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보고 싶거든 -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들리는 대답
줄리 폴리아노 글, 에린 E. 스테드 그림,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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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고래를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에 마지막엔 당연히 고래와 만나는 모습을 예상했었다. 고래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모습이 등장하니 어떤 이유에서든 고래를 볼 수 있을 거라며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저런 인내를 하고 고래를 보기 위해 다양한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고래의 일부부만 보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뭘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덮고 한참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조금 더 다르게 다가왔다. 오로지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건 고래라고 단정 지었는데, 어쩌면 그 고래라는 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고래가 보고 싶다면 먼저 창문도 있어야 하고, 바다, 저건 고래인지 생각할 시간 등등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래가 아닐 경우에 다른 생물로 인정할 시간은 물론이고 고개를 기다릴 최적의 환경이 필요하지만 너무 편안하면 고래를 놓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안락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고래보다 더 달콤한 장미라던지 그런 것에도 한 눈 팔면 안 되며 고래가 아닌 것에 마음을 절대 빼앗겨서도 안 된다고 한다. 고래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이 있어도 오직 고래를 보겠다는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선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아 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일은 인내였다.

  고래를 보기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만들어가지만 고래를 보기 위한 기다림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인다. 그 모든 역경과 유혹을 떨쳐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겨우 고래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진 듯하다. 그리고 자신의 가까이에 와 있는 고래가 그런 인내를 모두 이겨냈을 때 드디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고래가 하늘 높이 치솟아 아이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여줬거나 바다에 나가 아무런 기다림 없이 단박에 고래를 보았다면 고래를 만났다는 기대감이 훨씬 떨어졌을 것 같다. 아이 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고래를 상상하면서 책장을 덮으니 기뻐할 아이의 모습과 그런 아이와 눈을 마주칠 것 같은 고래가 생각나 괜한 웃음이 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이에겐 인내의 긴 시간 끝에 찾아온 것이 고래였지만 다른 것을 대입해 본다면 더 쉽게 와 닿는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그 안에 대입해 보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단박에 깨닫는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실천이 되지 않아 잠시 가졌든, 오랫동안 간직했든 그 꿈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다. 또한 '고래' 같은 꿈이 없을 수도 있다. 꿈을 가질 때 좀 더 삶의 목표가 뚜렷하고 때론 좌절도 하면서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 꿈이 없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거나 무의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도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그건 지금껏 살아오면서 늘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다. 고래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읽으니 내가 이 아이만큼 노력하고 인내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면서, 아이가 고래를 기다렸던 것처럼 지금이라도 그런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단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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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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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한강                     출판사: 창비

 

 

 

  이 소설을 펼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몇 편 읽고 나서 문체의 아름다움은 알고 있지만 특유의 우울함 때문에 선뜻 책을 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5.18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니 아무리 큰 심호흡을 해도 책에 손이 닿질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허비하다 큰 맘 먹고 책을 펼쳤는데 긴 시간을 긴장한 탓인지 읽는 내내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뭔가 끔찍한 모습이 터지고 불행한 모습을 쏟아낼 거란 긴장감. 내가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움츠려 있는 사이에 저자는 5.18의 이야기를 풀어냈고 물론 담담하게 끔찍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내가 마주하기 두려워했던 적나라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좀 더 편하게 읽었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과 함께 유려한 문장 속의 끔찍한 이야기가 한강 작가의 역량을 더 빛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5.18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면서 나는 무엇을 보길 원했던 걸까? 적나라한 끔찍함? 아니면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기록 문학을 원하면서 내가 겪지 못했던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을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명확하게 내가 뭘 원했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라는 건 인정하게 됐다. 정말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불행하고 억울함 죽음. 죽은 자보다 남겨진 자에게 더 깊은 상처가 되는 그날의 사건들이 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 똑똑히 봤다. 책을 읽다 5.18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면서 숫자로 표기되어 있는 사망자, 실종자, 피해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과연 저 숫자가 진실일까? 이 작품 속에서만 보더라도 한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안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말이다. 그래서 자료의 숫자가 낯설게 느껴졌고 그러한 폭력을 휘두른 이에 대한 분노도 일지 않았다. 내가 겪지 않았기에 무관심으로 보는 시선이 아닌,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 모를 거라는 데서 오는 차가운 시선이었다.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51쪽)

 

  그럼에도 억울한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겐 힘이 되고 희망이 되었을 삶인데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죽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맞은 이들의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막내 동생을 잃고 사이가 갈라져버린 형제, 그 아들을 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다 한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고백이 서럽고 서러웠다. 죽음을 맞이한들 그 상처를 지울 수 있을까? 그런 행위를 저지른 이는 더 잘 살아가고 있는데 자식의 억울함 죽음을 대신해 그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다고 해도 그 한이 사라질까?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전처럼 평범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 한 그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가슴을 더 후벼 팔 것이라는 사실만 마주한 셈이다.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이라면 죽음의 이유에 따라 그 상처가 남는 형태가 전혀 달라짐을 알고 있다. 5.18 같은 억울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카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한 나에게 남겨진 자의 슬픔이 낯설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긴 해도 네가 살아있었다면, 그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짙어지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다. 감히 그 고통을 추측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 어렴풋이 가족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뿐 부모가 된 나로서도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추측하고 싶지도, 감당하고 싶지도 않다.

