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40대가 되는 게 두렵지 않다고. 40대가 되면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것이고 그럼 좀 더 자유로워질 테니 40대가 너무 기다려진다고.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는 현재 내 나이도 징그럽지만 40대는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진다. 지인의 육아에 대한 고충을 듣고 나니 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나도 40대가 되면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아니면 지금의 생활을 더 그리워하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움으로만 바라보는 것보단 무언가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훗날 나이 먹은 내 모습을 보면서 적어도 허무함을 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당신과 나는 결코, 거저 이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다! 모든 고개에서 값을 톡톡히 치른 것이다. 그렇다. 나이란 그 사람이 힘겨운 삶의 고난들을 얼마나 많이 이겨내며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빛나는 훈장인 것이다. (145)

  그런 면에서 40대 아저씨(?)의 이런저런 속내를 담아 낸 이 웹툰에 내가 빠져들 줄은 몰랐다. 40대는 나에게 먼 이야기고 아줌마도 아니고 아저씨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도, 공감하는 일도 쉽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만화가를 꿈꾸며, 치열한 직장에서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는 가정에서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웹툰에는 감성이 있었다.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현재를 살아내는 모습과 좀 더 나은 미래의 모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내가 힘을 얻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지금 안아주어야 한다.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오래 전에 용서했다고 말해야 한다. 찾아가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136)

  저자가 일상에서 뭔가 허황된 것을 꿈꾸고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지 않았다면 이런 글에서 멈칫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게 경험을 통해, 톡톡히 치른 연륜에서 삶에서 얻어냈다고 생각하니 그의 빛나는 훈장의 이면을 존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이들 옆에 오래 있어줄 수 있을까? 이들이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줄까 하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이 들 때마다 바로 표현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늘 뒤로 미루고 있다. 저 글을 보는 순간 남편에게,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혼자 되뇌었지만 얼굴을 보며 자주 표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순간을 모면해버리면 후회와 번민만이 남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일상과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참 열심히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육아를 핑계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으며 이런 글을 보면서 뭔가 기록을 남겨 보고 싶으면서도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또 다른 지인은 내게 일상이든 뭐든 꾸준히 남겨보라고 충고한다. 지금은 육아 때문에 정신도 없고 여유도 없겠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났을 때 허무하지 않게, 그런 글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글을 남겨보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 마음을 덜어내고 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웹툰을 보면서 나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없어서 아쉽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함을 앎에도 실행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여전히 자투리 시간에 책 읽기 바쁘고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벅차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좀 더 진솔한 나를 만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현실감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기대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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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6
이홍섭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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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는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무기력감과 권태가 나를 짓눌렀고 친구들을 만나면 수다스러웠지만 가족이나 낯선 이들 앞에서는 침묵했다. 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었고 내가 그 곳에 속하게 되면 고향이란 공간의 진부함을 털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서울로 향했고 6개월 만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잃은 게 더 많은 채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고향에서의 삶은 더 무기력해지고 참담했다는 게 내 기억이다.

  그 실패 이후로 다시는 고향을 떠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 내가 20대도 아닌 30살 여름,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20대 때 그렇게 갈망했던 대도시가 30대의 나에겐 두려움의 대상이고, 적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살 곳, 내가 일할 곳이 확실해 환경의 어려움은 없었지만 마음의 어려움이 늘 잠재했다. 일을 하면서 이 직장을 떠나면 아무런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내가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결혼을 했지만 그 뒤 얼마 안가 직장을 관두게 되었고, 임신으로 찾아 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견디지 못해 남편과 함께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은 // 순전히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때문이란 걸 // 이 아침은 깨우쳐주네

<자작나무숲을 지나온 바람> 중

  저자처럼 내가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던 또렷한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고향이 주는 안락함과 가족이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대도시의 치열함을 달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과 가족이 30대가 되어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고향에 돌아오자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리움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이 모든 기억이 저자의 시를 읽으면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대도시와 나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그곳의 치열함을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향에 돌아와 소소하게 살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기로 했다.

누군가 떠나고 // 누군가 다시 돌아오는 이 터미널

<터미널 5> 중

  고향으로 돌아올 때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고향의 문턱을 밟은 나의 감회가 분명 달랐을 거라 생각한다. 수없이 이용한 버스터미널. 기차역과는 달리 버스터미널이라는 공간의 애잔함과 쓸쓸함과 남겨진 자와 떠나간 자의 발걸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 왜 그런지 내가 경험한 고향의 버스터미널은 그런 느낌이었다. 20대에 장거리 연애로 버스터미널을 들락날락하며 하루의 다양한 시간의 터미널을 경험해서인지 버스터미널은 나에게 그런 이미지로 남아있다. 저자의 시를 통해 내가 막연하게 느낀 감정들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느꼈다. 저자의 시선과 표현들이 나의 느낌과 완벽히 맞닿아 있다는 기분은 아니었지만 터미널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느낌은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았다.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 (중략) //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 불빛을 잘못 보고 //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등대> 중

