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보기 전 전화통화할 때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꽤 어린 톤이었다. 말투는 자상했고, 배려하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과 통화하는 것 치고는 붙임성도 있었다.

그 남자의 거주지는 서울시 남쪽의 S시.
나보고 사람들을 주로 어디에서 만나냐고 하길래, 종로, 신촌, 홍대에 주로 나가며, 가끔은 강남에도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강남은 안될 말이라며 홍대나 신촌으로 오겠다고 선뜻 말한다. 은근 기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약속장소를 홍대 근방의 호텔 커피숍으로 정했지.

비가 줄기차게 내리던 어제 오후, 약속장소로 나갔다. 엄마가 태워다 주셨는데 10여분의 여유가 있어 안 들어가고 차에 앉아서 노래를 듣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도착했냐구, 어디 있냐고. 그래서 내가 물어봤지. 혹시 은색차냐고.. 제 뒤에 계신 것 같은데요?
그 남자 왈, 아~ 앞차냐구...

나가겠다고 얘기하고 우산 쓰고 나갔는데 그 남자, 보조석 창문을 안 내리고 비 내리는 창문을 통해 눈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운전석에 앉아서 차문을 열어준다. 그 남자는 왜 안 타냐는 생각을 했겠지. 그렇게 졸지에 그 남자 차에 탔다. 슝~ 자기 나와바리인 양 거침없이 운전을 하더니 신촌쪽으로... '습관적으로' 자기집 방향으로 운전을 한다나???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 편했다. 무슨 말 해야 하나 고민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박서방이 내비게이션을 달아주고 갔다며, 두서 없이 말을 꺼낸다. 박서방?? 어떤 관곈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새 또 다른 말을... 아무튼 그런 끝에 나보고 집 어디냐고, 동네로 가자고 불쑥 제안한다. 나는 결정할 겨를도 없이 그럼, 뭐 그러자고... 대답하고.

내가 내비게이션에 '가라뫼'라고 치라고 했다. 그랬더니 '스마트'한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길은 강변북로. 내가 강변북로로 갈 필요는 굳이 없다고 얘기했음에도 내비게이션을 믿어보고 싶다며 내 말은 무시. ^^; 강변북로 중간중간 통제되어 우리집으로 오는 길은 완전히 뻥~ 뚫렸다.

중간에 그래도 내 말 들어주긴 하더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스마트'한 내비게이션은 어찌나 '스마트'한지 경로를 이탈하면 다시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네.

그렇게 우리 동네를 지나 그럼 '백마역'쪽으로 갈까요? 해서 그쪽으로 향했는데 가는 도중 말을 많이 하신다. 영화!! 나는 은근 편애하고, 관심있는 영화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 남자, 극장에 1년에 1~2번밖에 안 간다더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마이크 피기스, 빔 벤더스, 레오스 까락스(이건 내가 얘기했고), 현재 전혀 안 떠오르는 유명한 감독, 등등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을 줄줄 꿰고 있다. 놀라서 "영화 안 보신다더니 되게 많이 아시네요." 해도 반응은 시큰둥, "네, 별로 안 봐요." 헉~ 안 보는 거 맞는 거야? 진정??

지난 주에는 EBS에서 해주는 '원더풀 라이프'를 봤는데 정말 괜찮았다며 줄거리를 다 얘기해준다. 다큐멘터리를 주로 찍는 사람인 것 같다며 그 영화에 매료된 느낌을 팍팍 풍기더라. 집에 와서 누군가 찾아봤더니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더군.

그런 얘기를 하다가 '백마역'쪽으로 빠지는 길을 놓쳤다. T.T 어디로 가나 고민 잠시 하다가 호수공원쪽으로... 그럼, 이제 갈 곳은 롯데백화점이나 라페스타밖에 없다. 결국, 아주 쉽게 갈 수 있는 라페스타.

점심은 11시 반, 저녁은 5시 반. 식사시간을 무조건 지킨다는 그 남자, 샌드위치를 찾는다. 그 동네 샌드위치 전문점을 알고 있을리가 만무한 나는 눈에 보이는 별다방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선뜻 응한다. 배가 고팠던가 보다. 나보고 자리 잡으라고... 우산 두고 나왔더니 "그냥 커피 주문했어요." 하는 거다. 순간, 좀 놀랐지만, "네, 괜찮아요."

화장실에 다녀오니, 테이블에 머핀과 커피가 있다. 그 때부턴 그 남자의 자기 이야기가 줄줄줄. 알아서 말을 하니까 편하긴 엄청 편하다. 전문용어 무지하게 영어로 섞어가면서... 내가 재미있어하며 들어줬다. 미국에서 5년간 유학생활했다고... 

아~ 자기집은 밤 9시면 조용하단다. 12시 취침 - 6시 기상보다 9시 취침 - 3~4시 기상이 훨씬 좋은 것 같다며, 1시간 좀 넘은 것 같은데 일어나자고...

돌이켜보건대, 뭐 나도 사려깊은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 남자의 행동도 전화통화할 때와 상당히 간극이 있었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외모가 주는 환상(은 없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에게서 풍기는 안락함(?)을 바라는 건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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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7-17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본 거 맞나요? ^^;;
힘들어요. 어제 저도 그 남자처럼 9시에 잘뻔 했잖아요. 어찌나 피곤한지...

하루(春) 2006-07-1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울보 2006-07-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선을 보신거지요,,
음 그런데 정말 욕보셨네요,,

하루(春) 2006-07-17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우님, 귀여우세요.^^
울보님, 그렇죠. 선을 본 거죠. ㅎㅎ~ 위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6-07-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시 취침이라니.. 상상도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