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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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작품을 읽어보기도 전에 이름만으로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작가가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랬고 스탕달, 움베르토 에코, 알베르 카뮈 등이 그랬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도 나에게 그런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지되고 있었다. 앞에 언급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어떻게 변화됐는지 이야기하자면 썰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하고 밀란 쿤데라의 이야기만 하자면 그의 작품은 <정체성>과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실린 단편 한 편을 읽은 게 전부다. 그 작품을 읽을 당시 어려울 거란 편견하에 긴장하며 읽어서인지 생각보다 난해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나에겐 녹록치 않은 작가다. 그의 전집이 출간 됐을 때도 묵직한 제목들에 지레 겁먹고 달랑 <농담>만 구입한 내게 최근 작품인 <무의미의 축제>를 읽게 된 것은 저자의 글을 놓지 않고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결심의 징조다.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서인지, 의외로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인지, 저자에게 좀 더 다가간 기분이 들었다. 알랭을 비롯한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스탈린과 그의 동지들의 이야기, 또다시 돌아오게 되는 일상이야기들이 굉장히 친절한 소제목으로 묶여 있었다. 예를 들어 ‘샤를은 인형극 공연을 위한 작품을 꿈꾼다’란 소제목 안에는 샤를이 인형극에 대해 말한 것이 이 장(章)의 중심 내용이다라고 알려주는 식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장황한 소제목이 낯설었는데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마치 그들이 펼쳐놓는 이야기가 소설 속의 인물이 중점이 아닌 독자인 ‘나’, 3인칭 시점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지켜보게끔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를이 꿈꾸던 인형극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옛 추억을 꺼내 보자면 라디오에서 매일매일 들려주던 구술 소설 같은 느낌도 났다. 정작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끊어서보다 한 호흡으로 들어야 제 맛일 것 같은 이야기지만 무언가 알듯말듯한 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그 전의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재량이 내겐 없지만 이 작품은 그 전에 소설로 읽었던 작품과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출간 됐을 때 그의 팬들은 노작가의 역량 자체에 감동했다고들 하는데 뭔가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문학세계를 드러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날 수 있었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를 완전히 내 것으로 흡수하며 읽어나갈 수 없을지라도 계속 생각하며 읽어나가게 만드는 힘. 약간의 그런 몽롱함도 좋았고 쉽지 않은 이야기를 독자들이 알아먹지 못하게 배배 꼬지 않으면서 흡인력 있게 써 내려간 문체도 좋았다. 철저히 과정을 즐겨야 하는 작품이라 줄거리를 말해 달라고 하면 ‘읽어봐!’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젊은이가 아닌 연륜이 있는 작가에게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이 분명 있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은 흘러가. 시간 덕분에 우선 우리는 살아 있지.(33쪽)

  책 속의 인물들은 때론 철학적이면서 인생을 달관한 듯한 이런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툭 뱉기도 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그들이 만약 전자나 후자 한쪽에만 기울였다면 지루했을 텐데 저자는 능수능란하게 완급조절을 했다. 그래서 그런 문장을 생각보다 빨리 읽어나갈 때라도 굳이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고, 내게 와 닿으면 닿는 대로 흘러가버리면 흘러가버린 대로 편하게 읽었다. 현재 임신 중이어서인지 배꼽에 대한 여러 가지 시선이 흥미롭기도 했고, 암에 걸렸다는 동료의 말이 거짓인지도 모른 채 그를 새롭게 보게 되는 시선도 뭔가 과장된 것 같으면서도 진실을 말해주고 싶지 않게 만들었으며,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도 정치적인 면을 떠나 마치 하나의 에피소드인양 그들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부담 없이 전달되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어떤 메시지를 찾아야 책을 읽은 티도 낼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늘 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 해도 늘 쉽지만은 않은데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에 있는 ‘무의미’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냐보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게 만든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책장에 고이 모셔둔 <농담>을 꺼내보고 싶어 손이 간질간질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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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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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 온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굴곡이 있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미 지나온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그때는 죽을 만큼 힘들었을 일들도 지금은 그럭저럭 지나왔노라고 미화되고 있다. 그래도 굳이 꼽아보자면 한참 방황했던 20대 초반이 아니었을까? 내 멋대로 혼자서 서울에 가서 살았던 6개월의 시간. 오히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그 전보다 더 심한 방황을 하고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어둠의 터널을 겨우 빠져 나왔었다. 그래서 나의 20대 초반은 기억하기 싫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시절이다. 진부하게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재휘와 선영에 비하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굴곡은 너무나 미미했다.

