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을 약간 놓친 게 확실하다. 시간에 제대로 못 맞춰온 건 내 잘못이지만, 그 극장직원도 잘한 건 아니다. 바빠 죽겠는데, "다시 시간 확인해 드릴게요. (빨간 색연필로 티켓에 동그라미와 밑줄을 그으면서) 어쩌구 저쩌구..." 그럴 시간에 티켓 2장 사느라 든 돈이 얼만지나 확인해 주겠다. 아니면 시간 없으니 지금 빨리 들어가시라고 말이라도 예쁘게 한마디 해주든가...

부랴부랴 뛰어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계모가 여자아이를 화장실에서 학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앞뒤 다 잘라내고 생각해도 일단, 방은진은 영화감독으로서 대단한 장편데뷔작을 선보인 것 같다.

방은진은 언제부터 감독을 꿈꾼 것일까. 그가 진지하게 연출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여배우로서 애매한 시점”에 다다랐다고 느낀 1998년경부터다. 출연하려던 영화와 공연이 무산되고, 들어오는 시나리오나 배역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서, 다른 돌파구를 찾아 연기 이론서를 번역하고 단편영화 스탭을 자원하는 등의 “곁가지 일”에 발을 들인 게 시작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진한 감독의 단편 <장롱>의 조연출로 참여했던 일은, 그가 자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씨네21

<오로라공주>라는 제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오로라공주에 얽힌 사연을 너무 빨리 알게 되어 약간 맥은 빠졌고, 딸을 비참하게 잃은 그 후유증으로 갈비집 아들에게 가위를 든 건 좀 당위성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부연하자면 아이를 학대하는 계모와 갈비집 아들에 대한 응징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변호사(전직 검사)에게는 불필요한 아량을 베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수많은, 인상적인 오로라공주 스티커들... 정말 섬뜩했다.

작년까지 꽤 재미있게 봤던 '실화극장 죄와 벌'에서 다중인격을 다룬 적이 있는데 정순정의 다중인격은 어설펐다. 마치 자신이 죽은 딸 민아가 된 듯 그렇게 차례차례 자기의 죽임에 일조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은 어쩐지 완전히 몰입할 수는 없었다. 정순정과 오민아를 오가며, 혹은 민아가 받았을 상처에 자신의 분노 몇 배를 더해 응징하는 모성애라니... 복수를 하는 것(중반 이후)까지는 살해 방법에도 감탄하고, 오로라공주 스티커를 붙여놓는 것까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피해자들에게 받은 상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억지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마지막 쓰레기 매립장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감정이 약간 흔들려 눈물을 조금 흘리긴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5명을 연쇄살인하는 완벽한 모습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관객은 변호사와의 뜨뜻미지근하게 늘어진 모습에 이르러 덩달아 풀어지고 만다. 그리고, 이 긴장감은 마지막 장면에 이를 때까지 다시 맛볼 수 없다. 마지막 장면은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잘하네요." 난 이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 사건현장에 도착하면 기도부터 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오형사는 자신의 어린 딸과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다. 목사 되는 것이 꿈이라면서 결국 '치사해서' 때려쳤다는 그 말이 웃겨서 혼났다.

* 마지막 장면부터 흘러나오는 노래 '꽃이 지다'는 남녀 듀엣곡인데, 여자 보컬이 장필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크레딧 올라갈 때 보니까 조원선(롤러 코스터)이길래 놀랐다. 조원선 목소리가 더 멋있어졌구나.  

* 방은진 감독이 나온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건 두달쯤 전, <비디오를 보는 남자>에서였다. 장현성(변호사로 나온 남자)과 함께 출연한 단편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 인상깊었던 대사가 문득 생각난다.

- 모든 첫 情事는 운명이다.

아무튼 방은진 감독 대단한 첫발을 내디뎠다고 믿고 싶다. 이 정도면 탄탄하고 흡인력 있지 않은가? 물론, 관객들에게 자꾸 강요하는 건 마땅히 버려야 겠지만 시나리오 작업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아 흐뭇하다. 우리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구경한 여자 영화감독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플레져 2005-11-1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은진 감독이 독립영화와 단편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출연할 때 부터 알아봤지요 ㅎㅎ 저는 아직 못 봤지만, 오로라 공주 스티커로 도배한 차창만 봐도 섬뜩하네요.
대낮인데요...

하루(春) 2005-11-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영화, 단편영화에 관심을 많이 보여서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캐스팅을 안 해주더랍니다. 영화 볼만해요. 볼거리가 꽤 돼서 지루하지도 않더군요.

릴케 현상 2005-11-1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와이키키 브라더스 안 보셨나요?

하루(春) 2005-11-1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봤는데요?

릴케 현상 2005-11-15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자 영화감독이 첨이라는 것 같아서...그럼 방은진 감독 옛날 영화가 첨 나왔나보죠?

로드무비 2005-11-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정화의 연기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하셨구만요.
어떻던가요?^^

로드무비 2005-11-1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여자 영화감독들.
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의 정재은,
질투는 나의 힘, 미소의 박경희, 또 누가 있더라?^^

가시장미 2005-11-1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멋진 영화리뷰예요. 저는 요즘 영화리뷰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져서...
시도도 못하고 있습니다. ^-^;; 이상하죠.. 영화를 집중해서 안보나봐요.
아무래도 남자친구랑 극장에 가면서부터.. 이런 현상이 _-_)~ 으헤헤헤

하루(春) 2005-11-15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산책님, 아.. 제가 착각했어요. 임순례 감독은 여자로 잘 생각이 안 돼서... ^^;
로드무비님, 엄정화는 그냥 준수했어요. 아주 뛰어나지도, 너무 부족하지도 않던데요. 참.. 제가 많은 여자감독들을 간과하고 있었네요.
가시장미님, 이게 멋진가요? ^^;; 그냥 그런데.... ㅎㅎ

가시장미 2005-11-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가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왜 그런 사건을 벌이는지에 포인트가 있어서 더 흥미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부분을 잘 집어주신 것 같아서. 멋진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화 내용은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을 것 같네요. ^-^

하루(春) 2005-11-1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감독이 그런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의도한 거겠죠.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관객들이 동의해주길 강.요.하는 겁니다. 치명적인 단점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비주얼은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