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지음, 조미자 그림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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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동시집을 읽는 게 좋아졌다. 내가 어른이니 어른들이 쓴 시집을 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시의 세계를 이해하기엔 내적 자양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시가 점점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종종 동시집을 읽으면 뭔가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지면서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나서 좋아지는 것이다. 나이만 어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고 동시가 가진 순수함과 솔직함, 눈높이가 나에게 딱 들어맞았기 때문인가 보다.

저녁을 먹고 다 같이/텔레비전을 보는데//

할머니는 말없이/ 허리를 퉁퉁 치시고/다섯 살 동생은/푸르르푸르르 입술을 떨고/발가락을 꼼지락대던 아빠는/발바닥을 박박 긁기 시작했으니 <우리 집 일기예보> 중

  지난 금요일 저녁 괜히 무릎이 시렸다. 내가 무릎이 시리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라서 거의 정확한 편이다. 토요일 아침에 날씨를 살피니 하늘이 맑았는데 왜 무릎이 시렸을까 하는 순간, 오후가 되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무릎이 일기예보가 따로 없다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내 무릎은 비오기 전이 아니라 흐리기 전날 시린데 그래서 여름 장마철이 나는 참 싫다. 저 동시를 보면서 아이가 한참 입술을 떨 때 비오는 날을 대강 예상하곤 했었는데 그때의 모습도 괜히 떠올랐다.

  동시집을 읽을 때마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학교가 파하면 숙제는커녕 가방을 마루에 던져둔 채 온 동네를 쏘다니며 놀기 바빴던 나였는데, 그때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남겨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때는 동시라는 개념도 별로 없었고 내가 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의 내 마음 상태는 어땠는지 괜히 궁금해졌다. 그때의 느낌을 살려서 동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교 다닐 때 남겨놓은 일기장을 구할 수도 없으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나의 어린 시절이 야속하기만 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이렇게 순수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어떠한 대상을 보면서 그대로 바라보거나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꼈을 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듯한 동시들을 만날 때면 세상 때가 덕지덕지 묻어버린 나는 어릴 때 어땠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비밀>이라는 시를 보면 첫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동수동수난좋아 참좋아!’란 또 다른 시가 나타난다. 이 시를 읽을 땐 전혀 몰랐는데 해설을 보고 발견했다. 어릴 때의 나도 짝사랑이란 걸 해봐서 참 귀엽게 느껴지는 시였다. 내가 짝사랑했던 대상들도 떠오르고 좀 더 커서는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해 애태우던 시간들도 떠올라 지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마음(결혼하면 다 이런가?^^)이 멋쩍어진다.

  얼핏 장 자크 상뻬 할아버지 삽화를 보는 것 같은 그림들과 동시들을 함께 읽으니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모든 동시들이 순수하고 밝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대상을 드러내고 마음을 덜어내는 시를 읽다 보니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게 된 것 같다. 책장에 시집도 많지만 몇 권의 동시집도 함께 꽂혀 있다. 시가 어려울 때 동시집을 읽어야겠단 다짐을 하면서 맑아진 이 마음이 금방 사라지지 않고 좀 더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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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4
E. L. 닥터로 지음, 정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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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가족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나’는 어렸고 성인이 되어 그렇게 사라진 부모님의 진짜 진실과 마주하려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사소한 오해가 아닌 소련에 핵무기 기밀 사항을 넘기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한 부모님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 부모님을 잃고 입양되어 함께 살아 온 여동생 수잔이 자살기도를 했다는 이야기로 이 소설은 시작되고 있다. 1953년에 일어난 로젠버그 부부 사건을 토대로 했으며 주인공 ‘나’ 다니엘은 그들 부부의 아들이다. 결코 남매에게 부모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장할수록 압박하며 달려드는 고통의 그림자는 수잔의 자살기도로 인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로젠버그 부부 사건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도 몰랐다. 거기다 책 제목만 보고 성경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저자는 실제 사건에 허구를 더해 다니엘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다니엘이 동생의 자살사건으로 인해 부모의 진실에 다가가기로 마음먹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의 부모가 왜 그런 처사를 당해야만 했는지에 관한 자료 공부도 한다. 하지만 진실을 알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어린 시절 가족의 치과의사이자 부모님을 사형에 이르게 한 증인이었던 인물을 만나야 했던 것이다.