  종종 내가 속한 세계보다 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도 더 아래로 내려가거나 그런 세계를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세계를 알아버리면 내 삶조차 암울해 질 것 같아 알아가는 것조차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박에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지만 거대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강회장이란 인물에 의해 살해 된 아버지, 그리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휘는 용팔이란 인물에 의해 길러진다. 그 역시 도박판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재휘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어 그의 아들을 거둔다. 우연히 도박판에 재휘를 데려갔다가 아버지와 같은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 세계를 머물며 근근이 살아가는 피가 섞이지 않은 부자. 강회장에 의해 아버지의 자살을 목도하고 몸까지 팔릴 뻔한 여고생 선영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은 더 큰 암흑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재휘와 선영은 같은 목표를 품고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회장을 무너뜨리는 것. 하지만 재휘는 도박을 하면 할수록 강회장에 대한 복수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지만 어머니의 보험금까지 모두 잃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게 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강회장에게 꼭 되갚아 주려 하는 선영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강회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포커를 가르쳐 달라 하고 어쩔 수 없이 선영에게 포커를 가르쳐 준 재휘는 그녀의 복수심 때문에 큰 위험에 빠지고 만다.

  도박에 관한 소설을 몇 편 읽어봤지만 그 세계가 정직하고 밝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아님을 알기에 처음엔 이 소설 또한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기에 내심 책을 펼치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는 달리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갔고 엄청난 흡인력에 이끌려서 책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재휘와 선영이 과연 강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결과도 궁금했지만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강회장에게 어떻게 복수를 한다는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 선영의 섣부른 행동으로 복수는커녕 재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은 용팔의 도움으로 겨우 해외로 도피했을 때는 나 또한 짜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몰입해서 읽다 보니 선영의 경솔함이 원망스러웠고 강회장의 몰락을 내심 바라며 험악한 도박 세계를 알아가던 나에게는 김빠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강회장에게 삶을 망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어서인지 선영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고 다시 한 번 재휘를 구하고 강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재휘가 자신 때문에 강회장에게 묶이면서 끊어져버린 연인의 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도저히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겐 여전히 낯선 도박의 세계. 그 안에서 인간의 밑바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함을 맛보았지만 그럼에도 흡인력 있게 이 모든 이야기를 끌어당기는 힘에 놀랐다. 때론 신파적인 면도 있었고 어쩌면 조금은 뻔한 결말일지도 모르나 이만한 흡인력을 갖추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기란 쉬운 게 아님을 알기에 그 부분을 가장 높이 사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갈 의무와 희망이 있지만 원치 않은 운명으로 인해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재휘와 선영은 그런 운명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 도박이란 사실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삶을 진행시킨 그들이 새삼 대견해 보였다. 나라면 진작에 내 인생 자체를 포기해버렸을 막막했던 운명. 그들을 통해 그 운명을 이길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자잘한 고민들과 번뇌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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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 2014 앙굴렘 국제만화제 대상후보작
톰 골드 지음, 김경주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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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볼 때 단면만 보고 판단하고 그런 이미지가 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일. 그래서 누군가를 대할 때 첫인상도 중요하고 판단하기가 조심스러운 것 같다. 내가 하나의 이미지로 그 사람을 정의해 버리면 웬만해서는 쉬이 깨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같은 사건을 같은 장소에서 겪더라도 다양한 시선이 있듯이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판단해버리는 위험성.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 단 한 번도 골리앗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음이 이 책을 만난 충격이라고나 할까? 늘 이야기의 중심은 다윗이었고 골리앗은 단지 이교도인 블레셋 군인 중에서도 거대하고 포악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다윗의 물맷돌에 맞아 목숨을 잃었을 때 참 허무한 죽음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골리앗의 시선으로 다윗과의 사건을 보려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골리앗의 이야기가 짤막해서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라고 말한 것처럼 전혀 다른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다. 키도 크고 몸집도 거대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우락부락하고 포악하고 잔인한 골리앗이 아닌 평범하고 선한 내면을 가진 골리앗이 등장한다. 그는 전사가 아니었고 행정업무가 더 잘 맞는 병사일 뿐이었다. 싸움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낭만적이기까지 한 그가 블레셋을 대표해서 다윗과 싸워야 했던 건 순전히 전사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고 명령하에 몸에 맞는 거대한 갑옷과 방패지기가 배정되었다.

