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지역부터 봄꽃 축제들이 이어져 올라오고 있습니다. 천안함을 비롯한 비보들이 전해지면서 주춤하는 기색이지만, 그 당당하고 활기찬 봄 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산야에서 봄기운은 어느 곳부터 찾아 올가요.

   아마도 이곳, '과수원'이 아닐가 싶습니다. 매실꽃, 배꽃,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사과꽃 등 각종 과일 꽃들이 가장 먼저 화사한 봄기운을 풍기고, 사람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습니다. 각종 봄꽃 축제들도 이 과수원의 언덕들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흐가 전하는 연분홍빛 꽃 만발한 과수원의 봄 기운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과수원의 그런 봄기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여린 가슴에 찾아온 화사한 봄빛과 과수원의 따듯한 색채를 화폭 가득, 그대로 담아냈습니다. 오늘은 가장 먼저 찾아온 과수원의 봄 기운을 그대로 그려낸 고흐 말년의 완성된 작품들을 함께 나누고 감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고흐 그림과 아래 간략한 약력은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위키백과, "A R C(http://www.artrenewal.org)", "반고흐 미술관(http://www.vangoghmuseum.nl)", 문화 예술사(http://windshoes.new21.org)의 정보들을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반고흐, 영혼의 편지(Dear Theo: The Autobiography of Vincent Van Gogh, 도서출판 예담 1999)"와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민길호 지음, 2006, 학고재)", "천년의 그림여행(Stefano Zuffi, 스테파노 추피 지음, 예경)",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Alexander Sturgis 편집, Hollis Clayson 자문,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를 참고하였습니다. 더 관심있는 분들은 직접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 귀를 붕대로 감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 Oil on Canvas, Arles, 1889년, 1월, 니아초스 컬렉션(Collection Niarchos)


   고흐는 화가로서의 마지막 생애 10여 년 동안에 동생 테오(Theo van Gogh, 네덜란드, 1857-1891)의 전적인 지원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생전에 1작품을 제외하고는 팔린 작품도 거의 없었으며, 모델도 쉽게 살 수 없었던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자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느낌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더불어 세월과 함께 변화하는 과정의 자화상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자화상도 고흐의 말년에 가까운 1889년에 고흐의 가장 유명한 고갱(Paul Gauguin, 프랑스, 1848-1903)과의 일화까지 전해주는 인상이 깊은 작품입니다.

   "제 앞에 닥친 현실을 비겁하게 피하거나 잊어버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때로는 감사하고 분노하며 슬퍼합니다. 절대적인 불행은 없습니다. 그 불행을 참고 이기면 결국 행복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믿기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슬픔이 갉아먹은 저의 얼굴도 미워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듯할 때는 또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합니다. 아무 죄도 없이 불쌍한 인간들을 구제하려다 온갖 수모 속에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분을 생각합니다. 그 고통에 비하면 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마음의 위로를 받곤 합니다. 당신의 자비로 힘과 용기를 주소서." 

   윗 글은 이 시기에 고흐가 남긴 신에 대한 고백입니다. 고갱과의 일화를 전해주는 위 특이한 자화상을 보면, 하얀 붕대로 귀를 동여맨 얼굴이 고통스러워 보이며, 눈이 쏙 들어가 생기도 없으며, 핏기도 사라져 더 늙어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의지를 불태우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아래 고백을 통하여 그런 심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의 뜻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저의 눈은 살아 불타고 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영혼은 아직 시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그린 위 초상화는, 창백하고 늙은 얼굴이 빨간색, 오렌지색 뒷배경과 함께 사그라들지 않은 저의 정열을 나타낸 것입니다."