 

  하나의 이야기처럼 5.18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어쩌면 관찰자의 입장에서만 멀찍이서 지켜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간 읽어 온 작품과는 달리 뭔가 한 단계 더 뛰어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이 발돋움이 되어 앞으로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거라는 예감. 그래서 선뜻 손이 가지 않으면서도 저자의 작품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가 더 생겨버렸다. 이렇게나마 5.18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한편으론 이렇게 아픈 이야기를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양면성이 잔재했다. 죽음을 피해갈 수 없지만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소중한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런 마음은 더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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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미란다 줄라이 지음, 이주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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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센스도 없고 눈치도 없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었다. 그래서 뭔가 세련되고 센스를 갖춘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다. 외모가 아름다운 것보다 그 사람에게서 흐르는 도시적인 분위기랄까? 관계의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도 감각 있는 사람들. 나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도 저랬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다. 지금은 직장에 다니지도 않고 주부의 삶을 살고 있어서 그런 부러움조차 희미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참 감각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런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제목도 상큼하고 책도 상큼하고 제각각 색깔이 다른 단편이 실려 있는 책을 읽으니 감각은 타고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자가 워낙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보니 책 속의 이야기도 그만큼 다양한 것 같았다. 딱 읽어도 젊은 작가가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어쩔 땐 평범한 이야기 같다가도 어쩔 땐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행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참 다양한 인생을 맛보았다.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닌데도 할머니들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모습으로 익살스러우면서 찡한 감동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20대와는 달리 3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더 솔직하게 다가올 성에 관한 이야기들. 그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의 표출들이 조금은 불편하긴 했어도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갑작스런 연인과의 결별,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행하고 공감할 수 없는 낯선 이야기들까지 저자가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워낙 단편의 색깔이 다양하다보니 한 사람이 쓴 이야기가 아닌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만큼 감각 있으면서도 독특했고 옮긴이의 말처럼 사회 부적응자들의 이야기가 넘쳐났다. 그래서 피부에 와 닿지 않은 이야기를 만날 때라도 뭔가 더 공감이 가고 엄청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우울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방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건 결코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낫다는데서 오는 위로가 아닌, 내가 나름대로 괜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내면이 그들과 닮아 있음을 인정하는데서 오는 위로가 아닌가 싶다.

  열여섯 개의 단편의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도, 결론이 명확한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인생이 그러하듯 이어지는 삶 그대로 끝내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여러 개의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뭔가 끝난 것 같다는 느낌보다 여전히 그 삶이 지속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삶 속에는 꼭 소설 속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앞을 향해 가고 있는, 혹은 과거에 메여있기도 한 내 삶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지듯이 그들의 이야기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시선을 느꼈다. 그들의 이야기에 비추어 내 삶을 반추해볼 때 불행과 행복, 현실 유지는 그리 어렵지 않음을 깨달아 책장을 덮으면서도 마음이 무겁지 않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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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2015-03-26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이름이 어딘가 낯익다 했는데 제가 알던 영화 감독이 맞네요! 이분이 책까지 쓴 줄은 첨 알았어요. 그것도 소설이라니, 궁금하네요 어떨지ㅎㅎ

안녕반짝 2015-03-28 07:25   좋아요 0 | URL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저자더라고요^^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 신경림 - 다니카와 슌타로 대시집(對詩集)
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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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로 된 문학을 번역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중에서 시가 가장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그 나라의 사투리나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표현이 들어있는 시라면 타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외국 시인의 유명한 시집을 읽어봐도 뭔가 정서에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번역이 어색한 건지 나의 배경 지식 부족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우리 언어로 된 시를 읽어도 이러할진대 신경림 시인과 일본의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서로 주고받으며 시를 지었다고 하니 과연 그 의미가 잘 전달되었을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이런 나의 의문이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두 노시인이 함께 지은 시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몇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시를 쓰는 연시와 달리 둘이서 짓는 시를 일본에서는 대시(對詩)라고 부른다’는데 우리나라에는 대시의 개념이 생소한 것 같다. 특히나 국적도 다르고 정서도 다른 두 시인의 대시는 어떤 느낌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중간에 번역자를 두고 전자메일로 진행된 대시를 읽는 동안 크게 갈라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을 나눠 시가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여러 가지 다른 환경 속에서도 시인은 마음과 정서가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것을 외경하는 것과/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 외경심을 잃어버릴 때 공포가 생긴다  (다니카와)

세상에 아무것도 주지 못하면서/ 오래 서 있기만 하는/ 늙은 미루나무가 오늘따라 서럽다 (신경림)