  골리앗이 온 몸에 갑옷을 두르고 앞장서기만 해도 적들이 겁을 먹을 거라는 추측. 그의 외모만 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골리앗에게 싸움 기술을 더 익히라고 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와 일대 일로 붙자는 문구를 외우게 할 뿐이었다. 싸움을 걸어오면 어떻게 하냐는 골리앗의 질문에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는 지루하게 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똑같은 문구만 되풀이했다.

자네가 할 일은 그저 전사처럼 행동하는 거야. 그러면 적은 우리 앞에서 몸을 움츠릴 거야. 실제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구.

  방패지기 소년과 말동무도 하고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생각에 빠지는, 싸움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골리앗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독자에게 전혀 다른 골리앗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 결말도 달랐으면 하고 바랐다. 내가 성경에서 읽은 단 몇 줄의 골리앗의 이미지가 아닌 책 속의 골리앗에 흡입되고 나니 다윗이란 인물은 새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리고 전사로 보이는 골리앗이 아닌 그냥 평범한 골리앗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이 책의 시작을 보면 골리앗이 마치 자기의 운명의 복선을 보여주듯 물맷돌을 집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색다른 골리앗의 이야기라도 그가 맞이할 운명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결말을 벗어나지 못했다. 블레셋의 왕은 그에게 성과를 내라고 압박하고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윗이 다가온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해 있으며,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며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다윗이 다가와(어차피 골리앗도 싸움과는 거리가 멀어 무장하지 않은 다윗과 비등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물맷돌을 던진다. 그 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고 그대로 쓰러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윗은 그의 머리를 벤다. 그 모습을 보고 블레셋 군인들은 도망간다는 설명으로 골리앗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오로지 골리앗의 시선으로 이어진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골리앗의 죽음을 목도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성경처럼 그는 다윗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스라엘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환희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어떠한 운명을 맞이하는지에 대한 의미가 부각되진 않는다. 평범한 군인이었던 골리앗은 전사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블레셋 군인의 대표주자가 되었고 군인의 신분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영위해보지도 못하고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물론 저자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골리앗의 이야기이기에 이런 안타까움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쩌면 우리도 많은 사람들을 함부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골리앗의 죽음은 안타깝다. 외모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삶을 영위했을지도 모를 골리앗. 나 또한 외모만 보고, 한 단면만 보고, 타인의 이야기만 듣고 사람을 판단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내 속에 아무리 다양한 내가 있다고 하지만 타인을 향한 시선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철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골리앗이 이 책 속의 인물이었단 사실을 끌어낼 수 없을지라도 하나의 사건으로 골리앗을 판단하지 않은 이 이야기. 타인을 대하는 내 모습에 많은 반성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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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의 이런 하루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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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외출 복장은 레깅스와 긴 니트 티셔츠, 주황색 파카 그리고 어그 부츠 차림이다. 올 겨울 내내 그런 복장이었고 머리는 반으로 접어서 대충 묶고 스킨 로션에 립 밤을 바르는 게 전부다. 아줌마다 되고부터, 아니 애 엄마가 되고부터는 복장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애 엄마가 되더라도 임신 중이 아닐 때는 그럭저럭 나름 신경을 쓰곤 했는데 둘째를 가지고 내 몸이 무거워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자 대충 걸치고 밖을 나서게 되었다. 그 뿐이랴. 어쩔 때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에 파카만 걸치고 나갈 때가 허다하다. 귀차니즘에서 비롯된 복장이지만 무릎 위 스커트, 민소매와 이별을 한다는 책 속의 40대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70세, 엄마는 69세, 그리고 독신인 딸은 40세인 사와무라 씨 댁의 일상을 보고 있자면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갔다. 이제 결혼한 지 3년도 되지 않은 나지만 45년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한 부부의 모습과 마흔 살까지 솔로인 딸의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내 모습을 대입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과 나도 평범하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까란 생각부터 솔로일 때, 내 곁에 아무도 없었을 때의 내 모습을 외동딸인 히토미 씨를 보며 많은 공감을 했다.

