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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최고의 10경 - 영화평론가 김소영이 발견한
김소영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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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소개하는 영화의 면면을 보면 일단 내게는, 익숙한 것보다 생소한 것이 많았다. 이 책의 지은이가 '보이지 않는' 영화의 족적을 따라다닌다는 게 제일 큰 이유이겠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영화' 라는 건 한국 영화사에서 이미 역사 속으로 편입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질 수도 없고 또 본다 한들 다가오기도 어려운 영화를 말하는 듯하다. 한국 영화사에 현존하는 최고(古)의 영화라는 1934년 작 <청춘의 십자로>라든가, <청춘..>이 발견되기 전까지 최고의 영화로 매김되었던 <미몽>이라는 영화, 41년 작 <반도의 봄> 들과 같이 한국 영화사의 텅 빈 사료실을 하나씩 채워가고 있는 영화들 말이다. 물론, 몇몇 영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보았음직한 영화들이다.  

내게는 다행하게도 또다른 한 축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보이는' 영화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2009년작인 <마더>와 2006년작인 <괴물>, 김기덕 감독의 <빈집>과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이 그러하다. 미처 보지 못한 영화도 있지만 대체로는 봤고, 안 본 영화도 짧은 평론이라든가 소개를 통해 아주 낯설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누구일까? 어떤 독자층을 향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야 할까? 이 영화평론가가 소개하는 한국영화의 10경이라는 건, 평범하게 영화를 사랑하고 좀더 잘 이해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다소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한다. 반 이상이 한국 영화사를 연구할 사람들에게나 읽혀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해서이다. 그 지나간 시대의 영화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의 단순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노력없이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영화를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고 그 영화가 그 시대에 어떤 의미로 읽혔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실은 설명 없이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사를 공부할 사람들이 아니라면 저절로 관심을 갖고 즐기기 위해 찾아볼 영화가 아닐 터인데 그런 영화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시대의 코드를 이해하기 위한 평론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앞부분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뒷부분에 가서 그런 거리감은 줄어들었지만, 내내 불친절한 편집과 책소개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두 과목으로 나뉘어야 할 강의를 한 교수가, 한 과목으로 묶어서 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10경, 이라는 말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엮어보려 하지만 그런 연관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7경과 8경과 9경은 임권택과 홍상수와 김기덕, 그러니까 감독과 작품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5경도 이만희 감독의 무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6경은 트라우마로 세 작품을 엮고, 10경은 섹슈얼리티로, 4경은 근접 섹스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엮었다. 1, 2, 3경은 한국 영화사의 역사가 되어버린 작품들이다. 이런 엮음이 어떤 일관성이 있고 어떤 근거로 한 권의 책에 함께 버무려진 것일까? 내게는 그저 지은이가 이곳 저곳에 발표한 영화 평론을 함께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서 다소 억지로 그 관계를 '상관있는' 것으로 만들어보려 했다는 느낌이 든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따로 읽힌다. 그저 한 편 한 편의 평론들로 읽히면 충분할 것들이 무언가 썩 어울리지 않는 한 묶음으로 불편하게 엮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권으로 묶이지 않았으면 읽지 않았을 내용들을 불편하게 읽어야 한다는 게 편집의 불친절로 느껴진다. 

각 편의 영화에 대한 평론에 대해서는 물론 일반적인 영화보기를 넘어서는 평론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편 한 편이 들어앉은 집을 생각해볼 때, 그 각각이 제 집에서 제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우니 책 한 권을 읽은 게 아니라 그저 한 편 한 편을 읽었다는 것으로, 그리하여 내게는 불편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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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4-3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글 남기고 갑니다. 저도 책을 보면서 내내 불편하더라고요. 도무지 평론가의 어려운 평론은 친절하기보다는 잘난체 한다는 느낌밖에는...

2010-04-30 1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단길 2010-05-0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제가 가진 생각을 어쩜 이리도 잘 표현하셨는지요.

sprout 2010-05-03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갑습니다. 동감이시라니 든든합니다.
 