   굳게 다문 입에 꽂힌 파이프에서 뿜어대는 연기는 하얀 물결 같은 원을 그리며 붉은 벽을 가로질러 허공으로 향해 흩어집니다. 이것을 통해 고흐의 숨결과 영혼의 움직임을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탁한 녹색의 겨울 외투와 검은 털이 달린 어두운 색깔의 모자가 분위기를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죽음의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더라도 헤쳐나갈 힘과 영혼의 부르짖음이 아직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자화상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교류로 밝고 강렬한 화풍을 완성하다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포르트 춘데르트(Zundert)'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운명처럼,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곳은 천주교 신자가 더 많은 보수적인 마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이 아름다운 곳과 배경이 화가의 꿈을 안고 그림을 시작하던 고흐에게도 적쟎은 영향을 미친 근원이기도 합니다.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1569년, 16살이 되던 고흐는 센트 삼촌이 경영하고 헤이그와 런던, 파리에 지점을 두고 있던 구필 화랑에서 일하면서 이후 화가로서의 꿈을 키웁니다. 동생 테오(Theo van Gogh, 네덜란드, 1857-1891)도 헤이그 지점의 이 화랑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하면서, 화가의 길을 가는 고흐의 삶에 큰 밑거름이 되었고, 27살이 된 1880년 가을, 브뤼셀(Brussel)에 하숙집과 미술 학원을 정하면서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188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상주의(impressionism)' 화가들과 교류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피사로(Camille Pissarro, 프랑스, 18301903)모네(Claude Monet, 프랑스, 1840-1926),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 1814~1875),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프랑스, 1796~1875), 고갱 등을 만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어둡던 그림의 채색은 점차 밝아졌고 붓 터치도 여느 인상파 화가들처럼 짧고 간결하며 강렬해졌던 것입니다.

   1888년 2월, 아를(Arles)에 정착하면서 후기 인상파 화가인 고갱(Paul Gauguin, 프랑스, 1848-1903)과 교류하였으나, 그 관계가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큰 다툼 끝에 결국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고흐는 오늘의 위 자화상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남긴 것처럼, 자신의 귓불을 잘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 시기는 고흐가 극심한 고독과 극빈했던 삶에 지쳐 현실에 대한 용기를 잃고, 예민한 신경증과 갑작스런  발작 증상, 폭력성으로 인하여 심히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1890년, 결국은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접고 아를(Arles)을 떠나, 생레미(Saint-Rémy)에 있는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했던 때입니다. 많이 좋아지면서 퇴원하였고 요양에 들어갔지만, 결국 1890년 7월 27일, 당시 고흐의 나이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있는 아름다운 황금 밀밭 언덕에서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 자살함으로써, 영혼의 예술가로서의 열정적이었던 삶을 마감합니다.



    

자두꽃이 만발한 과수원(Orchard in Blossom, Plum Trees), Oil on Canvas, Arles, April, 1888,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Scotland, Europe



    

살구나무 꽃이 활짝 핀 과수원(Orchard with Blossoming Apricot Trees), Oil on canvas, Arles, March 1888, Van Gogh 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 Europe

   

   

연분홍빛 꽃이 활짝 핀 복숭아나무(Pink Peach Tree in Blossom (Reminiscence of Mauve)), Oil on Canvas, Arles, March 1888,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Europe



   1988년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그림에 관해 밤샘 토론을 자주 하면서 건강도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파리의 생활을 접고 요양을 위해 햇볕이 온종일 내리쬐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이사합니다. 오늘 소개한 위 자화상을 포함한 7작품들을 비롯하여, 앞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해바라기 그림이나 황금빛 밀밭이 소용돌이치는 그만의 독창성으로 완성된 그 아름다운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던 것입다.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기원했던 꽃 만발한 과수원 풍경

   고흐가 요양을 위해 아를로 이주하면서, 시골 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친구 고갱을 아를의 화실로 불러 함께 지냅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예민하고 소심했던 성격 탓에 고흐는 주변 사람이나 친구와도 바라는 만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인지 고갱과의 관계도 불행하게도 그 결말이 좋지 못했습니다. 1888년 말, 결국 큰 다툼 끝에 고갱은 아를을 떠났고, 고흐도 역시 자신의 귓불을 잘라 마음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테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고흐의 생활과 창작활동을 유지했던 이 시기에, 동생 테오의 결혼이 있었습니다. 물론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축하해줬으며, 진실로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으로 닥칠 경제적인 어려움과 걱정하는 마음에 불안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이렇듯 불안한 미래와 아무 준비도 없는 병든 몸과 생각이 돌처럼 가슴을 짓누르면,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조이기도 했던 힘든 시기입니다.

   "저는 이대로 버려져도 좋으나, 새로 태어난 생명, 조카 빈센트에게는 절대로 저와 같은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저 하나로 그 고통은 충분합니다..... 어떤 고통이든 저에게 주소서. 그리고 저의 모든 가족들에게는 당신의 평화를 내려 주소서."    