  이 구절을 읽으며 떠나간 사랑, 떠나 온 사랑에 대한 회한을 담기도 했다.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을 내가 이제는 한 곳에 정착한 배가 되어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이 아닌 내 삶을 대입해보면 내가 현재 낯선 항구에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또렷하지 않지만 방향이 잘못 되진 않았는지 자주 점검하는 편이다. 그런 점검의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내용물이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는 마음만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시집이 그 역할에 약간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시는 늘 나에게 어렵고 저자가 그려놓은 이미지에 늘 겉돌기만 했었는데 자신의 삶을 작은 목소리로 묵묵히 드러내는 이 시집의 서정성이 나의 마음까지 위로해 주었다. 이 시집을 읽으며 현재와 미래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 과거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가 된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꼭 어려운 시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용기를 북돋워주어서 다른 시집에도 기웃거릴 여유까지 만들어 준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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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1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흔적이 배어있는 문장, 저는 이런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의 성함이 생소한데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

안녕반짝 2015-02-10 23:18   좋아요 0 | URL
저도 생소한 시인이었는데 그나마 서정시여서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아요.
시는 여전히 어려운 분야지만 이런 시집을 만날 때면 시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열리는 것 같아요^^

2015-05-06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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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르 콩데'는 삶의 단조로움에서 예견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피난처였다. 내가 언젠가는 놓아둘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일부-가장 좋은 일부-가 그곳에 있으리라. (30쪽)

 

  나의 공간적 피난처를 굳이 꼽아 보라면 집 근처의 스타벅스다. 거리가 가장 가깝기도 하고 수많은 카페의 체인점 중에서 분위기나, 커피맛이 가장 입맛에 맞기도 해서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가장 좋은 내 일부를 놓을 만큼 편한 곳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카페에다 늘 사람이 북적이고, 철저히 개인주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 콩데'에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일부가 그곳에 있을 거라는 말이 참 부러웠다. 나에겐 그런 공간이 없을뿐더러 나 자신의 가장 좋은 일부가 무엇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작품은『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은 게 전부다. 결코 녹록한 책이었노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안개에 휩싸인 듯 몽롱한 분위기에 저자의 작품을 더 탐독해보고 싶다는 열망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되면서 그의 작품이 국내에 더 출간이 되었고 그 작품들 가운데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먼저 읽게 되었다. 뭔가 사색적이면서도 사연이 깃든 추억이 있을 것 같은 카페. 그 카페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었고 그 안에 펼쳐진 이야기 또한 궁금했다. 얇은 책이었지만 가볍게 페이지를 넘길 만큼 부담 없는 책은 아니었다. ‘르 콩데’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루키라 불리는 한 여인의 정체. 자클린 들랑크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으며 결혼도 했고 남편에게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다는 통보를 한 채 집을 나온 여인. 그 여인의 과거가 각각 다른 화자에 의해 드러나자 그 여인의 실체가 궁금해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당겨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문득 최근에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나란 무엇인가』에서 얘기한 여러 모습의 ‘나’, ‘분인’이 이 여인과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화자로부터 드러나는 루키이자 자클린 들랑크라는 여인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옮긴이는 ‘단편적인 기억의 파편을 통해 과거를 정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네 명의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보고 생각하는 바를 종합하여 전체적인 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작품의 큰 구도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지닌다.’라고 말하고 있다.『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전자의 구도를 취하고 있는 작품임을 경험했기에 각기 다른 화자로 드러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르 콩데’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매력적인 여인으로,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갔으며, 미성년자일 때 보호자 없이 밤거리를 헤매다 경찰서 조사를 받은 일, 다른 여인과 친구가 되었지만 무언가에 홀리듯 마약에도 손을 뻗은 일. 이 모든 게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네 명의 화자의 이름도 섞이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섞여버리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파리의 수많은 지명들, 지리적인 위치들도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런 요소들이 자칫 ‘기억의 파편’들일까봐 긴장을 하기도 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삶을 한 부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왕이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남길 바랐다. 그녀의 현재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지켜봤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길 원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을 갖기도 전에 그녀는 네 명의 화자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켜 본 독자의 눈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화자들과 얽혀있는 그녀의 이야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그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던 그녀의 사라짐은 허망감을 주기도 했다. ‘르 콩데’에서 시작된 그녀와의 인연이 송두리째 날아간 기분까지 들었다. ‘오직 도망치는 순간에만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103쪽)’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관계를 만든다는 것, 안정적이 된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일상의 안온함 속에 마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란 옮긴이의 말이 그녀의 사라짐을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그녀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한 마디로 말하긴 힘들다. 나 자신도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정의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며 때론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위를 지켜보면서,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혹시 놓쳐버린 게 있는 건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또렷하진 않지만 이룩한 것보다 놓쳐버린 게 더 많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여전히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무언가가 나를 붙들고 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침울한 기분이 들어 루키이자 자클린 들랑크의 삶이 내 안으로 침잠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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