  노시인의 연배며 그들이 견뎌낸 역사적 배경도 나름대로의 공통점이 있다 보니 연륜에서 나오는 언어의 드러남이 남다르게 보일 때도 있었다. 서로 오간 시(詩)가 24편이고 그 뒤에는 서로의 대표작 중에서 좋아하는 시를 뽑아 싣기도 하고 도쿄와 파주에서의 두 번의 대담과 각자의 에세이를 읽을 기회까지, 한 권의 책 속에 짧지만 그들의 인생의 단편이 모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신경림 시인의 시도 자주 접하지 못했지만 나에게 생소한 일본의 노시인의 시를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과연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그들이 나눈 대담에서도 느꼈지만 시 자체에 대한 본질부터 시가 미치는 영향력, 그들이 살아낸 역사 속에서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때 내가 정말 시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시를 몰아서 읽거나 갑작스런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늘 어렵게만 생각되고 나와는 거리가 먼 문학이라는 거리감이 좁혀진 것 같았다. 책장에 꽤 많이 꽂혀있는 시집들을 보면서 완전한 무관심이 아닌 늘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거리감을 느꼈는데 두 노시인의 시와 에세이, 대담을 읽고 나니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진 기분이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 두 노시인은 오랫동안 시를 써왔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경외감을 느꼈다. 순간, 내가 나이가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해보니 힘이 닿는 한 독서하고 리뷰를 쓰는 일이라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훌쩍 들어서도 여전히 책을 읽고 컴퓨터 앞에 구부정히 앉아 느낌을 남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실없는 웃음이 나를 스쳐가지만 뭔가 뿌듯할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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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풍성한 교회 이야기
김성곤 지음 / 두날개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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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에 중고 신입으로 고향에서 먼 타지역으로 직장을 옮겨가면서 내가 다닐 교회를 찾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고 일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 교단을 찾아 예배를 드렸지만 이 교회를 다녀야겠단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출퇴근 마을버스에서 한 교회에 관한 광고를 보게 되었고, 내가 살던 고향에서 개척교회를 다닌 터라 일단은 큰 교회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물어물어 그 교회를 찾아갔는데 먼저는 어마어마한 교회 크기에 놀랐다. 그리고 예배 전에 찬양을 듣게 되었는데 큰 교회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순식간에 매료 되었다. 찬양이 끝나고 이어지는 설교 또한 은혜로워서 예배가 끝나고 바로 그 교회에 등록했다.

  그렇게 그 지역에 머무르는 2년 반 동안 꼬박 그 교회를 다녔다. 그리고 청년부에 소속이 되었고 초등부 교사를 맡으면서 양육반 교육을 받게 되었다. 내가 지방에서 다녔던 교회는 작다보니 성도들에게 행해지는 교육도, 여러 사람과 교류할 시간도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성도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보니 셀 그룹이 아니면 서로를 알기가 힘들었고, 끊임없는 교육과 믿음을 끌어올리고 내면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의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런 프로그램에 등록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교사를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 얼떨결에 양육반 교육을 들었다. 그리고 날짜에 맞춰 교육을 듣고 직장을 다니면서 그에 따른 숙제도 하고 수련회도 가야 한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다. 숙제 과정 중 하나가 지정된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것이었는데 처음으로 읽었던 책이 이 책이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그리고 그런 교회를 만들어 낸 프로그램들과 여러 경험들이 녹아있는 책이었다. 읽는 데는 어렵지 않았지만 여전히 무지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내게 여러 문장들이 콕콕 마음에 박혔다. 작은 교회는 모든 걸 목사님이 감당하시지만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앙이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렇다고 우후죽순 격으로 교회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갖다 쓰는 것도 역효과지만 진정한 평신도에서 사역자를 세우는 일은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역자라고 해서 꼭 목사나 전도사로 키워야 한다는 건 아니고 좀 더 자신의 믿음을 높이고 그 성장과정을 다른 성도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역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이 책에서는 나의 그런 생각을 완벽하게 실현하고 퍼트리고 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2천2만 세계비전. 2020년까지 2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2만 명의 셀리더를 세워 우리 시대에 주님이 오시도록 하자는 비전.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도 늘 이 2천2만 세계비전을 꿈꾸고 실천하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숫자로만 봤을 때 불가능해 보였고 조금은 허황된 꿈이 아닌가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2천2만 세계비전에 관한 의미를 제대로 몰랐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그 꿈을 키워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꿈에 대한 상세하고 깊게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경험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의미를 조금은 알고 나자 2천2만 세계비전에 조금 더 다가간 기분이 들었고, 내 믿음을 좀 더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육반 교육을 듣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련소에 들어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설교를 듣고 그날 꾸려진 셀과 내면의 이야기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었는데 그 하루에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 저녁이 되어 통성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내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나도 놀랄 정도의 눈물이 쏟아졌다. 당시에 이런저런 일들로 힘든 일이 있었는데 설마 하루의 수련으로 내 마음이 열릴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열린 경험을 하게 되었고 곁에서 나를 위로해주고 믿어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참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당시의 뜨거웠던 믿음을 이어가진 못하고 있지만 그때의 경험이 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여전히 개척교회라 성도도 많지 않고 일손도 달리고 자칫 잘못하다간 정체된 믿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첫사랑을 회복한다면 내가 그곳에서 겪었던 뜨거운 믿음이든, 지금 이곳에서 갖고 있는 큰 드러남이 없는 믿음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나 몰라라 하는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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