이동 시간을 인생으로 치지 않아……. 그 긴 장갑이야말로 경계선이 아닐까? 젊은이와의. (45쪽)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조금 어리고 직장을 다닐 때 내 모습은 이동하는 자투리 시간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했고, 젊고 솔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복장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감행했던 복장들과 나 역시 많은 이별을 했고 이동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이게 나이 탓인지 아줌마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내 스스로 내 삶을 소중히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더군다나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둘째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니 더욱 더 내 삶에 대한 집중력과 관심이 생기지 않은 게 사실이다.

엄마, 다시 태어나도 또 아빠랑 결혼하고 싶어? (128쪽)

  남편과 아직 3년도 같이 못 살아봤으면서도 굳이 대답을 하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단호한 ‘NO’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 본 경험으로 남편을 만나기 전에 만났던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한다면 심히 고민하는 척(?) 하겠지만, 남편과 티격태격 하며 살아갈 땐 그런 생각이 강하다가 괜히 멀찍이서 쳐다보고 있으면 짠한 생각이 들면서 내가 저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사랑스런 내 아이도 못 만났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남편과 좀 더 오래 살다 보면 이 사람이 내 운명이다란 생각과 함께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겠단 말이 나올지 모르겠으나(여기서 남편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ㅋ) 현재는 덜 살아서인지 아직 확고한 생각이 들지 않는 이기적인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공간에 대해 큰 불만이 없다. 굳이 바람을 보태본다면 외벌이다 보니 살림살이가 좀 더 넉넉했으면 하는 것뿐이다. 우리 가족이 다 건강하고 나름대로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지금보다 더 큰 집, 좋은 차, 여유 있는 생활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수다 떨 사람이 있다는 행복. 나한테 ’이곳이 아닌 어딘가‘는 필요없어~ (105쪽)’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에 감사해 하고 있다. 앞으로 좀 더 나아지겠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와무라 씨 댁의 일상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면을 본 것이다. 소소한 부부의 일상, 독신인 딸이 느끼는 것,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만났을 때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어쩔 땐 정서적으로 낯설 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현재 내 삶에 많은 부분을 대입해 볼 수 있어서 많은 생각을 끌어내며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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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담가계 - 소박하고 서늘한 우리 옛글 다시 읽기
이상하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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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고전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국내 고전 소설이나 인문학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고전은 늘 고리타분하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다는 편견을 내내 가지고 있다, 18세기 활동했던 백탑파의 글을 읽고 조금 깨트린 게 전부다. 이후로 고전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지만 남다른 식견이 있는 건 아니고 거부감을 조금 덜어낸 정도다. 최근 소설 위주로 읽은 터라 나름 지쳐있어 오랜만에 만난 고전이라 이 책을 잘 읽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옛글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쉽게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었는지 이 책의 묘미를 발견한 건 중반부에 들어섰을 때였다.