빠빠라기 - 처음으로 문명을 본 南洋의 추장 투이아비 연설집
에리히 쇼일만 지음, 최시림 옮김, 이성표 그림 / 정신세계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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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아비 추장의 나라 남태평양 사모아의 섬들에서는 문명세계 사람들을 '빠빠라기'라고 불렀다. 선교사를 통해 빠빠라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성년이 되어 그 문명인 들의 나라를 직접 보고 돌아온 투이아비 추장은 원주민 동포를 향해 그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들은 원래 투이아비가 자기 나라 사람들만을 위해 이야기한 것들이다.  

추장의 마을에서 1여년간 그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 생활한 문명국 독일의 에리히 쇼일만은, 가까스로 그에게서 친구로 받아들여지고, 그 이래로 원주민을 위한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수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훨씬 후에, 에리히 쇼일만은 이 연설들을 독일어로 번역해도 좋다는 묵시적인 승낙을 겨우 받아내고, 쇼일만은 그것이 '종이에 압축되어 묶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투이아비의 의사를 거슬러서 굳이 유럽의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고 독일어로 번역 출판을 하게 된다. 그때가 1920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의 일. 투이아비 추장이 자기 나라 사람들을 위해 연설한 것은, 

백 년 전의 일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백인들의 마력을 경계하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호소했으며, 연설하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투이아비가 '빠빠라기- 하늘을 찢고 온 사람'라고 불렀던 그 유럽의 문명인들의 이야기는 어느 새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 백 년 전의 우리라면, 투이아비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까.  

투이아비는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맨 처음 그의 섬에 온 백인들은 그들의 하느님을 전도한다. 원주민들에게 선교사들은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래서 백인들은 오직 위대하신 하느님만을 숭배한다."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었고, 문명국 유럽에 관심을 가졌고, 드디어 직접 유럽을 방문하고 온 투이아비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 선교사는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리들을 속였다. 그들에게 진짜 하느님이란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 그들이 '돈'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사랑의 신에 대해 유럽인에게 말해보라. 얼굴을 찡그리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사고방식이 유치하다고 말하며 웃을 것이다. 그런데 반짝반짝 광이 나는 둥근 모양의 쇠붙이나, 크고 묵직한 종이를 건네보라. 그 순간 눈은 빛나고 입술은 흘러넘치는 군침으로 반짝거릴 것이다. 돈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며, 돈이야말로 그들의 하느님이다. 

투이아비는 거침없다. 그에게는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이다. 또한 그는 일 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과 일하고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해할 수가 없다.  

남의 힘을 끊임없이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도 괴로워하지도 않거니와 잠 못 이루는 밤도 없다. 일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남에게 돈의 일부를 나눠주어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다. 그들은 자기의 많은 형제들을 고통스러운 일 속에 방치한 채로 즐기고, 자기들만 몸을 살찌우고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더러워질 까닭이 없는 허여멀겋고 파리한 손가락을 기뻐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럽에서는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밖에, 또는 전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편, 다른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수많은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양달에서 볕을 쬘 시간도 없는데, 다른 절반의 사람들에게는 넘치도록 있다.  

지금 이런 현상들은 더 첨예하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사실상 모든 것의 꼭대기에 돈이 올라앉은지 오래다. 빠빠라기들이 '부는 행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며 숭배할 때, 투이아비는 돈은 바로 '아이투우', 악령이라고 말한다. 돈에 관계를 가진 자는 그 마력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탐내는 자는, 살아 있는 한, 그 힘도 모든 기쁨도 돈을 위해서 바쳐야만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그는 바로, 부자인 유럽 남자들의 눈이 침침하고 지쳐 있지만, 그들 원주민들의 눈은 위대한 빛처럼 반짝이고, 기쁨과 힘과 생명이 넘치는 것을 보고 그런 사실들을 볼 때 돈은 악령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그 중 소수는 아는 대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알고도 그저 알기만 할 뿐이며, 나머지는 아예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물결에 휩쓸려 그 물결이 무언지 볼 틈이 없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오오, 형제들이여, 이런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모아의 한 마을 사람 전부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오두막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그네에게 단 하룻밤의 잠자리도 내어주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나나를 한 아름 끌어안고서는 바로 눈 앞의 굶주린 사람이 애걸을 하는데도, 단 하나도 나눠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러자 그의 말을 듣는 그의 형제 원주민들은 놀라고 분노한다. 

