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친구 만나고 돌아오면서 좌석버스를 탔는데 광화문에서 버스가 떠날 즈음에 급히 탄 대학 3~4학년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계속 가방을 뒤진다. 버스카드나 지갑이 없는 걸 몰랐는지 안쓰럽게 계속 뒤지고 있다. 2분여를 뒤지더니 버스가 금화터널(이름 못 외움)인가로 향하고 있는데 "아저씨, 죄송해요. 여기서 내려주세요."한다.
기사아저씨는 무뚝뚝하게 굳은 표정으로 운전만 하시고... 이 아가씨 버스 바닥이 물 투성이인데 아랑곳 않고 장바구니 같이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뒤진다. 기사아저씨는 그제서야 퉁명스레 한마디 "잡아요. 넘어지니까."
이 아가씨는 죄송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가방을 들었는데 다시 또 뒤진다. 내가 보기엔 계속 뒤져도 안 나올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여기 어차피 내릴 데도 없고, 그냥 태워주실 것 같으니 그냥 계세요."라고...
대신 내가 카드를 찍어줄까 싶었지만, 그러기도 뭐하고 참으로 갈등됐던 것이 밤이면 자주 그러는데 오늘도 터널 안에서 공사를 하는지 반대차로를 막아놓아서 차가 많이 막혀서 연대쪽으로 가는 데 평소에 비해 몇배는 걸렸던 것이다. 아무튼 그 아가씨는 그제서야 좀 안심이 되는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래서 내가 "들어 드릴게요." 하면서 가방을 내 무릎에 올렸더니, "되게 무거운데... 이거 되게 무거워요." 하는 거다.
완전 순진, 배짱 없는 아가씨 같으니... 그 커다란 장바구니 같은 코랄블루 가방에는 한귀퉁이에 'Gasiri'라고 쓰여 있고, 뭐가 들었는지 꽤 무겁긴 했지만, 못 들을 만큼은 아니어서 무거운 티도 안 내고 묵묵히 들어줬다.
나도 예전에 99년인가 아침에 늘 타던대로 허겁지겁 집을 나와 버스를 탔는데 세상에, 지갑에 1만원짜리만 달랑 들어 있는 거다. 버스카드는 금액이 부족하고.. 그랬더니, 기사분이 살짝 눈웃음을 치시며 그냥 앉으라고 해서 죄송하면서도 기분이 되게 좋게 탔는데, 오늘 이 기사분은 절대 "그냥 타라." 내지 "다음에 내라."라는 말을 안 하시는 거다.
어차피 중간에 아무데서나 내리라고 내치지 못할 거면 기분 좋게 해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 아가씨가 언제 또 그 기사분을 만날진 몰라도 혹시 다음에 만나면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라는 인삿말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일인데 너무 쌀쌀맞고 무뚝뚝했다.
이 순진한 아가씨 그렇게 죄인처럼, 편하지 못한 자세로 서 있더니 공교롭게 나랑 같은 데서 내린다. 버스를 내려서 내가 앞질러 오는데 나한테 급기야 인사까지 한다. "안녕히 가세요." 허걱~ 무슨 인사까지... 요금이라도 내가 대신 내줬으면 절이라도 받았을 것 같은 분위기...
오늘 그 기사분은 1%가 아쉬운 분이었다. 아~ 아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