  그 과정까지 다가가기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로젠버그 부부 사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며 다니엘의 현재 시점, 어린 시절, 부모님의 추억, 그 사건을 되짚는 과정들과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까지 나열되자 모두 엉켜버린 느낌이었다. 읽기는 멈출 수 없었지만 안개속을 헤매듯 과연 다니엘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개인간의 진실도 아니고 스파이 누명을 쓴 부모님의 진실과 맞서기엔 다니엘은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가 완벽한 진실에 다가간다는 보장도 없었고, 고통으로 기억되는 부모님이지만 오히려 감춰두는 게 나은 건지도 모른다며 내 스스로 타협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거기다 부모님의 진실에 다가가면 갈수록 순진하게 국가를 철석같이 믿고 이상주의에 젖어 있는 아버지와 마주하는 일이 점점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보통사람처럼 철저히 억울하다며 이런 처우를 하는 국가를 향해 신랄하게 욕이라도 해 주었다면 더 나았을 거란 안타까움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국가를 믿고 곧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부모님에게 닥친 운명은 사형이었다. 그 과정에서 역사의 희생양으로 사라진 부모의 무죄의 여부보다 부모를 그렇게 만든 역사의 흐름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와서 부모의 진실을 밝힌다고 해도 사라진 부모가 돌아올 수도 없으며, 고통으로 얼룩진 남매의 어린 시절을 보상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예회복에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무언가 통째로 잃어버린 그들의 유년시절이 혼란으로 치달아 종점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게 사건의 진실로 가는 길인 것만 같았다.

  저자는 로젠버그 부부의 유무죄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았으며 다니엘은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 쳐도 진실을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동생 수전은 부모의 무죄를 밝히려 최선을 다하지만 실패하자 그녀의 운명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다니엘은 ‘모든 것은 포착하기 어렵다. 신도 포착하기 어렵다. 혁명의 도덕성도 포착하기 어렵다. 정의도 그렇다. 인간성도. 담배 자판기에 쓸 25센트짜리 동전도.’ 라며 부모의 사건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여전히 변하는 건 없었다.

  옮긴이는 ‘닥터로의 주된 관심사는 이 사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 담론으로 변형되는 과정에 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랬기에 나에게는 어려웠던 소설이었다. 어떠한 사건에 관해 명확하게 알고 있고 넓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있을 때에 저자의 관심사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취약할뿐더러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요양이 부족하기에 난해했던 소설이었지만 인간이 하나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처절한지 적나라하게 봐버린 느낌이다. 결국은 이념에 희생된 자신의 부모님을 어떠한 방식으로도 구할 수 없었던 한 개인, 다니엘의 모습을 보면서 국가에 속한 국민인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회의감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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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라이프 - 나의 희망, 기쁨,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석은옥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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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기 전에 23개월 된 아이에게 기도하며 자자고 하면 고사리 손으로 기도손을 만든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지만 짧은 기도 시간도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잘대는 아이를 보며 언젠가는 스스로 기도하는 날이 오겠지 한다. 아멘을 따라하게 한 뒤 그때부터 아이를 재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쉽게 잠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말썽을 부리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며 심지어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런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가면 만삭인 몸이라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이에게 궁뎅이 팡팡을 하기도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컨디션이 좋을 땐 아이에게 관대해지곤 하는데 늘 오락가락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을 결혼하기 6개월 전에 읽었으면서도 아이 교육에 관한 부분을 보면서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아이를 빨리 갖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고 나에게는 먼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장애인 남편을 백악관 정책차관보까지 만들고 그 모든 뒷바라지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저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결혼해서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결혼은 시작부터 특별했기에 그런 생각이 더 들었을지 모르나 결혼식에서 하게 되는 서약, 아플 때나 기쁠 때나 힘들 때나 항상 곁에 있어주겠다던 다짐을 살아보니 지키기가 참 어렵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힘이 들면 남편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는 내가 다시 한 번 저자의 삶을 살펴보니 참 부끄러운 게 많았다.

