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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787년에 영국이 시에라리온을 세울 당시에는 해방된 노예들의 주거지였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프리 타운, 즉 '자유의 도시'라 불렸다 그러나 시에라리온이 독립한 이후 이곳에 함께 살던 부족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반란군은 수년 동안 군사 정부에 대항해서 싸웠다. 반란군은 청소년들을 유인해서 교육시킨 뒤 싸움터에 내몰았다. 그리하여 수천 명에 달하는 아동 병사들이 내전에 참가했다. 이들 중 많은 어린이가 다치거나 죽었다.' (실제로는 반군 뿐만 아니라 정부군도 어린이를 전쟁터로 끌어당겼다. 이스마엘은 정부군에 속했다.)
어린이 세계 풍물 지리백과에서 시에라리온을 소개하는 항목이다. 그저 지리백과의 한 항목이었을 뿐, 게다가 스쳐지나갈 게 뻔했을 멀고 먼 아프리카의 한 나라, 이스마엘 베아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길고긴 여정을 소개하면서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온다. 책의 힘이란 그렇지... 빼어난 기억력과 - 이것이 특히 그의 크나큰 고통의 이유이기도 했거니와- 문학적 감수성을 갖춘 한 십대 소년의 글을 통해 나도 고통의 한 순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아프리카의 내전 이야기.. 그러나 보통의 책에서는 차마 다룰 수 없었던 너무나 상세하고 그래서 처참한 기록들. 어떻게, 드넓은 우주 한가운데 그저 작고작은 초록별일 뿐인 지구라는 곳에서, 온갖 동식물종들보다 우월한 종인 듯 마음대로 땅 위를 활보하는 인류라는 종이, 이토록 여러 곳에서 전쟁, 전쟁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파괴하고 불특정의 무죄한 다수를-사람과,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파멸로 이끌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인류라는 종은 대체 전 지구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모든 악은 인류에서 나오는 듯하다.. 자연과 인류 스스로의 파괴자.. 이스마엘 베아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시에라리온의 이야기는 더이상 어떤 처참한 상황이 가능할 지 알 수 없는 마지막의 공포를 전달한다. 전쟁과 폭력,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죽음이다. 몸 뿐만 아니라 정신의 죽음이 이어진다.
시에라리온, 주로 스텝과 유사한 사바나로 이루어진 나라, 해안 근처에는 아직도 열대림의 흔적이 남아있고, 강가의 조약돌 사이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는 나라, 500만 중 많은 사람들이 자급자족으로 살아간다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는 나라. 그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스마엘과 또래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수영을 하고 사소한 집의 일을 돌보면서 형제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하루를 즐겁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스마엘은 랩과 힙합에 빠지면서 래퍼로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로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곧잘 암송하던, 인생이 즐겁던 장난꾸러기 소년일 뿐이었다.
그런 이스마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마치 벼락처럼 어른들의 전쟁이 덮친다. 정말로 그건 벼락처럼 그에게 내려꽂혀 그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상황으로 몰고간다. 단지 어린 소년의 감각으로, 어린 소년의 본능으로 그는 죽음을 피해 달아난다. 스스로도 수없이 많은 죽음의 상황을 겪고,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죽음을 목격하였지만 그래도 죽음은 끝까지 그 두려운 그림자로 그를 따라다닌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지워진 감당할 수 있을만한 무게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흔히들 말하기 좋아하는, 그 고통을 니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너에게 주어지는 거야, 따위의 말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아무도 그런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인을 독재 군부와 반군의 투쟁, 부족간의 갈등, 이런 언어로 규명한다는 것은 얼마나 값어치 없는 일인지. 무고한 생명들은 그 속에서 죽어가고 넋을 잃고 황폐해진다.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삶이다. 어린이는 어린이의 삶을 잃어버린다. 그것이 전쟁의 손끝이 남기는 무시무시한 상처들이다.
이 책은 전쟁의 기록이기도 하며, 생명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기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도 여기 생명은 이어진다. 그건 비장한 일이다. 어제 전쟁을 겪어도 오늘 삶은 또 이어진다. 그것이 삶의 곤혹스러움이다. 이스마엘은 전쟁의 깊고도 날카로운 손아귀 속에서도 순간순간 또 삶을 경험한다. 그것은 비록 죽음과 동거중인 삶이지만, 그래도 뛰고 있는 삶이다. 그 죽음과 삶의 기록을 고통으로 들은 자, 전쟁을 증오하게 될 것이고 진실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든, 때가 되면 통과의례로 이스마엘 베아의 기록을 고통으로 읽을 일이다.
놀랍게도, 그 날카로운 전쟁의 손길이 온 나라를 할퀴고 있는 그 상황에서도 순간의 평화, 부분의 평화가 있다. 기적과도 같은 그 평화... 물론 찰나와 같아 순식간에 박살이 나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찰나의 평화는 기적과 같다. 그런 기적같은 순간에 보여지는 작은 마을의 모습들은 더 아프고 더 안타깝다. 그러나 그 모습들은 평화로운 시에라리온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보통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두려움 속에도 돌봄이 있다...
이스마엘은 어느날 갑자기 유니세프에 의해 그 지옥을 빠져나오게 되지만, 책의 나머지 1/3은 그의 재활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를 또 보여준다. 이미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난 유리구슬처럼, 뾰족한 파편으로만 남아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대까지도 찌르고야 마는 흉기가 되어버린 영혼이다. 그런 어린 영혼들이, 인류의 또다른 특징인 연민과 박애, 사랑의 힘으로 느리게 느리게 치유되어간다.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이 책을 끝까지 볼 수조차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 조차도 숨가쁜 과정이었다.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평화? 지역이라는 곳에서도 전쟁은 일상적인 일이다. 컴퓨터 게임으로 날마다 전쟁을 경험하는 아이들의 나라, 그런 게임을 만들고 팔아 살아가는 어른들의 나라가 아닌가? 두렵다. 우리는 마음 속에 전쟁이라는 괴물을 키우는 일상의 이 무감각한 삶을, 정말로 벗어던져야 한다. 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겠지. 전쟁이라는 괴물의 무참한 속성을. 모두, 정말로 고통스럽겠지만, 이스마엘의 고통스런 고백에 귀를 기울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