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빠라기 - 처음으로 문명을 본 南洋의 추장 투이아비 연설집
에리히 쇼일만 지음, 최시림 옮김, 이성표 그림 / 정신세계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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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투이아비 추장의 나라 남태평양 사모아의 섬들에서는 문명세계 사람들을 '빠빠라기'라고 불렀다. 선교사를 통해 빠빠라기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고, 성년이 되어 그 문명인 들의 나라를 직접 보고 돌아온 투이아비 추장은 원주민 동포를 향해 그 이상한 나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책의 내용들은 원래 투이아비가 자기 나라 사람들만을 위해 이야기한 것들이다.  

추장의 마을에서 1여년간 그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 생활한 문명국 독일의 에리히 쇼일만은, 가까스로 그에게서 친구로 받아들여지고, 그 이래로 원주민을 위한 그 이야기들을 기록한 수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훨씬 후에, 에리히 쇼일만은 이 연설들을 독일어로 번역해도 좋다는 묵시적인 승낙을 겨우 받아내고, 쇼일만은 그것이 '종이에 압축되어 묶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투이아비의 의사를 거슬러서 굳이 유럽의 독자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고 독일어로 번역 출판을 하게 된다. 그때가 1920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의 일. 투이아비 추장이 자기 나라 사람들을 위해 연설한 것은, 

백 년 전의 일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백인들의 마력을 경계하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호소했으며, 연설하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투이아비가 '빠빠라기- 하늘을 찢고 온 사람'라고 불렀던 그 유럽의 문명인들의 이야기는 어느 새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있다. 백 년 전의 우리라면, 투이아비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까.  

투이아비는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맨 처음 그의 섬에 온 백인들은 그들의 하느님을 전도한다. 원주민들에게 선교사들은 "하느님은 사랑이다. 그래서 백인들은 오직 위대하신 하느님만을 숭배한다."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었고, 문명국 유럽에 관심을 가졌고, 드디어 직접 유럽을 방문하고 온 투이아비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 선교사는 우리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우리들을 속였다. 그들에게 진짜 하느님이란 둥근 쇠붙이와 묵직한 종이, 그들이 '돈'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사랑의 신에 대해 유럽인에게 말해보라. 얼굴을 찡그리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사고방식이 유치하다고 말하며 웃을 것이다. 그런데 반짝반짝 광이 나는 둥근 모양의 쇠붙이나, 크고 묵직한 종이를 건네보라. 그 순간 눈은 빛나고 입술은 흘러넘치는 군침으로 반짝거릴 것이다. 돈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며, 돈이야말로 그들의 하느님이다. 

투이아비는 거침없다. 그에게는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이다. 또한 그는 일 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과 일하고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해할 수가 없다.  

남의 힘을 끊임없이 빼앗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도 괴로워하지도 않거니와 잠 못 이루는 밤도 없다. 일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남에게 돈의 일부를 나눠주어야겠다는 식의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다. 그들은 자기의 많은 형제들을 고통스러운 일 속에 방치한 채로 즐기고, 자기들만 몸을 살찌우고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더러워질 까닭이 없는 허여멀겋고 파리한 손가락을 기뻐하고 있다.  

이리하여 유럽에서는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밖에, 또는 전혀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편, 다른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수많은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 이 사람들에게는 양달에서 볕을 쬘 시간도 없는데, 다른 절반의 사람들에게는 넘치도록 있다.  

지금 이런 현상들은 더 첨예하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사실상 모든 것의 꼭대기에 돈이 올라앉은지 오래다. 빠빠라기들이 '부는 행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며 숭배할 때, 투이아비는 돈은 바로 '아이투우', 악령이라고 말한다. 돈에 관계를 가진 자는 그 마력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탐내는 자는, 살아 있는 한, 그 힘도 모든 기쁨도 돈을 위해서 바쳐야만 한다는 것을 설파한다. 그는 바로, 부자인 유럽 남자들의 눈이 침침하고 지쳐 있지만, 그들 원주민들의 눈은 위대한 빛처럼 반짝이고, 기쁨과 힘과 생명이 넘치는 것을 보고 그런 사실들을 볼 때 돈은 악령이라고 말한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그 중 소수는 아는 대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알고도 그저 알기만 할 뿐이며, 나머지는 아예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물결에 휩쓸려 그 물결이 무언지 볼 틈이 없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오오, 형제들이여, 이런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모아의 한 마을 사람 전부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오두막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그네에게 단 하룻밤의 잠자리도 내어주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나나를 한 아름 끌어안고서는 바로 눈 앞의 굶주린 사람이 애걸을 하는데도, 단 하나도 나눠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러자 그의 말을 듣는 그의 형제 원주민들은 놀라고 분노한다. 

나는 너희들의 눈에 노여움이, 입술에 경멸하는 빛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본다. 정말이다. (형제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쉽게 믿지 못한다 ) 정말이다. 이것이 언제나 빠빠라기가 하는 짓이다. 설령 백 장의 거적(옷)을 갖고 있을지라고, 가지지 못한 자에게 한 장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지 않는 것까지는 좋은데, 쓸데없이 거적도 없느냐며 비난하기도 하고, 거적이 없는 것은 갖지 못한 사람의 탓이라며 괜한 말을 하기도 한다.  

설령 오두막집 천장의 가장 높은 곳까지 넘칠 만큼의 먹을거리가 쌓여 있어, 그와 아이가 1년을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정도여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서 핼쑥해진 사람을 찾아 나서려고는 하지 않는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가까이에 수많은 빠빠라기가 굶주림으로 핼쑥해져 있는데도 말이다.  

야자는 익으면 저절로 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떨어진다. 그러나 빠빠라기는 잎도 열매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야자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야자나무가 새로운 열매를 맺겠는가. 야자나무는 빠빠라기보다 훨씬 현명하다.  

공동체 생활,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맞는 일을 넘치지 않을만큼 기쁘게 하면서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그들의 가치관으로는, 이 우스꽝스런 일이 어떻게 설명 가능한지를 도저히 알지 못한다. 투이아비의 이야기를 듣는 형제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 단순 명료함, 우리 중에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내게 있는 것을 나누면 된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자본의 무모함과 사악함과, 대책없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실은 그 사실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세상의 모든 '주의'들은, 납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투이아비는, 그 문명인들이, 그토록 많이 움켜쥐고도 얼굴에 기쁨이 없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곧, 그들이 움켜쥔 그것의 속성을 깨닫고, 그걸로는 도저히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경계하라! 고. 

투이아비 추장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 티벳 고원이나 네팔의 원주민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말을 달리다가도 잠시 멈춰 스스로의 영혼이 제 속도로 따라오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신 세계는 이미 우리들의 주변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어디에든 매여 있는 부자유한 영혼들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투이아비의 목소리는 이렇게 내 귀에 쟁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유전자 어디 쯤에,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공명을 일으킬 만한 DNA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일까. 무엇이 우리 속에 있기에 투이아비의 목소리는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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