  시각장애인 남편 뒷바라지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가난한 몸으로 미국까지 건너가 남편을 대단한 사람까지 만든 것도 모자라 자녀 교육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 모든 바탕에는 신앙이 있었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아이들을 키워나갔다. 그 모든 일을 감당하면서도 ‘행복은 내가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어진 모든 상황을 감사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155쪽)’며 모든 것을 자신을 향상시키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나또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신앙을 가진 남편을 만나 신앙으로 세워진 가정을 꾸리려고 다짐했으면서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느낄 때가 참 많다. 그래서 저자의 자녀 교육법,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분명 믿음으로 가능한 건데 왜 나에게는 멀게 만 느껴지는지 괜한 신세한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결코 아이들은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106쪽)

  힘이 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깨닫는다. 사람에게 위로 받기 바라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낮아지고 무릎 꿇어 기도할 때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품고 살아간다고 고백하면서도 현실에서는 늘 일치되지 못한 삶을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나를 보면서 위선적이며 믿음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도 늘 기도가 부족한 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비단 앞으로 커 나갈 내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내 남편, 믿지 않는 내 가족, 그리고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하는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구절이다. 기도할 때 내 스스로가 빗나가지 않을 것이며 내가 기도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늘 게으름에 빠져 있는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 책을 읽어가다 자칫 생각을 조금만 잘못하면 힘든 과정 속에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낸 아내이자 엄마의 신앙 고백이 아닌 자랑으로 여기고 질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철저히 믿음으로 이뤄진 고백으로 들으면 배울점이 참 많으며 대단하다고 감탄사를 내 뱉을 수밖에 없다. 나는 저자처럼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지만 앞으로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더 많이 사랑한다고, 내 가족이 되어주어서 고맙다는 고백을 자주 하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려고 한다. 직접 하려고하면 낯간지럽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한 이때에 고백을 미루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재가 얼마나 귀한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고, 이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피부로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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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동 사거리 만복전파사 반달문고 33
김려령 지음, 조승연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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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만 보고 구입하는 책이 있다. 김려령 작가도 나에겐 그런 작가 중 하나다. 이번에는 새 동화가 출간되었기에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를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좀 더 발랄하고 상상력을 감화시킨 작품이었다. 오래된 만복전파사의 트럭을 타고 여름휴가를 떠나는 순주와 진주 남매의 이야기였다. 휴가를 가기에는 지나치게 짐이 많은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이 산 속의 시골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은 이사를 빌미로 그곳으로 여름휴가를 온 것을 몰랐지만 이내 눈치를 채고 이런저런 고민에 빠진다.

 

  산 속에 위치한, 어쩌면 앞으로 그들이 살게 될 집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아이다운 고민을 하는 사이에 그렇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쭉 나열될 거라 추측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진주가 벽난로 굴뚝을 타고 올라가는 일이 생기고 동생을 찾기 위해 순주도 함께 올라갔다 이상한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순주는 진주를 찾으려 기웃거리다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감자 로봇, 심벌즈를 연주하는 병정 인형, 한 쪽 뿔이 부러진 사슴을 만나며 진주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가게 된다.

 

  순주가 만난 이상한 로봇 같은 인형들도 이상하지만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온통 고장 난 물건들만 가득한 그곳이 참 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상상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산타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서 진주와 재회하고 이상하다고 느낀 그곳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이들이 믿음이 생길수록 전구가 켜지는 트리하며, 고장 난 장난감을 수리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준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등 지붕 위에 있는 공원처럼 생긴 이 공간이 순주는 영 이상하기만 하다. 그러나 산타할아버지를 믿지 않으면서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뭔가 상상 속으로 들어온 느낌을 받으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산타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끝이 날 줄 알았던 독특한 세계는 또 다른 공간이동으로 이어진다. 만복전파사에서 친구 유동이와 함께 작별의 선물로 카세트를 가지고 놀다 이사 간 어린이집이 있던 곳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벽시계의 소리를 듣고 뛰쳐나왔을 뿐인데 이상한 곳에 도착하고 만다. 갑자기 자기 집 된장에 앉았던 똥파리를 찾는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복장도 배경도 이상하기만 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순주와 유동이가 살던 시대도 아니고 교과서에서 나온 자린고비 할아버지 같단 생각이 든다. 순주와 유동이는 자린고비 할아버지의 집에서 교과서에만 나왔던 할아버지의 실체를 경험하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자린고비 할아버지가 엉뚱한 계기로 변화하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어디 그뿐이랴. 신분을 숨긴 암행어사까지 만나게 되고 그곳으로 들고 간 카세트에 관심을 보이는 암행어사를 현재 세계로 데려오고 만다. 그리고 암행어사와 함께 이사준비를 하는 순주네의 모습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의 시작에서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라 생각하고 마음 편히 읽다 지붕위의 세계에서 산타할아버지를 만나고 또 다시 자린고비를 만나는 공간이동을 보면서 저자의 상상력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암행어사가 현실 세계로 함께 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하긴 했지만 아이들이 다른 세계를 경험했듯이 그도 그 세계를 경험하고 무사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거란 안심이 생겼다. 왜 그런 안심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펼쳐놓은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만나왔던 김려령 작가의 작품의 색깔과 좀 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동화였기에 조금은 갑자기 전개되는 상상력의 세계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어른의 마음이 아닌 아이들의 마음에서 읽는다고 생각하면 개연성을 따지기보다 상상력에 맡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저자가 어떠한 이야기를 펼쳐낼지 어떠한 상상력을 들이밀지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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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0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오랜 일터, 우주전파사가 생각나는 제목이네요^^
 