   고흐의 말년인 1890년 1월 31일, 드디어 조카가 순산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미치더라도 창조하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고흐는 정신병적 증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곧바로 화폭 앞에 앉았으며, 자신의 영혼에게 온힘을 모아 소리쳤습니다. 계속되는 환각과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잠깐씩 제정신이 돌아올 때는, 어김없이 먼저 추억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마음의 평화와 희망을 얻곤 하였습니다.


      

  

 꽃 만발한 과수원(Orchard in Blossom), Oil on Canvas, Arles, April, 1888, Private collecion, Seitzerland, Europe
  

 

활짝 꽃핀 배나무(Blossoming Pear Tree), OIl on canvas, Arles, France, March 1888, Van Gogh 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 Europe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 가지들(Branches of Almond tree in Bloom), Saint-Rémy, 1890년 2월, Oil on canvas,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빈센트 반 고흐 국립미술관(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Europe


    사랑하는 어머니께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며칠 전부터 답장하려던 편지를 이제야 씁니다. 시간이 어찌나 잘 가는지요. 어머니께서도 요즘의 저처럼 테오와 제수씨 생각을 많이 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수씨가 무사히 분만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사실 저는 태어난 조카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기를 무척 원했습니다. 요즘 제가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제 이름을 땄다고 하니, 그 아이의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몬드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가 있는 그림이랍니다. 이곳 의사들 덕분에 이곳에 올 때보다 더 차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병원 밖의 세상에 익숙해지려고, 떠 다시 자유롭게 지내면서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890년 2월 15일, 아들 빈센트.

   위 여러 과일나무들의 화사한 봄빛을 담아낸 고흐의 과수원 풍경은, 한결같이 수정처럼 맑고 푸른 하늘 아래 각종 과일 꽃들이 막 피어나 있으며, 청결하고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봄기운의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습니다. 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특히 마지막 배꽃과 아몬드꽃 그림에서, 이리저리 뻗친 나뭇가지마다 하얀 꽃과 꽃망울이 탐스럽고 복스럽게 맺혀 있습니다.

     가족과 조카를 향한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과수원 풍경

   마치 여러 개의 팔을 가진 신이 봄날을 축복하며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외로운 영혼들을 안아주는 것처럼 포근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이미 고흐는 먼 꿈의 나라와 평안만이 존재하는 죽음 후의 세계를 바라고 예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평화와 희망만이 존재하는 고흐가 바라는 그 어떤 따스하고 평온한 꿈의 나라를 그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이제 고통은 보이지 않으며, 희망의 파란 하늘 아래 활짝 핀 꽃들만이 사랑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조카 빈센트의 탄생을 축복하는 삼촌의 영원한 자비가 가득하며, 조카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이 충만한 작품입니다. 실제 마치 판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간결하면서도 화사하고, 가지들과 꽃들의 우아한 자태가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동생 테오 부부도 아기가 침대 위에 걸어 둔 이 그림을 "매료되어" 쳐다본다는 답장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애초에 고흐도 이 그림과 관련한 연작을 구상하였으나, 그런 계획대로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된 직후 발작이 다시 시작되어 작업을 계속할 수 없었으며, 몸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에는 이미 개화가 끝난 뒤였고, 이 봄 기운이 고흐 생애의 마지막 봄이었기 때문입니다.

   고흐가 전하려고 했던 봄기운을 찾아 각종 자두꽃, 살구나무 꽃, 복숭아꽃, 배나무 꽃, 아몬드꽃 등이 만발한 과수원 풍경으로 떠난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자연이 과수원에 선물하는 봄 풍경을 결코 놓치지 않았던 따듯한 고흐의 마음이 가득 담긴, 살아 생전에 그토록 갈구했던 평화와 사랑에 대한 고흐의 희망이 그대로 느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이번 주에 맑고 부드러운 그 봄빛과 따스한 봄햇살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어떨가요. 바로 봄소풍 계획을 세워보시면 어떨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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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연분홍빛 화사한 꽃 만발한 과수원 풍경 - 고흐(네덜란드, 1853-1890)
    from 초하뮤지엄.넷 chohamuseum.net 2010-04-07 15:10 
    남부 지역부터 봄꽃 축제들이 이어져 올라오고 있습니다. 천안함을 비롯한 비보들이 전해지면서 주춤하는 기색이지만, 그 당당하고 활기찬 봄 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반도의 산야에서 봄기운은 어느 곳부터 찾아 올가요. 아마도 이곳, '과수원'이 아닐가 싶습니다. 매실꽃, 배꽃,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사과꽃 등 각종 과일 꽃들이 가장 먼저 화사한 봄기운을 풍기고, 사람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습니다. 각종 봄꽃 축제들도 이..
 
