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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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아 온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굴곡이 있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이미 지나온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그때는 죽을 만큼 힘들었을 일들도 지금은 그럭저럭 지나왔노라고 미화되고 있다. 그래도 굳이 꼽아보자면 한참 방황했던 20대 초반이 아니었을까? 내 멋대로 혼자서 서울에 가서 살았던 6개월의 시간. 오히려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그 전보다 더 심한 방황을 하고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어둠의 터널을 겨우 빠져 나왔었다. 그래서 나의 20대 초반은 기억하기 싫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시절이다. 진부하게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재휘와 선영에 비하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굴곡은 너무나 미미했다.

  종종 내가 속한 세계보다 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도 더 아래로 내려가거나 그런 세계를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세계를 알아버리면 내 삶조차 암울해 질 것 같아 알아가는 것조차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박에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지만 거대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강회장이란 인물에 의해 살해 된 아버지, 그리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휘는 용팔이란 인물에 의해 길러진다. 그 역시 도박판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재휘의 아버지와 인연이 있어 그의 아들을 거둔다. 우연히 도박판에 재휘를 데려갔다가 아버지와 같은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 세계를 머물며 근근이 살아가는 피가 섞이지 않은 부자. 강회장에 의해 아버지의 자살을 목도하고 몸까지 팔릴 뻔한 여고생 선영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은 더 큰 암흑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재휘와 선영은 같은 목표를 품고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강회장을 무너뜨리는 것. 하지만 재휘는 도박을 하면 할수록 강회장에 대한 복수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지만 어머니의 보험금까지 모두 잃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게 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강회장에게 꼭 되갚아 주려 하는 선영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 강회장에게 복수하기 위해 포커를 가르쳐 달라 하고 어쩔 수 없이 선영에게 포커를 가르쳐 준 재휘는 그녀의 복수심 때문에 큰 위험에 빠지고 만다.

  도박에 관한 소설을 몇 편 읽어봤지만 그 세계가 정직하고 밝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 아님을 알기에 처음엔 이 소설 또한 그러한 이야기라고 하기에 내심 책을 펼치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는 달리 책장이 쉼 없이 넘어갔고 엄청난 흡인력에 이끌려서 책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재휘와 선영이 과연 강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결과도 궁금했지만 도저히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강회장에게 어떻게 복수를 한다는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러다 선영의 섣부른 행동으로 복수는커녕 재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자신은 용팔의 도움으로 겨우 해외로 도피했을 때는 나 또한 짜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몰입해서 읽다 보니 선영의 경솔함이 원망스러웠고 강회장의 몰락을 내심 바라며 험악한 도박 세계를 알아가던 나에게는 김빠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강회장에게 삶을 망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어서인지 선영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고 다시 한 번 재휘를 구하고 강회장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 재휘가 자신 때문에 강회장에게 묶이면서 끊어져버린 연인의 끈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도저히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겐 여전히 낯선 도박의 세계. 그 안에서 인간의 밑바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함을 맛보았지만 그럼에도 흡인력 있게 이 모든 이야기를 끌어당기는 힘에 놀랐다. 때론 신파적인 면도 있었고 어쩌면 조금은 뻔한 결말일지도 모르나 이만한 흡인력을 갖추면서 이야기를 엮어나가기란 쉬운 게 아님을 알기에 그 부분을 가장 높이 사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갈 의무와 희망이 있지만 원치 않은 운명으로 인해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재휘와 선영은 그런 운명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그 방법이 도박이란 사실이 내키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삶을 진행시킨 그들이 새삼 대견해 보였다. 나라면 진작에 내 인생 자체를 포기해버렸을 막막했던 운명. 그들을 통해 그 운명을 이길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자잘한 고민들과 번뇌가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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