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고 싶은 날
정유경 지음, 조미자 그림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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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동시집을 읽는 게 좋아졌다. 내가 어른이니 어른들이 쓴 시집을 읽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시의 세계를 이해하기엔 내적 자양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시가 점점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종종 동시집을 읽으면 뭔가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지면서 나의 유년시절이 생각나서 좋아지는 것이다. 나이만 어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되었고 동시가 가진 순수함과 솔직함, 눈높이가 나에게 딱 들어맞았기 때문인가 보다.

저녁을 먹고 다 같이/텔레비전을 보는데//

할머니는 말없이/ 허리를 퉁퉁 치시고/다섯 살 동생은/푸르르푸르르 입술을 떨고/발가락을 꼼지락대던 아빠는/발바닥을 박박 긁기 시작했으니 <우리 집 일기예보> 중

  지난 금요일 저녁 괜히 무릎이 시렸다. 내가 무릎이 시리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라서 거의 정확한 편이다. 토요일 아침에 날씨를 살피니 하늘이 맑았는데 왜 무릎이 시렸을까 하는 순간, 오후가 되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무릎이 일기예보가 따로 없다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내 무릎은 비오기 전이 아니라 흐리기 전날 시린데 그래서 여름 장마철이 나는 참 싫다. 저 동시를 보면서 아이가 한참 입술을 떨 때 비오는 날을 대강 예상하곤 했었는데 그때의 모습도 괜히 떠올랐다.

  동시집을 읽을 때마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유년시절이 떠오른다. 학교가 파하면 숙제는커녕 가방을 마루에 던져둔 채 온 동네를 쏘다니며 놀기 바빴던 나였는데, 그때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남겨놓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때는 동시라는 개념도 별로 없었고 내가 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의 내 마음 상태는 어땠는지 괜히 궁금해졌다. 그때의 느낌을 살려서 동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학교 다닐 때 남겨놓은 일기장을 구할 수도 없으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나의 어린 시절이 야속하기만 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이렇게 순수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어떠한 대상을 보면서 그대로 바라보거나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느꼈을 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는 듯한 동시들을 만날 때면 세상 때가 덕지덕지 묻어버린 나는 어릴 때 어땠는지 더욱 궁금해진다. <비밀>이라는 시를 보면 첫 앞 글자만 따서 읽으면 ‘동수동수난좋아 참좋아!’란 또 다른 시가 나타난다. 이 시를 읽을 땐 전혀 몰랐는데 해설을 보고 발견했다. 어릴 때의 나도 짝사랑이란 걸 해봐서 참 귀엽게 느껴지는 시였다. 내가 짝사랑했던 대상들도 떠오르고 좀 더 커서는 내 마음을 고백하지 못해 애태우던 시간들도 떠올라 지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 마음(결혼하면 다 이런가?^^)이 멋쩍어진다.

  얼핏 장 자크 상뻬 할아버지 삽화를 보는 것 같은 그림들과 동시들을 함께 읽으니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모든 동시들이 순수하고 밝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 대상을 드러내고 마음을 덜어내는 시를 읽다 보니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게 된 것 같다. 책장에 시집도 많지만 몇 권의 동시집도 함께 꽂혀 있다. 시가 어려울 때 동시집을 읽어야겠단 다짐을 하면서 맑아진 이 마음이 금방 사라지지 않고 좀 더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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