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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평점 :
지은이는 알래스카라는 미지와 만나도록 운명지워졌던 걸까.
일본에 살던 한 소년이 학창시절 헌책방에서 우연히 알래스카 사진집을 손에 넣게 되고, 이상하게도 그 책에 실린 모든 사진이 마음에 든다. 손때가 묻어 책장마다 모서리가 새카맣게 변할 만큼, 외출할 때도 들고 다니며 본다. 처음에는 그냥 좋아서, 그러다가 나중에는 거기 실린 마을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대체 그곳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소년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사진 아래 조그맣게 나와 있는 마을 이름, 쉬스마레프. 소년은, 편지를 쓴다.
"쉬스마레프 마을이 찍힌 사진을 책에서 봤습니다. 저는 알래스카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찾아가고 싶어졌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저를 초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음 써본 영문 편지, 주소는 '미국, 알래스카'. 수신인은 쉬스마레프 촌장이었다.
이런 경우 편지를 쓸 확률은? 그 편지가 제대로 도착할 확률은? 심지어 답장이 올 확률은...?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소년은 편지를 받는다.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 우리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니 무척 고맙습니다. 여름은 순록 사냥이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언제든지 오신다면 환영하겠습니다...."
이런 게 꿈이 아닐까? 소년은 그때부터 반년동안 알래스카 여행 준비를 해서 드디어 출발, 며칠을 비행해서 쉬스마레프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가장 강렬한 체험을 하게되는 3개월. 무엇보다 자신의 작은 방에서 상상만 했던 곳에 실제로 자신이 서 있다는 기쁨,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여행. 그때 그는 열 아홉의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그 후 사진이라는 직업을 선택하였고, 7년 만에 알래스카로 돌아온다. 알래스카의 자연과 야생 동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진을 찍어 발표한다.
1952년 생, 호시노 미치오. 그의 글을 읽으면, 그와 알래스카는 운명으로 얽혀있다, 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라는 전달자가 있어 우리에게 알래스카를 보여준다. 나 또한 알래스카와 어떻게 운명지워진 것일까? 호시노 미치오를 통해 완전한 미지였던 알래스카가 내 삶과도 얽혀든다... 신비롭다 할밖에.
여러 권의 책을 펴냈지만, 이 책은 특히 깊은 울림을 준다. 깊은 밤, 그러나 대낮처럼 환한 백야의 알래스카의 한 모퉁이에서 그는 글을 쓴다. 알래스카라는 원초적인 자연이 그 속에 품고 있는 생명과 또 무생명의 이야기를, 그 속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알래스카가 끌어당긴 자신의 이야기를.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듯, 흐려지지 않은 맑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위대한 자연 앞에서 그는 순응하고 바라보며, 겸손하다.
일본인- 알래스카에서의 삶, 이런 비현실적인 가느다란 줄을 잇고 있는 그이지만, 일때문에 남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 문명의 속도에 놀라고 낯선 세계와 마주칠 때의 소외감이 두렵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런 두려움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을 횡단한 어느 탐험대의 이야기였습니다. 대상을 편성해 남미의 산악지대를 여행 중이던 어느 날, 짐을 져야 할 셰르파들이 멈춰 섰습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난처해진 탐험대는 급료를 더 올려줄 테니 빨리들 서두르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일당을 올려달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셰르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갈 수 없다며 버텼습니다. 현지인들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원이 대체 왜들 이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셰르파 대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너무 빨리 걸어왔소. 그래서 마음이 아직 우리를 따라오지 못했소. 마음이 우리를 찾아 여기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그 탐험대원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탐험대원들은 아마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 낯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세계에 자신들은 결코 동화될 수 없다는 소외감, 그 소외감이야말로 낯선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인간이 겪게 되는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
아.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나는 호시노 미치오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책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책은 자주 멈췄다. 왠지 옆길로 는질는질 걸어왔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삶조차도, 마치 아직 따라오지 못한 정신을 놓친 채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허둥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알래스카에는, 영혼을 놓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이 아직 있을 것이다. 그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알래스카 안에서도 완전히 사람과 격리된 곳에서 살아가는 제이미 가족도 그럴 거다. 그들도 때로 뼈에 사무칠 정도로 외롭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이미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과연 도시는 여기보다 덜 외로울까, 거기 가면 좀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그리고 고독과도 친구가 된다. 그들은 알래스카의 아름다움, 그 깊은 쓸쓸함을 사랑한다. 자연이 인간을 향해 내미는 그 고독한 손길을 매만지며 그곳에서 살아간다.
그의 삶에는 툰드라가, 극북의 바람이, 백야의 엷은 빛이, 무리지어 이동하는 카리부 떼가, 그리고 북극의 툰드라에서 긴긴 여행 끝에 머나먼 북쪽의 해안에 당도한 등피나무가 들어있다.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한 캠프에서 잠자는 중 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고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어찌 그런 일을 정신을 놓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으랴. 그의 생은 또다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북극에서의 삶으로, 곰의 생으로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