웰컴, 삼바
델핀 쿨랭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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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신분증이 <없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의 부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울이기도 했다. 그를 보면 프랑스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알 수 있었다. (284쪽)

 

  내가 태어난 나라에 살고 있어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내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 타국에서 그림자처럼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신분증이 없고 그 나라 국민도 아니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낱 공중에 떠 있는 먼지처럼 살아가야 한다면 그러한 삶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말리에서 온 삼바 시세를 보면 삶이라는 게,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깊은 회의감을 느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장남으로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도 엄청난 고생 끝에 프랑스로 건너와 난민이 되어야만 했던 삼바. 프랑스에서 발급해 준 임시 체류증으로 10년을 막노동을 하며 착실히 세금을 내며 살아왔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정식체류증의 허가도 아니고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다는 통보였다. 스스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기에 정식 체류증 여부를 물으러 갔다 난데없이 체포되어 수감되는 삼바.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프랑스 국민으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으며 그간 보내왔던 10년의 세월이 프랑스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불필요한 인물로 낙인 되는 것에 상실감을 느낀다.

 

  삼바가 프랑스에 머물 수 있는 희망을 갖으며 착실하게 상황을 받아들일 때마다 순수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어수룩한 면은 있지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며 힘든 노동을 견뎌내고 고향으로 꼬박꼬박 송금하는 착한 청년이었다. 자신과는 달리 신분증도 있고 직장도 있는 외삼촌의 지하 아파트에서 얹혀살면서도 프랑스에서의 좀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수감되고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일단은 더 머무를 수 있게 되지만 그의 앞에 놓인 운명은 전보다 더 가혹해져만 갔다. 늘 경찰에게 들키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타인의 신분증으로 겨우 하루 벌이를 해야만 하는 날들. 관광도시로 인식되고 있는 프랑스의 화려함이 아닌 최하층의 민낯을 삼바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삼바를 도와주었던 시민단체의 도움이 큰 힘이 될 거라 혼자 추측했다. 그로 인해 뻔한 결말일지라도 삼바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프랑스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며 희망에 부풀어 그의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그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여인을 사랑할 때도, 친구를 배신할까 조마조마 할 때도 삼바에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가 그려질 거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바의 운명은 가혹했다.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에서 머물며 나름 자리를 닦아 온 삼촌도 위험하게 만들고, 친구라 믿었던 이의 죽음에 얽히고, 타인의 신분증으로 살아가다 보니 진정한 자신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점점 살아남기 위해 약아져 가는 삼바를 보는 일이 편하지 않았다. 마지막 보루인 고향으로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자신만 바라보며 사는 어머니와 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삼촌이 늘 꿈꾸던 파란집이 그들에게 먼 이상향인 것처럼 온갖 차별이 존재하는 프랑스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이름, 삶, 가졌던 희망들이 쓸모없는 장식처럼 누더기가 되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가시덤불로 뒤덮인 한계가 없는 평원 저 멀리, 그는 이제 하나의 미세한 검은 점에 불과했다. (328쪽)

 

  결국 그는 미세한 검은 점으로 남겨졌다. 삼바 시세가 아닌 타인의 이름을 가진 채 삶을 지속시키기로 다짐했다. 그 삶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흘러가버린 삼바를 탓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 받지 못하는 일.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인생의 절반을 그런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왈가왈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를 이해한다거나 희망을 가지라는 섣부른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지켜보는 것도 고통스럽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혹은 지금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것들을 얻기 위해 현재 내 곁에서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타국으로 간다면 삼바처럼 되지 말란 법도 없다. 한 사람의 운명이 나라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처사를 받는 다는 게 너무나 씁쓸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팍팍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느끼며 삼바의 삶이, 그가 살아내고 있는 익숙하지만 절대 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없는 낯선 땅이 야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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