나는 너희들의 눈에 노여움이, 입술에 경멸하는 빛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본다. 정말이다. (형제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쉽게 믿지 못한다 ) 정말이다. 이것이 언제나 빠빠라기가 하는 짓이다. 설령 백 장의 거적(옷)을 갖고 있을지라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한 장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지 않는 것까지는 좋은데, 쓸데없이 거적도 없느냐며 비난하기도 하고, 거적이 없는 것은 갖지 못한 사람의 탓이라며 괜한 말을 하기도 한다.  

설령 오두막집 천장의 가장 높은 곳까지 넘칠 만큼의 먹을거리가 쌓여 있어, 그와 아이가 1년을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여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서 핼쑥해진 사람을 찾아 나서려고는 하지 않는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가까이에 수많은 빠빠라기가 굶주림으로 핼쑥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야자는 익으면 저절로 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떨어진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잎도 열매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야자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야자나무가 새로운 열매를 맺겠는가. 야자나무는 빠빠라기보다 훨씬 현명하다.  

공동체 생활,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맞는 일을 넘치지 않을만큼 기쁘게 하면서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그들의 가치관으로는, 이 우스꽝스런 일이 어떻게 설명 가능한지를 도저히 알지 못한다. 투이아비의 이야기를 듣는 형제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 단순 명료함, 우리 중에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내게 있는 것을 나누면 된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자본의 무모함과 사악함과, 대책없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실은 그 사실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세상의 모든 '주의'들은, 납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투이아비는, 그 문명인들이, 그토록 많이 움켜쥐고도 얼굴에 기쁨이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곧, 그들이 움켜쥔 그것의 속성을 깨닫고, 그걸로는 도저히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경계하라! 고. 

투이아비 추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 티벳 고원이나 네팔의 원주민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말을 달리다가도 잠시 멈춰 스스로의 영혼이 제 속도로 따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신 세계는 이미 우리들의 주변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어디에든 매여 있는 부자유한 영혼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투이아비의 목소리는 이렇게 내 귀에 쟁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유전자 어디 쯤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공명을 일으킬 만한 DNA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우리 속에 있기에 투이아비의 목소리는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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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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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결국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 이러든, 저러든. 

지은이는 유년기와 아동기, 청년기를 거쳐 중년기를 살고 있는 중. 지은이로 하여금 이 책을 쓰고야 말게 만든 아버지는, 향년 97세, 노년기를 살고 있는 동시에 죽음을 앞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경험과 과학에 의하면 아버지는 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스러져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야지만 아직 아버지는 '그토록 수명에 집착하고, 생존 그 자체에 목을 맨다. 여전히 못 말리게 활기차고 그 생명력은 가히 기계적이어서, 사람의 진을 쏙 빼놓도록 소모적'으로 보인다. 그게, 아들에게는. 

반면 이 글의 저자인 51세의 아들은,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미 반쯤 홀린 상태이다. 죽음, 그것은 삶이라는 임시직 후에 찾아오는 상근직이다. 이제는 애써 고개를 틀지 않고는 반대쪽을 바라볼 수가 없으니,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새 이런 상태이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지은이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라는, 너무나 맹렬하고도, 끊어져야 할 듯한데도 하염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삶의 비현실성에 과학과, 경험과, 인문을 들이대며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증명하고 확인시키고 싶어졌던가?   