 
 


    바쁜 가운데에서도 기념 절기들은 찾아옵니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절은 교회력(敎會歷, 라틴어: Annus Ecclesiasticus), 절기 중 하나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올해는 오는 4월 4일 일요일을 부활 절기로, 이번 한 주를 고난 주간으로, 그리고 오늘 4월 2일 금요일을 대부분 고난일로 지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였던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과 관련한 그림들을 선보였는데, 그 숫자가 많지는 않기에, 오늘은 종교와 관련하여 다소 희귀한 그의 그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연과 주변 환경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된 상황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고흐 그림과 아래 간략한 약력은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위키백과, "A R C(http://www.artrenewal.org)", "반고흐 미술관(http://www.vangoghmuseum.nl)", 문화 예술사(http://windshoes.new21.org)의 정보들을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반고흐, 영혼의 편지(Dear Theo: The Autobiography of Vincent Van Gogh, 도서출판 예담 1999)"와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민길호 지음, 2006, 학고재)", "천년의 그림여행(Stefano Zuffi, 스테파노 추피 지음, 예경)",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Alexander Sturgis 편집, Hollis Clayson 자문,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를 참고하였습니다. 더 관심있는 분들은 직접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고흐의 자화상(Self-Portrait), 1889년 9월, Oil on Canvas, Paris Musee d'Orsay, France


   고흐는 모델을 쉽게 살 수 없었던, 그를 평생 괴롭혔던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자기 자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느낌의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며, 또한 그런 유작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자화상도 고흐의 말년에 가까운 1889년에 그린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작품으로, 고흐 특유의 거친 붓질과 인상적인 화풍이 그대로 드러난 생기 넘치는 명작입니다.

   이 시기는 고흐가 극심한 고독과 극빈했던 삶에 지쳐 현실에 대한 용기를 잃고, 예민한 신경증과 발작적 폭력성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워 했으며, 결국은 생레미(Saint-Rémy)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많이 좋아지면서 퇴원하였지만, 1890년 7월 27일, 당시 고흐의 나이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있는 밀밭 언덕(언저리)에서 영혼의 마지막 안식처를 찾아 예술가로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놓치 않았던 말년의 고흐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아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글을 통하여 고흐의 심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흐가 병원에서 1889년에 완성한 위 자화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당시의 정신 병원에 입원하면서 삶에 대해 불태웠던 의지와 굳건한 심경을 진솔하고 희망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림을 그리다 지쳐서 쉬는 틈틈이 조금씩 쓰고 있어. 그림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지.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또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단다. 건강을 위해 정신 병원에 조금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파리에 있을 때의 어중간한 상태보다는 이렇게 확실하게 아픈 쪽이 더 나은 것 같아. 너도 이곳에서 막 완성한 환한 바탕의 자화상을 파리에 있을 때 그린 자화상 옆에 두고 본다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건강해 보인다고 생각할 것이야. 사실 나는 훨씬 건강해졌단다.

   다시 희망을 갖게 되었어. 그 희망이 뭔지 아니? 가정이 너에게 의미하는 것이, 나에게 흙, 풀, 노란 밀, 농부 등 자연이 갖는 의미와 같기를 바라는 것이야. 다시 말해서 너에게 가정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할 이유이며, 필요할 때는 너를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는 것이기를 바란단다. 그래서 부탁하건데, 너무 일에 찌들지 말고 너 자신을 돌봐라. 아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이 당시 고흐는 주변에서 늘 감상하던 과수원 풍경 가운데, 올리브나무들도 유심히 관찰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감성을 다양한 느낌과 분위기로 묘사한 연작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래처럼 푸른 하늘에 이글거리는 듯 정열적인 올리브나무와 높은 산을 배경으로 구름 낀 하늘 아래 무거운 느낌의 올리브나무, 그리고 마지막에 찬란한 정적이 흐르는 올리브 과수원을 통하여 당시 고흐의 심경과 느낌을 색다르게 표현하였습니다.



