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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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21쪽)


 

  철저히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노라 말하면서도 이런 책을 만나면 괜히 허리가 곧추 세워진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의 신작 산문이 나왔으니 한 번 읽어볼까 하며 펼쳤다가 예기치 않은 현실감각을 깨우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에 대한 충고와 함께 좀 더 진지하게 삶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에서의 인터뷰와 강연 대담을 모은 책인데 저자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현 사회를 말하고 그 안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지 작가의 시선을 들려주었다.


 

  작가의 시선에서 말하고 있기에 글쓰기와 책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작가는 무슨 책을 읽고 얼마나 읽으며 어디서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을까란 단계를 뛰어 넘어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며, 팍팍한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왜 글을 읽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키기도 한다. 단순하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작가가 아니라 ‘표현력을 독점했다는 게 맞는 말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예전에 자기가 읽었던 것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이라며 자신만의 작가 세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희망을 가지거나 기다리라는 말보다 현실을 함께 인지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뭔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오면서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위로가 내게 곧장 닿지 않고 다른 세대 혹은 나와 먼 누군가에게만 닿는다면 그것 또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책을 좋아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다가도 멋진 작품들을 만나면 좌절하다 독자로 남겨져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탈출구 없는 번복의 연속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나의 두려움을 간파한 듯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 시키’며,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과거를 생생하게 우리 앞으로 데려다 놓’으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강해지고 마음속의 어둠과 그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힘을 잃’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라고.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빤하지만 설렌 말도 잊지 않고 말이다.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작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121쪽)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늘 고민하고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왜 그렇게 시간을 할애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지 몰랐다. 최근에야 그 일을 내가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며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더라도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저자를 통해 그 시간이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소설이 그저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작용을 우리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가장 멋진 점 아닐까요? 소설은 적어도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160쪽)


 

  철저하게 독자의 입장에 있다 생각하고 작품을 대할 때 순수하지 못하고 오만하게 대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책을 좋아하면 할수록,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순수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내 취향은 섬세해지고 더 예민해지고 있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바로 그것을 내놓으라’는 게 문학 독자의 욕망인 것처럼 보인‘다는 저자의 말에 좀 더 너그럽고(?) 편견 없이 문학을 대하겠노라 다짐했다.

 

 

  갈수록 살기가 팍팍해지는 현 시대에서 소신껏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현실은 인지하되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묵과해버렸기가 더 쉽기에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게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현 시대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거기서 글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저자에게 이전보다 더 한 신뢰감을 보태게 되었다. 그의 글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변화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렇기에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 더 높아져 가지만 우선은 타인이 아닌 내 자신을 진솔하게 바라보겠노라는 진부한 다짐을 하며 오늘을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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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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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짙은 안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두려움을 주는 안개였다. 길을 건널 때조차 무서울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서 내 존재가 굉장히 나약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인생이 그렇게 불투명하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불안했다. 그러다 그런 안개가 걷히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눈에 비친 모든 정경을 빨아들이곤 했다. 생뚱맞게 안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탐정이었던 남자.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 몇 개의 단서를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탐정 일을 했던 주인공이었기에 마치 추리소설처럼 단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찾고 예기치 않은 반전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아닌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을 잃어버렸고 그 기억을 찾고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철저히 과정의 책이었다.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내면이 텅 비어진 채 마주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에 당황했다. 그래서 그는 고뇌하고 방황하며 과거를 되찾는 것만이 자신을 찾는 게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중략)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130쪽)


  기억을 잃어버린 현재의 나에게 다시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쉽지 않은 일처럼 그는 안개 속을 거닐 듯 몽롱했고 자주 길을 잃었다. 그의 내면과 시선을 따라 가고 있지만 정작 나조차도 내 존재의 유무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자주 넘어졌다. 나는 주인공처럼 기억을 잃어버리지도 않았기에 그런 기억을 찾아 헤맬 일도 없었지만 어정쩡하게 나의 기억을 떠돌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누구이며, 나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속의 내가 진정한 내가 맞는지, 그게 진정한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 주인공을 좇으며 내 모든 것을 뒤집어 보게 되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183쪽)


  과거의 ‘나’만큼 나를 진실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어떠한 과정으로 채워졌던 간에 미래를 향해 내딛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게 과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기억과 단서가 정확하지 않기에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진정한 ‘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과정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그의 기억이 그를 한 집단과 이어주는 끈이라는 사실, 그의 기억의 모험이 그 인물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만끽하지 못했지만 안개 속을 헤매다 빠져나와 보니 형태는 그대로지만 조금은 달라진 내 자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주인공처럼은 아니더라도 한번쯤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공정한’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찰자의 목소리’인 내면의 소리와 함께 한발짝 떨어져서 스스로를 관찰해 본다면 적어도 옳지 않은 안개 속을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그냥 내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미래의 나를 걱정하며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려는 시도로 생각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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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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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해있는 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치고 싶어 아무렇게나 보내버릴 때가 있는 반면, 눈과 마음에 새기고 싶어 기웃거리는 순간들이 있다. 전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 집에서 뒹굴 거릴 때고 후자는 내가 잊고 있던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다. 그러다 눈과 마음에도 새겨지지 않을 때, 그 풍경을 글로 꾹꾹 눌러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닌, 오로지 나 혼자 간직하기 위해 쓰는 글 말이다.