내 나이로 치자면 거의 이 글의 지은이에 가까와지는 중이지만, 어쩌다 보니 지은이만큼 죽음에 집착하지도, 지은이의 아버지처럼 삶에 목매지도 않고 살아왔다. 내 어머니의 때이른 죽음이 삶에 대한 또한 죽음에 대한 내 관점을 크게 휘어버렸음직도 하건만, 여직 그저 살고 있을 뿐이지 삶이나 죽음 자체에 깊이 천착해보지 않았다. 어느 순간 벼락처럼 갑작스레 와버릴 수도 있는 죽음이건만 아직은 그 번쩍 하는 순간에 대한 예감도 하지 않고 미리 마음 속에 쟁여두지도 않는다. 또 어쩌면 이글 지은이의 아버지처럼 약간은 징그럽게 길게 이어질 수도 있는 삶이지만 그에 대한 대비나 걱정 없이 지금을 살 뿐이다. 그때가 되면 그때의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접어두면 그만이다. 무신경하거나 무대책하거나, 지금 살아내기도 만만치가 않으니 앞이고 뒤고 가끔 생각할 따름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뭐하러  

독자를 향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라고 중얼거리는가.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건가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그도 저도 아니면 한번 정리나 해보고 싶었던 것인가.  

아버지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딸 내털리도 끼운다. 3대, 유전자는 이어진다는 것. 그의 죽음은 그에게는 끝이지만 그의 유전자에게는 끝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새로운 것도 아닌데, 어쩌라고?)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유년과 청년과 중년기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그는 그 자신 자주 인용하던 우디 앨런과도 같이,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수없이 인용한다. 자신의 의견에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 이렇기도 하다, 간혹 이렇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이 정도의 인용이 끝도 없다. 가끔 가슴에 퍽, 하고 다가오는 한 마디를 남긴 이도 인용된다. 때로 잠시 책을 덮고 눈감고 생각하거나, 살짝 밑줄을 긋거나, 다음에도 기억하고 싶어서 종이쪽을 약간 접어두거나 할 만큼 유용하기도 하다. 지은이의 말은 아니다.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줍듯, 지은이가 이것저것 모아두는 말들. 그 도토리들은 때로 겨우내 소중한 양식이 되기도 하고 때로 잊혀진 채 묻혀 이듬해 싹을 틔우기도 하고 그도저도 아니면 그저 땅 속에서 썩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기도 할 것이다. 나도 가끔 이 책을 꺼내들고, 그 도토리들이 어찌됐나, 살펴보기도 하겠지. (그러지 뭐) 

1907년, 36세이던 프랑스 작가 폴 레오토는 말했다. '어느 날 누가 물었다. "요즘 뭐하고 지냅니까?" 나는 대답했다. "나이 먹느라 바쁩니다."  

가끔 그가 인용한 말들은 허무하다.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머리는 말했다. ' "30세에 죽었으나 60세에 묻혔다" 라고 묘비에 써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주 가끔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지은이의 아버지는 지금도 삶에 천착한다. 아들은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이세요." 

지은이는 오래전부터 죽음에 천착해왔다. 아버지는 말한다. "삶을 받아들이거라." 

그 둘의 이야기를 화면에 담으면 아마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보여주는 한 편의 프랑스 영화 같지 않을까. 가끔 말로 웃기고 가끔은 번잡스럽게 말하고 그러다 보면 끝나는. 그러니, 내가 어느 나이 쯤에 다시 이 책이 생각나 보고싶어질지, 도무지 알지를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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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살아 있다 - 4대강 사업의 진실과 거짓
최병성 지음 / 황소걸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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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아야 거짓을 이긴다- 눈이 밝으면 마음이 아픈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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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빠라기 - 영혼을 보는 눈 세상을 사는 지혜
투이아비 지음, 에리히 쇼이어만 엮음, 유혜자 옮김, 이일영 그림 / 가교(가교출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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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라는 것은 삶을 얼마나 기쁨에서 유리시킨 걸까. 엉터리 문명은 쉴새없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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