    

올리브 과수원(Olive Grove), Oil on Canvas, Saint-Remy, June-mid, 1889, Kröller-Müller Museum, Otterlo, The Netherlands,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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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리브 과수원(Olive Grove), Oil on Canvas, Saint-Remy, 11-12, 1889, Van Gogh Museum, Amsterdam, The Netherlands, Europe



    

오렌지색 하늘에 올리브 나무(Olive Grove, Orange Sky), Oil on Canvas, Saint-Remy, 11, 1889, Goteborgs Konstmuseum, Goteborg, Sweden, Europe

 
   바로 위 올리브 밭을 묘사한 찬란한 정적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오렌지 색채의 밝은 하늘에 푸른색과 밝은 노란색의 노을을 찬란하고 화려하게 채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밝고 환한 하늘 아래 올리브나무들은 마치 고요한 정적에라도 빠진 듯, 어둡고 진한 녹색으로 대조적으로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정적과 고요가 한층 더 강조되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어두운 붉은 색채의 땅도 진한 색으로 올리브나무와 통일하였으며, 그 땅에 드리운 올리브나무들의 그늘에 드리운 그림자들도 역시 더 진한 푸른색채로 어둡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붉은 땅은 우리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고통의 피가 올리브나무와 함께 아직도 여전히 그 땅에 남아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고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며 죽으시던 그날의 저녁 노을이 위 그림과 같았을 것이라는 고흐의 생각과 신념을 대변합니다. 또한 오렌지빛 하늘에 그 찬란한 노란색의 노을빛찬란한 슬픔을 통하여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으며, 3일 뒤 영광스러운 부활을 약속하였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올리브나무들을 그림 고흐의 작품은 더 많습니다. 빛의 흐름과 대기의 흐름, 각기 배경이 조금씩 다른 유사한 연작들을 찾아 감상하는 것도 고흐의 작품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 외에도 직접 '그리스도의 시체를 끌어안고 탄식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그린 유작들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덤에 장사된 예수 그리스도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마태복음 27장 46-61절)




  

  ▲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프랑스, 1793-1863), 비탄에 빠진 성모 마리아(Pieta), 1850년 경. Oil on canvas.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 예수의 시체를 안고 탄식하는 성모 마리아(Pietà, After Delacroix), 1889, Oil on canvas.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위 세번 째의 올리브 나무에서 고흐가 묘사한 찬란한 슬픔은 이 '성모 마리아의 탄식'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밝은 노란 색채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온갖 수난과 고통, 십자가에 못박히는 참혹한 운명을 대조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고통을 견디다 죽음으로 사색이 된 예수의 얼굴은 안스럽기도 하고 평온해 보이기도 합니다.

     찬한한 슬픔이 가슴을 파고드는 고흐의 '비탄의 마리아'

   꾹 다문 입은 불평 한마디 없고, 만신창이가 된 몸도 인간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느껴지며, 진정 가슴으로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얼굴과 표정이 더 침통하고 구슬퍼 일그러졌습니다. 낭만주의 화가로 파리에서 태어나 보르도(Bordeaux)에서 공부한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프랑스, 1793-1863)의 같은 그림과도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처럼 같은 주제의 위 두 그림을 비교해 볼 때, 색채도 고흐는 들라크루아보다 훨씬 밝고 환한 노란색을 상용하였지만, 훨씬 더 찬란한 슬픔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의 고통을 온전히 체험했던 예수를 가슴과 두 팔로 받아 안으려는 마리아에게 그 고통과 비탄이 그대로 전해진 듯 합니다.

   자식의 고통을 보며 슬퍼하지 않을 부모가 세상 그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무 죄도 없이 그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아들의 육체적인 고통에 그 어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끼?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그 어머니의 사랑은 "숭고한 사랑의 징표"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는 속세를 벗어나 초연해진 듯 보이지만, 운명처럼 받아들인 숨어있는 예수의 고통과 슬픔을 붉은 피로 물들여 묘사했습니다.

   이때도 건강 상태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괴로울 때면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언젠가는 해보고 싶던 들라크루아의 흑백 판화 '피에타(Pieta, 탄식하는 성모 마리아)'를 화폭에 그려보기로 합니다. 고흐는 좋아하는 화가들의 복제화를 보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많이 하였는데, 꿈 속에 나타난 천사같은 소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이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운명처럼 그렸던 복제화지만, 그 느낌은 확연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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