  꼭 그런 기분이 느껴지는 글을 만났다. 눈과 마음에 더 깊이 새기기 위해 꾹꾹 눌러 쓴 글. 사적인 것 같으면서도 시인으로서의 시선이 있었고, 종종 그런 시선을 따라가지 못해 깊숙이 들어가지 못해 겉돌기도 했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글. 소설가 김연수가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국내에(혹은 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와 산문, 그리고 산문시가 묶여있는 책이었다.


  꽤 얇은 책임에도 완독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들일 정도로 집중이 잘 되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려 노력할수록 딴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내면은 아름답지(?) 못한 것인지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분명 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지 못했기에 나의 내면 탓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읽고 싶을 때 책을 펼쳐서인지 마치 다른 계절의 나를 만나는 양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래서 전체적인 느낌이 어떠했는지, 어떤 부분이 아름다웠고 어떤 부분이 나를 겉돌게 만들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할 순 없다. 그럼에도 내 안에 남겨진 메시지보다 결을 만들듯 내 시간 속에 새겨지는 그 순간들이 그냥 좋았다.


나는 워즈워즈처럼 바다보다는 호수가, 흰 눈 덮인 험한 산봉우리보다는 완만한 초록의 산이 좋다. (61쪽)


  이런 구절을 보면서 어쩜 나와 취향이 똑같은지 감탄하게 되고,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살아갔지만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흔적을 좇는 것도 좋았다. 괜히 사색에 잠겨 평범한 풍경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기도 했고, 내가 속한 이 공간과 시간들이 지극히 평범한데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거기서 저자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하면 너무 오글거리는 찬사일까? 설명할순 없지만 분명 시인의 시선을 느꼈고 보통 사람인 나와 다름에서 오는 삶을 대하는 태도도 본 것 같다. 아주 짧은 찰나일지라도 삶의 지난함에서 맛본 조금은 특별한 경험이랄까? 도통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시선을 맛보았다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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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 감기에서 아토피까지
김효진 지음 / 에디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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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들에게 먹이는 약들에 대한 걱정이 되기 시작해서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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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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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자못 흥미로웠지만 종교적인 배경이 깊어질수록 소설임에도 내가 가진 종교에 대한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해 이스라엘에서 서울로 향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펼쳐 지는듯 싶더니 아랍인 청년 이브라임의 녹음기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는 더 복잡하고 미묘해진다.


  낳아 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가 있는 주인공. 내림굿을 받은 어머니가 있는 주인공이라서 그런지 이브라임의 이야기 속에서 펼쳐진 환생이란 주제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가다, 점점 깊어지는 이브라임의 환생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득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십자군 시대에도 살았고 이집트의 기록관이기도 했던 이브라임은 다른 두 시대를 모두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는 예수가 있었고 예수의 아이를 낳아 기른 여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평범한 남자로 살아가고자했던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니 ‘소설은 소설로 받아들여야지.’ 하면서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내 믿음에 대한 불확신이 아닌 이런 내용을 과연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내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해 갖지 않아도 될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어 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엔 내내 마음에 걸리고 있었단 얘기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걸린다고 해서 이 소설을 편견으로 가둘 수 없었다. 불편한 마음이 치우치지 않게 소설을 읽어가고 있었지만 혼란스러운 시간의 배열이 더 몽롱하게 했던 것 같다. 예수의 삶 이외에도 십자군 전쟁의 잔인함과 두개의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이브라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또한 현실로 돌아와서 ‘나’와 어머니와의 관계, 그 안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삶의 연결 고리들이 소설의 제목과 꼭 맞아 독자를 유랑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식의 유랑이든 결국엔 누구나 유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랜 시간의 틈을 두고 삶을 살아온 이브라임이나,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와 독자인 나도 결국엔 다양한 의미로 유랑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느끼고 있는 고독과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과 존재여부에 대한 궁금증을 저자는 이토록 잔인하면서도 불편하게 소설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 길고 긴 이야기의 끝이 용서와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조금은 진부한 뜻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 여지는 광범위했지만 이 소설을 통해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종종 나를 넘어뜨릴 정도로 관통하는 존재에 대한 고독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비약적일까? 단호하게 ‘이러이러했다.’고 말할 수 없는 많은 여지를 남기는 소설이어서 여전히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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