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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몇 년 전 짙은 안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 두려움을 주는 안개였다. 길을 건널 때조차 무서울 정도로 짙은 안개 속에서 내 존재가 굉장히 나약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인생이 그렇게 불투명하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불안했다. 그러다 그런 안개가 걷히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눈에 비친 모든 정경을 빨아들이곤 했다. 생뚱맞게 안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탐정이었던 남자.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 몇 개의 단서를 가지고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선다. 탐정 일을 했던 주인공이었기에 마치 추리소설처럼 단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찾고 예기치 않은 반전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아닌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을 잃어버렸고 그 기억을 찾고 있다는 사실만 인지할 뿐 철저히 과정의 책이었다.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내면이 텅 비어진 채 마주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에 당황했다. 그래서 그는 고뇌하고 방황하며 과거를 되찾는 것만이 자신을 찾는 게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중략)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130쪽)
기억을 잃어버린 현재의 나에게 다시 존재감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쉽지 않은 일처럼 그는 안개 속을 거닐 듯 몽롱했고 자주 길을 잃었다. 그의 내면과 시선을 따라 가고 있지만 정작 나조차도 내 존재의 유무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자주 넘어졌다. 나는 주인공처럼 기억을 잃어버리지도 않았기에 그런 기억을 찾아 헤맬 일도 없었지만 어정쩡하게 나의 기억을 떠돌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누구이며, 나를 지배하고 있는 기억 속의 내가 진정한 내가 맞는지, 그게 진정한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 주인공을 좇으며 내 모든 것을 뒤집어 보게 되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183쪽)
과거의 ‘나’만큼 나를 진실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어떠한 과정으로 채워졌던 간에 미래를 향해 내딛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수 있는 게 과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기억과 단서가 정확하지 않기에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진정한 ‘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 과정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중요한 것은 그의 기억이 그를 한 집단과 이어주는 끈이라는 사실, 그의 기억의 모험이 그 인물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만끽하지 못했지만 안개 속을 헤매다 빠져나와 보니 형태는 그대로지만 조금은 달라진 내 자신을 만난 기분이었다.
주인공처럼은 아니더라도 한번쯤 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공정한’까지는 아니더라도 ‘관찰자의 목소리’인 내면의 소리와 함께 한발짝 떨어져서 스스로를 관찰해 본다면 적어도 옳지 않은 안개 속을 헤맬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런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그냥 내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미래의 나를 걱정하며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려는 시도로 생각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