우리 마음도 지혜의 밝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어두컴컴한 무지 속에 탐욕과 아집이 도둑처럼 숨어 살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내면은 보지 못하고 바깥세상만 보는 사람들은 마음을 헐떡이며 한사코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 불행해지고 만다. (26쪽)

  마치 나를 향해 하는 말인듯 정곡을 콕 찌르는 문장을 보면서 이 책에 실린 옛 사람들의 글이 내 마음에 밝은 지혜의 빛을 비춰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고전은 담담하여 처음 읽으면 맛이 없다. 그러나 곱씹어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더욱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냉담가계는 담담한 고전 읽기를 뜻하는 말이다.’란 이 책의 뜻처럼 처음부터 나에게 고전의 ‘맛’을 선사해 주는 듯하더니 이내 ‘담담함’이 심심함으로 다가왔다. 집중이 되지 않을 때는 과감히 책장을 덮고 글이 내게 와 닿을 때 펼치다보니 읽기가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더 곱씹을 수 있었지만 이런 담담함이 나에게도 깊은 맛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었다.

  담담히 읽어나가며 내 마음에 와 닿는 구절에 메모지를 붙이며 다시 한 번 음미하는 동안 내 추억을 꺼낼 수 있는 옛글을 만났다. 바로 소동파의「전적벽부」에 대한 설명으로 동파가「적벽부」를 읊을 때는 7월 기망(음력 16일)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는데, 몇 년 전 정민 선생님과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흔적을 찾는 강진 답사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가 7월 16일이었는데(여건 상 음력까지 날짜를 맞추기는 힘들었었다.) 바다 위에 배를 띄워놓고 달구경을 했었다. 소동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서 괜히 반가운 마음이 일어 그때부터 좀 더 마음을 열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총 다섯 개의 제목으로 묶인 글이 실려 있는데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글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다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연유든 간에 서간을 주고받으면서 나이를 떠나 지식으로 서로가 친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보기 좋았다. 주고받은 편지들이 모두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깨우침을 주는 글이었다고 할 수 없지만 예의를 갖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지식인들의 모습이라 인상 깊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서간을 주고받는 것밖에 연락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말이든 글이든 쉽게 할 수 있고 순식간에 퍼트려지는 것을 보면 당시의 신중함과 배려, 포용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드는 것이다.

  또한 책읽기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채찍질도 많이 한 셈이었다. 책을 좋아하게 되면서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을 때가 흔치 않고 책을 더 알아 가면 알수록 내 취향에 맞는 책만 읽기 마련이라 편중된 독서를 한 것도 사실이다. ‘즉 자득이란 사색하여 그 이치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 홀로만 아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이치를 사색하다 보면 이치가 미처 마음에 와 닿기 전에 자기 생각으로 지레짐작하여 우격다짐으로 알아버린다.(241쪽)’란 문장을 보며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나의 직업이 학문을 닦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크게 이루겠다는 뜻도 없지만 단순한 독자더라도 한 권의 책을 만날 때마다 곱씹고 음미하면서 제대로 읽는 것이 책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겉핥기식 혹은 보여주기 위한 독서와 오독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이 책을 읽으면서 고전은 여전히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단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면 이런 글을 읽고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글은 말보다 정제되어야 한다. 말을 할 때는 가끔 실수하고 또 그 자리에서 고칠 수도 있지만 글로 기록되면 많은 사람에게 오래 전파될 수 있으므로 더욱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글이 말보다 더 가벼워졌다. (263쪽)

  이 책에 실린 글 이외에도 서로간의 대화가 오갔을 거라 상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정제되지 못하고 말보다 가벼운 글을 많이 찾아볼 수는 없었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더라도 자신을 낮추고 포용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일. 책 속의 글을 읽다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면서도 요즘 시대에는 대중 앞에 서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글 속의 지식인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바로 보는 식견과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잣대를 대기 위해서는 정진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지식이든 삶의 방식이든 간에 옛 성현들을 통해 내가 받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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